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호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대간은 나의 눈과 귀다

대간 손순효의 간언

  • 하승현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입력2017-12-1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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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부록]

    [일러스트·이부록]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책임진 임금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간언하는 사람과 그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임금이 있어서였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사람의 잘못을 거침없이 비판한 사람들과 그들의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임금이 걱정한 것은 오직 하나다. 잘못을 잘못이라 지적하는 자가 없어서 나라가 망할까 하는 것이다.

    대간(臺諫)은 나의 눈과 귀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 이들이 누차 글을 올려, 현재의 폐단을 빠짐없이 아뢰어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이들은 남의 눈치나 보며 제 한 몸 보전하려 드는 무리가 아니기에 내가 무척 높이 평가한다. 집의(執義) 손순효(孫舜孝) 등에게 상으로 특별히 자급을 한 단계 높여주도록 하라. <성종실록 2년 6월 18일>

    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당시의 폐단을 간언해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러한 손순효를 두고 아첨한다고 평하는 사관도 있었지만,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는 그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쇠와 돌을 뚫을 정도였다고 하면서, 경기감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채소나 과일 하나라도 입에 맞는 것이 있으면 바로 가져다가 임금에게 바쳤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또 손순효는 진심으로 임금을 사모하고 충성을 다했기에 왕에게 신임을 얻어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고 언급한 사론도 있다.

    손순효는 기질이 소탈하였으며, 충신·효자로 자부하였고 큰소리치기를 좋아하였다. 친구와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크게 취하면 갑자기 상대별곡(霜臺別曲)의 ‘임금은 현명하고 신하는 강직하네’라는 가사를 노래하였다. 잔치 때도 기생들에게 이 가사를 노래하게 하였고 본인은 일어나서 노래에 맞춰 절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잠시 고향에 돌아온 환관을 만나자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서 그의 부채에 써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환관이 궁궐로 돌아온 뒤 주상이 우연히 그 부채를 보고서 손순효가 지은 시라는 것을 알고는 그가 주상을 사모한다고 여겼다. 또 예전에 주상의 앞에서 경전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실함과 관대함을 실천할 것을 주상에게 권하였는데, 이 때문에 매우 후한 대우를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종실록 18년 2월 7일>



    성종 21년(1490) 11월, 손순효를 신뢰한 성종은 모화관(慕華館·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연천동에 있었다)에서 무과(武科)를 치렀을 때에도 그의 직언을 받아들였다. 이날 김근명(金近明) 등 22명을 뽑았으나, 격구(擊毬·젊은 무관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다니며 채로 공을 치던 무예)에서는 한 사람도 뽑을 만한 자가 없었다.


    1 오산설림.[규장각한국연구원]
2 창덕궁의 정전(正殿) 인정전 어탑.[개인소장]

    1 오산설림.[규장각한국연구원] 2 창덕궁의 정전(正殿) 인정전 어탑.[개인소장]

    손순효 - 문과에서는 어떠한 인재가 뽑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이 보기에 오늘 뽑힌 무사(武士) 중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인재 양성을 게을리하여 이렇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종 -그대 말대로 내가 게을러서 인재 양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종실록 21년 11월 8일>


    손순효와 성종이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과감하게 직언을 하기도, 과오를 순순히 인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그해 8월 22일, 성종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의정부·육조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이때 손순효가 술에 취해 나와 어탑(御榻) 아래에 엎드렸다. 성종이 내관을 시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손순효는 “신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말씀을 아뢰려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주상이 말하라고 하자, 손순효가 어탑에 올라 한참 동안이나 얼굴을 들고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아뢰었고, 성종은 몸을 굽혀 대답했으나,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신하들은 알 수 없었다. 

    이때 손순효는 무슨 이야기를 아뢰었을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그가 간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세자로 있는 연산군이 무도한 짓을 많이 하였으나, 신하들은 모두 어린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순효 공이 어느 날 취기를 빌려 그대로 용상(龍床)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손으로 용상을 쓰다듬으며,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상이 “나 또한 알고 있지만, 차마 세자를 폐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간관(諫官·조선 시대에 사간원과 사헌부에 속하여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백관(百官)의 비행을 규탄하던 벼슬아치) 이 “신하가 용상에 오른 것만도 몹시 불경한 짓인데, 또 감히 주상의 귀에 대고 말을 하였으니, 이것은 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손순효를 옥에 가두어 법률대로 처벌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상은 “손순효는 나를 사모하여 술을 끊으라고 권한 것인데, 이게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였다. <오산설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인정전 진연에서 아뢴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손순효가 세자를 폐할 것을 청한 엄중한 사안인데도, 성종이 이를 눈감아준 것이다. 

    신하가 자신이나 왕실을 폄하하는 말을 하는데 임금이 노여워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임금은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 행여 간쟁하는 신하가 없을까 근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왕업의 성패가 신하들의 간언에 달려 있어 직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고 명예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임금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직언이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는 신하가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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