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간통의 경우에도 처벌 위주가 아니라 인간적 차원에서 적절한 형벌만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15년 12월 기록을 보자.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윤수(尹須)·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다 음탕하고 더러운 행위로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으니 악행을 징계하는 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감동·금동·연생 등(의 유사한 사건)이 잇따라 나왔으니,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한갓 법령만으로 방지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에 대한 연민
조선의 이념인 유학은 질병이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철저히 내면을 성찰하고 욕망을 억제해 마음을 닦도록 요구했다. 양심(養心)이나 수심(修心)의 방식으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라는 도덕적 메시지였다. 하지만 종교나 무속은 다르다. 불가항력적인 재앙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정서적 위안, 안심(安心)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질병이라는 현실 앞에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보통 사람이었다. 특히 질병 치료에선 사대부와 유학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찰에 가서 약사불(藥師佛)에 비는 건 물론, 도가의 기문둔갑술을 쓰고 무당의 푸닥거리로 질병을 치료하려 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불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의 외삼촌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사형제를 죽였고, 한술 더 떠 후궁들과 여성 편력을 일삼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대립은 어린 세종에게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더 깊게 했다.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묘소인 헌릉.
‘학을 뗀다’는 옛말이 이런 이상한 행동에 대한 해답이다. 세종은 학질을 떼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머문 것이다. 태종은 이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 “내가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을 근심하여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하여 단마(單馬)로써 환자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나가 피하여 병 떼기를 꾀하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문제는 치료방법이었다. 실록은 덧붙인다. “6월 6일 임금과 양녕, 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개경사에서 피병할 때 술사둔갑법(術士遁甲法)을 써서 시위를 다 물리치고 밤에 환관 2인, 시녀 5인, 내노 14인만 데리고 대비를 견여(肩輿·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는 가마)로써 모시어 곧 개경사로 향하니 밤이 삼경이라 절에 가까이 이르러 임금이 다만 한 사람만 데리고 먼저 본사에 가서 있을 방을 깨끗이 쓸고 돌아와 대비를 맞아 절에 머문 지 사흘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6월 11일엔 도류승 14인을 모아 도지정근(桃枝精勤)을 베풀었는데, 이는 복숭아 가지를 잡고 기도하는 도교 의식이었다. 6월 14일엔 아예 무당을 시켜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학질이 낫기를 기원했다.
세종이 안타깝게 병구완을 했지만 대비는 학질을 세 번 반복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임금이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수일이었으며, 머리 풀고 발 벗고 부르짖어 통곡했다고 그 슬픔을 기록했다. 의약과 무속, 불교 사이에서 당연히 이성적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 세종도 어머니의 학질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선 무속에 더 집착한 보통의 남자였다.
마침내 세종 20년 사간원에서 푸닥거리를 중지할 것을 간언한다. “전번에 거동하시다가 환궁하시던 날에 신들린 무당으로 하여금 길옆에서 음사를 베풀어 대소신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종의 반응은 되레 한술 더 뜬다. “그렇다. 본궁에서 베푸는 음사가 매우 많았으므로 이후로는 마땅히 은밀한 곳에서 행하게 할 것이다.”
치료 위해 佛法, 巫俗 집착
세종 24년의 기록은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무릇 사람의 수종다리[?]는 양기가 막힌 데서 말미암으니, 만약에 주술(呪術)을 행하여 음기가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음양이 서로 화하게 하면 혹 병이 낫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가 수종다리의 병이 발생하자, 한 주술 하는 소경을 불러 다스리게 하였더니 조금 나았다. 비록 이것으로 쾌히 낫지는 못하였으나 주술에 힘입어 삶을 얻은 것이니, 그 소경에게 옷 한 벌과 쌀 2석을 하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