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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경제로 풀어쓴 현대사

협상 대신 전쟁! 난징조약은 근대판 FTA?

산업혁명과 아편전쟁

  • 조인직 | 대우증권 동경지점장 injik.cho@dwsec.com

협상 대신 전쟁! 난징조약은 근대판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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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대신 전쟁! 난징조약은 근대판 FTA?
동인도회사, 그리고 애플

그 후 17세기에 접어들며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라는, 국가의 특권을 보유한 공기업 성격의 무역전담 주식회사가 영국(1600년), 네덜란드(1602년) 등 해양 강국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향신료의 주산지가 인도를 비롯해 인도 동쪽의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 및 말레이반도 등을 포괄)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미 FTA가 경제 외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 혹은 북한이 아무리 중국에 가서 ‘투자 좀 해달라’고 해도 민간투자자들이 거절하는 것도 다 ‘안전보장’과 연결돼 있다. 곧 ‘돈을 떼먹히지 않는 질서’가 필요한데,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당시 강력한 해군력으로 오늘의 미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라이벌 관계였으나,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네덜란드 윌리엄 3세가 영국 국왕을 겸임하면서 양국 간 타협과 질서가 유지됐다.

돈을 벌려면 예나 지금이나 경쟁력이 강한 상품을 거래해야 지속 생존이 가능하다. 당시 영국 위정자들은 ‘도자기는 어차피 기술적으로 베끼기 어렵다. 누에와 차나무는 중국밖에 없다. 동인도제도의 향신료는 어느 정도 포기하자. 그렇다면 남는 건 면직물이다. 이걸로 인도를 공략하자’고 판단했다.

절묘한 시기에 영국에서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1733년 존 케인이 이른바 ‘나는 북(Flying Shuttle)’이라고 불리는 방직기(紡織機)를 발명해 자동적으로 실과 실을 이었고, 이후 면사와 면사를 연결해 면포를 만드는 방적기(紡績機), 대량의 면포를 빠르게 공급하는 기직기(機織機)가 탄생했다. 1785년에는 수작업을 완전히 기계화한 역직기(力織機)가 등장해 본격적인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다.



수공업으로만 면직물을 공급하던 인도는 더 이상 영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늘날 유니클로처럼 ‘빠른 소매업(Fast Retailing)’을 앞세운 의류업체들이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듯이, 속도감과 대량생산을 통한 수요의 충족이란 돈을 버는 데 있어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국은 원재료를 더 많이 공급받기 위해 인도에 면화만 증산할 것을 요구했고, 영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인도로 역수출했다. ‘아이폰 6’의 카메라액정 같은 주요 부품을 LG전자나 대만 전자업체들이 납품하지만, 역시 최종 재화의 판매자인 애플과는 수익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이치와 비슷하다.

영국은 면직물 무역을 통해 인도를 완전히 자신의 ‘하청 기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 청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차와 도자기 거래에선 무역역조에 시달렸다.

당시는 지금처럼 ‘변동 환율제’ 같은 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하염없이 중국으로 대량의 은(銀, 무역의 대가로 지불)이 유출될 수밖에 없었다.

협상 대신 전쟁! 난징조약은 근대판 FTA?

영국과의 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58년 불평등한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아편전쟁과 중국의 몰락

산업혁명 덕분에 영국은 지금의 중국처럼 ‘세계의 공장’으로 변했고, 제철 공장과 면직물 공장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은 갈수록 늘어났다. 이들을 달래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중국 ‘홍차’와 미국 ‘사탕’이었다. 두 상품의 수입량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반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자국에 유리한 산업만을 장려했다. 쌀이나 보리처럼 주식이 아니라, 가공해서 팔면 더 큰돈이 되는 이른바 ‘환금작물’의 집중 재배를 강요했다. 이 중 영국이 가장 주목한 게 아편이다.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제3자 중계무역방식’을 통해 은밀히 중국에 팔았다. 사실상 밀수출이었다.

아편중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중국엔 비상이 걸렸다. 1796년, 중국 정부는 부랴부랴 ‘아편 수입 금지령’을 내렸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중국 관료사회가 온갖 뇌물과 향응에 빠져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뒤였다. 결국 1827년을 기점으로,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역전에 성공했다. 아편의 중국 유입량이 늘수록, 그만큼 중국의 은(銀)은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은을 통해 납세를 받던 중국의 재정은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 부족 현상은 디플레이션을 수반했고, 이후 상인들이 필수소비재 가격을 올리면서 시작된 악성 인플레이션은 서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영국은 중국에서 거둬들인 은을 대중국 무역의 중계 지점에 기반시설을 갖추는 데 썼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싱가포르다. 영국은 1826년부터 말레이반도 남부의 말라카, 페낭과 함께 싱가포르까지 식민지화했다. 당시 프랑스와 치열한 영토확장 경쟁을 벌이던 영국은 이 지역에서 우위를 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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