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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리뷰

신화를 만화로 옮길 때 유쾌한 트릭 즐기는 법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와 닐 게이먼의 ‘북유럽신화’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신화를 만화로 옮길 때 유쾌한 트릭 즐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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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는 대재앙(라그나로크)에 맞서 싸우는 슈퍼히어로들. 왼쪽부터 헐
크(마크 러팔로)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발키리(테사 톰슨) 로키(톰 히들스턴).[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는 대재앙(라그나로크)에 맞서 싸우는 슈퍼히어로들. 왼쪽부터 헐 크(마크 러팔로)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발키리(테사 톰슨) 로키(톰 히들스턴).[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가히 슈퍼히어로 영화 전성시대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필두로 한 마블코믹스 만화 캐릭터를 극화한 영화들이 놀라운 흥행 기록을 세워가고 있다. 이로 인해 이들 히어로의 종합선물세트 격인 어벤저스 시리즈도 대박을 터뜨리자 슈퍼히어로 만화의 원조인 DC코믹스의 종합선물세트 격인 ‘저스티스 리그’마저 실사영화로 제작돼 개봉했다. 

그런데 그 전개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본말이 전도되는 역전현상이 감지된다. 사실 슈퍼히어로의 원조는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대표되는 DC코믹스다.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으로 대표되는 마블은 후발주자다. 이들 슈퍼히어로가 만화로 탄생한 순서를 보면 슈퍼맨(1938) 배트맨(1939) 스파이더맨(1962) 아이언맨(1963) 순이다. 그래서 실사영화화도 같은 순서로 이뤄졌다. 하지만 실사영화의 흥행 성적은 DC 캐릭터보다 마블 캐릭터가 앞서고 두 만화사 공히 대표 캐릭터보다 후발 캐릭터가 앞서는 현상이 발생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이야기와 캐릭터의 신선함에서 전자보다 후자가 앞서기 때문이다. 후발주자일수록 선발주자와 차별되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끌어내야 한다. 실사영화로 옮길 때 그런 차별성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슈퍼히어로 중 가장 전지전능한 존재가 최초의 히어로인 슈퍼맨이란 점에서 확인된다. 슈퍼맨은 처음부터 천하무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에 맞설 악당(빌런)을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슈퍼맨의 힘을 약화시키는 클립턴 운석 같은 아이디어가 뒤늦게 등장한 이유다. 이후 등장한 슈퍼히어로가 저마다 뚜렷한 약점과 한계를 지니도록 설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야지 이야기를 술술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부자라는 것 외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우울한 배트맨, 열등감 많은 풋내기 사춘기 소년 스파이더맨, 과학천재이긴 하지만 인간적 약점으로 똘똘 무장한 아이언맨, 아예 사회적 ‘왕따’로 구성된 X맨들…. 신의 경지에 있던 슈퍼히어로가 점차 인간화하는 셈이다. 21세기 들어 마블 히어로 영화가 각광받는 이유도 거기에 숨어 있다. 겉은 멋진 슈퍼히어로인데 속은 못나고 열등감 많은 우리 인간을 더 닮았기 때문이다. 




북유럽신화 속 신들의 세계

그런 면에서 마블 히어로 중 토르는 특이한 위상을 지닌다. 그 자신이 이미 신(神)이다. 토르는 북유럽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다. 바로 신들을 지키는 신들의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 소설가 닐 게이먼이 쓴 ‘북유럽신화’를 들여다보자. 북유럽신화는 계보가 복잡하다. 여러 종족의 신화가 정복전쟁 과정에서 통합된 탓으로 보인다. 신족(神族)부터 2갈래로 나뉜다. 에시르족과 바니르족이다. 정복민족 계열의 에시르족은 전투와 정복의 신들이다. 아스가르드의 주신인 오딘과 그 아들이자 번개의 신인 토르가 이에 속한다. 원주민 계열의 바니르족은 평화와 풍요의 신들이다. 수확의 신인 프레이르와 그 여동생이자 미의 여신인 프레이야가 이에 속한다. 

에시르족과 바니르족의 침을 섞어서 만든 ‘지혜의 신’이자 ‘시의 신’인 크바시르도 있다. 일종의 하이브리드 신(神)인 셈이다. 가장 특이한 신은 로키다. 로키는 에시르족도 바니르족도 아닌 거인족 출신으로 오딘과 의형제를 맺은 교활한 말썽쟁이 신이다. 북유럽신화 속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로키의 장난에서 비롯되고 토르에 의해 해결된다. 

그리스신화에 비유하자면 오딘은 제우스와 하데스, 프로메테우스를 섞어놓은 듯한 존재다. 제우스는 포세이돈과 하데스 두 형제와 함께 아버지인 거신 크로노스를 죽이고 올림푸스의 주신이 된다. 오딘 역시 빌라와 베 두 형제와 함께 최초의 생명체이자 거인족의 조상인 이미르를 죽여서 세계를 창조하고 통나무에 입김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고 지혜를 부여한다. 

그리스신화에선 제우스 3형제가 하늘, 바다, 하계를 나눠 다스리지만 북유럽신화에선 오딘을 제외하고 빌라와 베는 금방 자취를 감춘다. 오딘은 특히 전장에서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은 이들(에인헤랴르)의 궁전인 발할라에 머물며 그들을 불러 모으는 발키리라는 여신들을 거느린다는 점에서 죽음의 신인 하데스의 풍모도 지닌다. 게다가 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내놓거나 세계수인 이그드라실에 9일이나 거꾸로 매달리는 고행을 겪는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지혜와 불을 나눠줘 고난을 겪는 프로메테우스나 기독교신화의 예수를 닮기도 했다. 

토르는 제우스의 아들 중 전쟁의 신 아레스와 헤라클라스를 합쳐놓은 듯한 신이다. 힘이 장사에 싸움도 잘해 신들의 세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사로 나서 온갖 모험을 펼친다. 그때마다 짝패가 되어 문제 해결에 나서거나 아니면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 되는 신이 로키다. 그런 점에서 꾀바른 헤르메스와 장난꾸러기 큐피드 그리고 기독교신화의 ‘타락천사’인 루시퍼의 면모를 함께 갖췄다고 할 수 있다. 


마블 월드 속 슈퍼히어로 세계

마블은 이런 신화를 어떻게 대중적 슈퍼히어로 이야기로 변용했을까. 우선 등장인물을 단순화했다. 바니르 계열 신들은 다 제거하고 에시르 계열 신만 남겨뒀다. 그중에서도 오딘(영화 속 앤서니 홉킨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로키(톰 히들스턴) 셋을 중심인물로 설정했다. 원래 북유럽신화의 3대 신은 오딘 토르 프레이르였는데 말썽쟁이 로키가 프레이르 자리를 치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본디 오딘과 의형제인 로키를 토르의 의형제로 바꿔친다. 토르와 로키의 라이벌 구도를 공고히 하면서 오딘에겐 심판 내지 중재자의 역할만 부여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다른 신들은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빌런으로 포장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두 번째로는 주무대를 우주 공간으로 옮겼다. 북유럽신화 속 세계는 앞에서 소개한 이그드라실이라는 거대한 세계수를 중심으로 9개로 나뉜다. 핵심만 소개하자면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 인간 세계인 미드가르드, 서리거인이 사는 요툰헤임 등이다. 마블은 미드가르드를 지구로 설정하고 아스가르드와 요툰헤임을 별개의 행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이 난관을 돌파한다. 대신 이들 세계를 넘나들 때 오직 신들에게만 허용되는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일종의 차원이동기로 변형시킨다. 그래서 신화 속에선 신들만 가능했던 차원 이동이 인간과 빌런에게도 가능해진다. 또 신화에서 아스가르드의 파수꾼으로 세계의 종말(라그나로크)이 올 때 나팔을 불어 이를 알리는 임무가 부여된 헤임달(이드리스 엘바)을 비프로스트의 관리자로 변형한다. 

세 번째는 신화 속에선 유부남인 토르와 로키를 모두 총각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야 인간 여성과 ‘썸’ 타는 관계 설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영화 토르 시리즈 1, 2편에 등장하는 지구 여성 제인 포스터(내털리 포트먼)와 토르의 러브스토리가 가능해지는 것도 이런 설정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 속 토르에게는 시프라는 아내가 있다. 토르의 무기인 ‘묠니르’라는 망치와 오딘의 무기인 ‘궁니르’라는 창이 생기게 된 것은 로키가 시프의 풍성한 금발을 다 밀어버린 사건에서 비롯했다. 신화 속에선 양성애 성향의 로키 역시 아내가 있다. 그것도 둘이다. 아스가르드에 사는 조강지처 시긴과 요툰헤임에 사는 여자 거인 앙그르보다다. 둘은 각각 3명의 자식을 낳는데 앙그르보다가 낳은 3명의 자식이 바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라그나로크를 몰고 오게 된다. 


잿빛 묵시록 vs 장밋빛 영웅담

영화 속 최강의 빌런 헬라(케이트 블란쳇)는 북유럽신화 속에서 로키의 사생아 3남매 중 막내딸 헬을 변형시킨 캐터릭다.[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속 최강의 빌런 헬라(케이트 블란쳇)는 북유럽신화 속에서 로키의 사생아 3남매 중 막내딸 헬을 변형시킨 캐터릭다.[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10월 25일 국내 개봉해 400만 넘는 관객몰이에 성공한 ‘토르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신화에서 세계의 종말을 뜻하는 라그나로크를 주제로 내걸었다. 라그나로크는 한편이 된 오딘과 토르, 프레이르 같은 신들과 주화입마(走火入魔)한 로키와 세 자식, 그들이 이끄는 서리거인들이 전쟁을 벌여 모두 죽음을 맞고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가 모두 파멸하는 끔직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독일 가극의 아버지 바그너가 ‘신들의 황혼’이라고 명명한 종말론적 사건도 이 라그나로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라그나로크에서 파멸을 가져오는 세 괴물이 있다. 로키와 앙그르보다 사이에서 태어난 3남매다. 첫째는 세계를 물어뜯는 거대한 늑대 펜리르, 둘째는 바닷속 모든 생물을 독살하고 육지까지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바다뱀 요르문간드, 막내인 셋째는 불명예스럽게 죽은 망자의 왕국을 다스리는 여왕 헬이다. 여기에 천지창조 이전부터 불타는 칼을 휘두르며 화염의 세계 무스펠(9개 세계 중 하나)을 지켜온 불의 거인 수르트가 가미한다. 오딘은 펜리르, 토르는 요르문간드, 프레이르는 수르트에게 각각 목숨을 잃는다. 발할라 궁전에 머물던 고귀한 영혼의 부대 에인헤랴르는 헬이 이끄는 망자의 부대와 더불어 궤멸한다. 로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헤임달을 죽이지만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마블 히어로 영화가 과연 이런 대재앙을 비극적으로 그려낼까. 당연히 아니다. 결과적으로 ‘마블판 토르’의 주요 3신(神) 중에서 최후를 맞는 이는 가장 나이 많은 오딘뿐이다. 그것도 자연사에 가깝다. 신화상의 라그나로크에서 맞수로 싸우게 되는 토르와 로키는 오히려 한편이 되어 아스가르드에 파멸을 가져올 악의 무리와 맞서 싸운다. 

그렇다면 그 악의 무리를 이끌게 될 최강의 빌런은 어떤 캐릭터가 맞을까. 늑대 펜리르? 뱀 요르문가드? 불의 거인 수르트? 마블 제작진의 선택은 팜 파탈이다. 신화 속 헬을 변형시킨 헬라(케이트 블란쳇)다. 헬은 신화상으론 로키의 세 사생아 중 막내딸이다. 마블 제작진은 이를 토르와 로키의 배다른 누나로 변형한 뒤 토르의 절대망치 묠니르까지 파괴하는 초절정의 파워를 부여한다. 심지어 헬라가 이끄는 군대는 지옥에서 살아나는 망자들이 아니라 발할라 궁에 잠든 명예로운 전쟁영웅 에인헤랴르로 바꿔놓았으니 ‘마블판 동방불패’라 할만하다. 

그럼 과연 토르와 로키는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내야 할까. 오딘의 여전사 중 ‘타락천사’라 할 발키리(테사 톰슨)를 토르의 파트너로 삼아 투입한다. 하지만 여전히 난공불락. 그래서 마블 히어로 중 최강의 파워를 지닌 헐크(마크 러팔로)까지 투입하는 초강수를 둔다. 잠깐 북유럽신화를 다루는데 갑자기 헐크라니? 바로 그 순간 손가락을 튕기듯 해법이 도출된다. 

어떤 체계든 그 내부 모순으로 발생하는 붕괴와 파국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체계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북유럽신화 속 세계는 9개 종족으로 이뤄진 폐쇄된 세계다. 하지만 마블월드에서 아스가르드는 신화와 전혀 무관한 헐크도 방문할 수 있는 행성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게 영화는 아스가르드의 파멸이란 신화의 형식은 그대로 빌려오면서 주인공들의 생명은 연장시키는 묘수를 찾아낸다. 그와 더불어 토르와 로키는 영생불사의 신적인 존재를 벗어나 더 인간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잿빛 묵시록을 장밋빛 영웅담으로 바꿨다고 화를 내야 할까. 북유럽신화에서도 라그나로크는 최종적 파멸만 뜻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희망이기도 하다. 오딘과 토르의 아들로 이뤄진 6명의 신이 아스가르드가 사라진 폐허 위에 이디볼이란 새로운 세계를 세우고 ‘생명’과 ‘생명에 대한 갈망’이라는 여자와 남자가 새롭게 태어난다. ‘토르-라그나로크’는 그렇게 신화와 만화를 모두 이해할 때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상상의 유희를 가르쳐준다.



신동아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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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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