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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시절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감성팔이, 희망고문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好시절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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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내려가서 설치미술작가 장영혜의 작품을 한참 본 후 미술관 바깥으로 나와서 배회했다. 승용차 없이는 엄두도 못 낼, 평일에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저 청계산 깊은 곳의 미술관에 비한다면, 어찌 됐든 한국의 미술계와 시민들은 큰 선물을 받은 셈이기는 하다. 큼직하게 구획 정리를 하고 동선을 안쪽 깊이 자연스럽게 유도하기도 해서, 보행로가 서너 배 넓어진 효과까지 있다. 나는 드넓은 창가에 앉아 쌀쌀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중정을 보면서 앉아 있었다.

마담 보바리의 ‘자기愛’

갑자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생각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시골 오지에서 벗어나려는 소녀 엠마, 읍내 최고 신랑감인 의사 샤를 보바리와 혼인하지만, 기존의 관습과 도덕의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몸부림친다. 몸부림 끝에 결국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 마음의 통증이 심했다.

1856년 4월 탈고된 이 소설은 1815년 빈 체제가 성립된 이후의 유럽 시민의 일상 문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엠마 보바리는 여성지를 탐독한다. ‘라 코르베유’와 ‘살롱의 요정’. 각종 공연물의 개봉일자와 경마, 야회, 여가수의 데뷔, 매장 오픈 등을 샅샅이 읽는다. 으젠 쉬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 묘사된 실내 가구를 메모했고, 오노레 드 발자크나 조르주 상드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품 속 여주인공과 자신의 일상을 겹쳐 상상한다. 그런 ‘잡다한 독서’를 통해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법학도 레옹이 나타난다. ‘통증’이 심한 엠마는 말한다.

“바닷가에 지는 저녁놀처럼 멋진 것은 없어요.”



그러자 레옹이 작업을 건다.

“호수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폭포의 매력과 거대한 빙하의 맛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나무들이 급류를 가로질러 무성하고, 천애절벽에 걸려 있는 듯한 오두막집들에다, 구름이 반쯤 열려지기라도 하면 발아래 천 길 밑으로 골짜기가 완전히 보이기도 한답니다. 이러한 풍경은 틀림없이 우리를 열광시킬 것이고, 기도의 세계나 법열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줄 겁니다. 그러니 나는 유명한 음악가가 상상력을 더 잘 북돋우기 위해서 늘 장엄한 경치를 앞에 하고, 피아노를 치러 그런 곳에 가는 것을 조금도 놀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다들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평일의 카페에서 잡지를 읽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민들, 최신 유행을 서둘러 받아들이는 시민들, 정치적 억압을 피해 내면의 자유를 찾으려는 시민들, ‘영혼의 사건’을 위해 방황하는 시민들. 2013년 한국의 도시 일상에서 흔히 보게 되는, 칙릿 소설에서, 혹은 홍대 앞 힙스터 문화에서, 혹은 민음사 창고 세일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매표소 앞에 길게 줄지어 서는 마음의 풍경들 말이다.

‘아늑한 평화’를 소망하다

미술관을 나와서 시내로 걸어 나가는데, 자연스레 광화문 앞으로 걷게 됐다. 원래는 광화문 앞을 스쳐 지나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가서 다리 쉼을 할 생각이었다. 광화문을 등지고 볼 때, 비록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이 압도적인 스케일을 갖고는 있지만, 그래도 반대편의 둔중한 건물들에 비해서는 마음이 놓인다. 그 뒤편의 골목들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광화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이벤트 때문에 걸음이 멈췄고 어느새 나는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확한 역사적 고증에 따른 재현이라기보다는 서유럽의 근대 국가주의적 근위 열병식을 옮겨놓은 듯한 이벤트였지만,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 열기는 무엇일까. 왜 역사적 고증이 아니라 문화적 이벤트에 이토록 집중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경복궁으로 들어섰는데, 아!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탄성이 나왔다.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야말로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게다가 중국이며 베트남이며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이 깃발을 따라 몰려다니는 상황이었음에도, 흡사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한 장면처럼 몰려다니는 관광객들은 그저 바람처럼 스칠 뿐이고 내 앞에는 장엄한 근정전이 갑자기 쑥 솟아오른 듯 서 있었다.

好시절이 과연 있기나 했던가

경복궁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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