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안 된다. 중년이라면 모를까 청춘남녀라면 집 안에서 방콕만큼은 말리고 싶다. 가을이 어디 독서하기에만 좋은 계절인가, 연애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지. 제아무리 도도하고 시크한 ‘차도남녀’라 해도 찬바람 아래에서는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야말로 초겨울은 인간을 본능에 충실하게끔 만드는, 평소 마음먹은 이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계절로 더할 나위 없이 ‘딱’이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인 게다.
찬바람이 불면 마음에도 감기가 걸린다. 일조량과 활동량이 줄어들면서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 분비가 저하되면 아무리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살짝 우울해질 수 있다. 이럴 때 방콕(실내 생활)을 고집하면 우울감이 더 심해진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물질이 세로토닌인데, 햇빛으로 생성되는 비타민D가 세로토닌 합성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이 피곤할수록 이벤트라도 만들어서 야외 활동을 하는 게 훨씬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사실 남성에게 연일 실내 생활은 치명적이다. 일조량이 감소되면 비타민D가 부족해져서 더 피곤해지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 비타민D가 부족하면 수태력도 저하된다. 글만 읽는 선비보다 마당쇠의 수태력이 더 좋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체내 비타민D 수치가 높으면 정자의 운동이 활발해지고 수정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난임의사로 환자들을 만나보면 실내 생활만을 하는 직업군 남성들의 정자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좋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인한 비타민D 결핍으로 정자가 부실해져 수태력 저하 모드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정자 숫자가 적어지고 활동성이 부실해지는 원인에는 스트레스와 과음, 흡연 등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요즘 세상은 임신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가득하다. 편의점에 가면 혼밥 혼술을 위한 음식이 즐비하다. 집보다 밖을 선호하고 연애로 불이 붙어야 할 청춘남녀들이 둘이 함께하는 것을 마다하고 혼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걸 선호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한창 나이에는 이유 없이 옆구리가 시리다 못해 아리기까지 할 터인데 너도나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 하다니,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하늘까지 마다하다니, 큰일이다.
정보의 홍수 덕분에 젊은이들의 지식도 넘쳐난다. 남녀 간의 위대한 사랑을 ‘호르몬의 장난’ 쯤으로 치부하는 이도 적지 않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남녀가 첫눈에 반하는 데 드는 시간은 0.1초. 그 0.1초 만에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면 엄청난 도파민이 분비된다. 부모가 반대할수록 더 치열하게 사랑하며 갈구하는 것이 바로 도파민 때문이다. 인체가 분비하는 천연 마약인 도파민에 지배를 받고 있을 땐 눈에 콩깍지가 씌어 부모 조언은 귓등으로도 안 듣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페닐에틸아민 수치까지 높아지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상태가 된다. 상대의 좋은 것만 눈에 들어온다. 사태가 이 정도 되면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살기를 희망한다.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의 몸에는 옥시토신, 엔도르핀 등 온통 사랑을 부추기는 호르몬으로 가득 채워진다. 찬바람이 불고 일조량이 적은 초겨울이면 감정이 더 극대화될 수 있다. 그래서 가을과 겨울에 결혼하는 부부가 봄보다 더 많다는 통계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필자 역시 겨울에 결혼식을 올렸다.
걱정스럽게도 요즘 시대 청춘남녀들은 마치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아무리 열렬한 사랑일지라도 유효기간이 있기에 에너지 낭비라며 지레 겁을 먹는 이가 많다고 들었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이 뇌와 호르몬의 정교한 상호작용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서 때가 되면 식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콩깍지가 2~3년이면 벗겨질 거라며 결혼을 마다하고 연애만을 선호하는 건 문제가 많다. 진짜 사랑은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시작되는 법이거늘.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자식을 낳는 일은 단순히 사랑 그 자체가 아니다. 다른 성에게 끌리는 것은 상대방 유전자에 대한 끌림이다. 자연의 섭리 상 인간은 자신의 반대 형질과 반대 성격의 파트너를 갈구하도록 만들어졌다. 유전학적으로 서로 상이한 유전자를 갖고 있을수록 더 끌리게 되어 있고, 그 파트너의 유전자로 아이를 낳고 싶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전자 간의 차이가 클수록 더 좋은 유전자의 자손을 볼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모든 인간은 HLA(조직적합성항원)라는 유전자(염색체 6번에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 유전자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나의 단백질과 다른 단백질을 구별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따라서 이 유전자가 서로 맞지 않으면 골수이식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HLA가 성적으로 서로를 끌리게 하는 유전자이기도 하다. 면역체계에서 적인지 동지인지 피아를 구분하는 기능이 내게 맞는 파트너를 선택하는 기능까지 하는 것이다. 즉 HLA의 이런 기능으로 보면,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일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유전학적으로 인간이 자식을 낳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결혼생활에서는 바로 이 ‘다름’으로 인해 부부가 싸우다가 마음까지 상한다. 그토록 열렬하게 청혼을 했던 상대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은 좌절 이상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다름’으로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부부보다 더 나은 유전자(자식)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배우자가 더 소중해진다. 이런 것들을 느낄 때 즈음이면 사랑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가 된다.
“생명은 언제나 방법을 찾아낸다”는 진화론의 명언처럼 인간은 생존본능과 종족보존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치열하게 살았고 자식을 낳아서 대(代)를 이어왔다. 열성인자를 퇴화시켜 진화하면서 오늘에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다.
딩크(DINK)족이 늘고 있다. 자식 한 명 키우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무자식을 고집하는 부부도 많아지고 있다. 자칫 내 인생은 없고 자식만의 인생이 될까 두려워질 수 있겠다. 백번 이해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귀띔하건대, 어느 인생인들 등골 빠지게 일하지 않는 인생이 있으랴. 세상에 공짜는 눈 씻고 봐도 없다. 그래도 옆구리가 시린 것보다는 등골 빠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이유는 하나보단 둘이 낫고, 둘 보다는 셋, 넷이 더 강하고 세기 때문이다. 가족과 핏줄은 미우나 고우나 내 편일 터이니.
이성구
● 1961년 대구 출생
● 서울대 의대 졸업
●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 대구마리아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