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만 명의 피란민이 쏟아져 들어온 1952년 대구. 냉면을 먹고 나오다 피란민 행렬과 맞닥뜨린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강사랑이 하루 만에 노래를 완성했다.
- 대구에서 만들어졌지만, 이 노래의 주 무대는 영도다리와 국제시장이 있는 부산이다.
- 1·4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여동생 ‘금순이’를 잃은 오빠의 마음이 노랫말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인 나의 젊은 날, 이 노래는 만인의 애창곡이었다. 중국집 2층 다락방에서 짬뽕 국물에다 여러 개의 숟가락을 꽂아놓고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다 감정이 복받칠 때쯤 터져 나오는 노래가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이 노래를 시작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아마 이 글을 읽는 순간, 눈앞에 그런 풍경이 그려질 것이 틀림없겠다.
이 노래들은 지금의 기성세대 격인 386세대와는 거의 관련 없을 것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또는 훨씬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순전히 아버지 세대의 노래이기 때문. 그러나 노래는 굴곡 많은 한국인의 삶과 맞물리면서 세대를 뛰어넘는 만인의 노래쯤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노래 속에 등장하는 ‘금순이’는 우리 시대의 ‘똑순이’로 그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영화 ‘국제시장’과 금순이
고백하건대, ‘굳세어라 금순아’를 ‘신동아’ 지면에 오르게 한 것은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다. 영화를 둘러싼 저열하고도 천박한 정치적인 논쟁과는 무관하게 화제의 영화를 잉태케 한 노래를 되새겨보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작용했다. 아버지 시대에 바치는 찬가쯤으로 형용되는 영화 ‘국제시장’은 곤고한 삶을 살아온 이 땅의 모든 아버지 세대에게 바치는 헌사가 아닐까. 나는 고민 끝에 지난해 12월 말 사진가인 권태균 선생과 ‘굳세어라 금순아’ 의 풍경을 거슬러 찾았다.
노래의 시대적 배경은 과거에는 ‘6·25동란’ 또는 ‘6·25사변’으로 불리던 6·25전쟁이다. 전쟁 발발 불과 한 달 반, 대구·부산만 남고 전 국토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1950년 8월 18일 새벽, 인민군 13사단이 마지노선 격이던 대구역을 마침내 맹포격했다. 백척간두,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이승만 대통령은 기차와 배를 번갈아 타고 전쟁 발발 이틀 만인 6월 27일 새벽 서울역을 빠져 나와 7월 2일 부산항에 도착한다. 정부도 7월 17일 임시수도 격인 부산으로 간다.
이 흐름을 아는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과 대치 중인 대구의 당시 인구는 27만, 하지만 40만 명의 피란민이 몰렸다. 대구의 청계천 격인 신천 개천가, 동인동, 신천동, 비산동 등지는 피란민들이 급조한 누더기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거리에는 갓 징집된 군인이 넘쳐났다. 당시 징집은 ‘복불복’이었다. 운 없어 잡히면 전장으로 끌려갔다. 현역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니면서 신체 건장한 남성을 보는 족족 체포(?)해 부모와 한 번 만나게 해준 뒤 남산초등학교로 데려갔다. 기본 교육은 7일, 전황이 다급하게 돌아가면 2~3일 소총교육만 받고, 그것도 안 되면 사격교육 받으러 가다가 전장으로 끌려갔다. 보통 하루 수백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이 끌려갔다. 낙동강 전투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8월 초~하순, 대구에서만 무려 5만여 명의 신병이 배출됐고 그들 대부분은 ‘화랑담배 연기 속에’ 혹은 ‘떨어지는 꽃잎처럼’ 사라져갔다. 6·25로 인해 대구는 졸지에 ‘군사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대구의 초·중·고·대학교와 주요 시설물은 군사시설로 징발됐다.
전쟁은 유엔군의 개입으로 점차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선과는 달리 1952년의 대구는 후방 도시였다. 미군 때문에 양공주도 양산된다. 전쟁 속에서도 낭만은 피어났다. 대구 도심 향촌동 골목에는 당시로는 놀라운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두 곳 있었다. 바로 ‘녹향’과 ‘르네상스’. 이 중 녹향은 아직도 건재해 그 시절의 전설을 전해준다. 전시의 대구는 음반 산업의 메카였다. 전국 유일의 ‘오리엔트 레코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25전쟁을 극명하게 표현한 ‘굳세어라 금순아’도 이 시기에 탄생한다. 사실 많은 이가 부산에서 태어난 줄로 아는 이 노래는 대구시 중구 교동시장 강산면옥 앞길에서 탄생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부산 노래
대구 ‘매일신문’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1952년 여름 대구시 중구 화전동, 지금은 없어진 옛 자유극장 바로 옆 남선악기점 2층 오리엔트 다방(작곡가 박시춘 부인이 경영). 가수 현인이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겸 작곡가인 대구 출신의 이병주에게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옆에 있던 밀양 출신의 박시춘과 여수 출신의 작사가 강사랑도 따라나선다. 넷이 교동시장 안 군용 천막으로 지어진 강산면옥에 갔다. 냉면을 먹고 나와 박시춘과 강사랑은 강산면옥 앞거리를 걸어가면서 지나가던 피란민 행렬을 보고 곡과 노랫말을 완성했다. 그날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끝낸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실향민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비록 전쟁 중 대구에서 만들어졌지만 아무래도 주 무대는 부산이고 영도다리이고 국제시장이다. 알려진 대로 1951년 1·4후퇴 당시 흥남부두에서 ‘금순이’를 잃고 부산으로 피란 와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로 표현되던 화자가 누이동생 ‘금순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다. 전쟁이 낳은 노래는 실향민과 이산가족의 상실감을 어루만지며 분단의 비극을 안고 사는 대다수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동명의 영화가, TV 드라마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금순이는 온 국민의 누이쯤으로 인정됐다.
노래에 등장하는 국제시장은 깡통시장, 양키시장, 도떼기시장 등으로 불리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일대는 당면국수, 씨앗호떡, 단팥죽, 빙수 같은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하다.
3000원을 내니 할머니가 콩고물을 얹은 단팥죽을 꽃무늬 사기그릇에 담아준다. 겨울에는 단팥죽, 여름에는 빙수가 유명하다. 이곳 빙수는 손으로 얼음덩어리를 갈아서 갖가지 색물과 삶은 팥을 얹어 주는 전통방식을 고집한다. 테이블 하나에 모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먹는 독특한 방식이다. 고독해서가 아니다. 곤고하던 시대, 앉을 공간이 한 뼘도 어렵던 시절의 흔적쯤 된다. 좌판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뜨거운 팥죽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니 마음까지 훈훈해진다.
노래의 무대에는 부산역 건너편 40계단도 포함된다. 피란민들이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몰리던 장소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원로 가수 박재홍의 노래 ‘경상도 아가씨’의 무대이기도 한다. “고향 길이 트일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수 하더라도 살아 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 젖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의 노랫말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사촌쯤 된다.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한겨울에 찾은 40계단은 을씨년스럽다. 뻥튀기 기구 등 피란시절 삶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거리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칼날 바람에 얼어붙었다. 원래 부산은 이곳까지이고, 지금의 부산역과 항구는 인공 매립지라고 전한다. 사실 대부분의 부산 거리는 전쟁의 비극적인 상처와 교직한다. 그래서 ‘고향에 가더라도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달라’는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도 증거가 된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는 12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들’은 이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 영감처럼 늙고 야위어 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아, 그리고 또 있다. 감천동 비석마을이 또 다른 무대가 된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으로 대변되는 번잡성, 일제강점기 영향을 받은 왜색풍 등의 이미지에 서민풍을 더하는 곳이 감천동 비석마을이다. 전쟁 당시 몰려든 피란민들이 살 곳을 찾다가 결국은 감천동 산꼭대기 공동묘지에 주목하게 된다. 묘지에 가득한 비석을 기둥으로 삼아 천막을 치고 움막을 짓고 산 게 감천동 비석마을의 시작이다.
부산의 중심, 광복동, 남포동 뒷산을 가파르게 넘어 가면 제법 커다란 야산이 보이고, 그 비탈진 사면에 알록달록하게 조그만 집들이 성냥갑처럼 달린 모습을 보게 된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해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길 막바지에 상석을 주춧돌로 삼은 마을이 어렵사리 버티고 있는 것이다. 겨울밤 감천 비석마을은 싸늘한 바람에 적요하다. 누군가는 말했다. 마을은 이탈리아 산토리니의 절벽마을 소렌토 풍광과 닮았다고. 그러나 그것은 호사가들의 언설일 뿐, 겨울 밤 잠든 달동네의 인생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아니, 남루하기까지 하다.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영도다리는 노래의 중요한 테제가 된다. 갈 곳 없는 실향민은 다리 밑에 움막을 짓고 몰려 살았다.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인 영도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 23일 준공됐다. 부산시 중심에서 영도의 북서단을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다리가 들려 올려지는 유일한 도개교다. 1935년 다리 위에 전차궤도가 설치돼 전차가 다녔으며 하루 6회씩 다리의 한쪽을 들어 선박이 지나가게 하는 광경을 연출하며 부산의 명물이 됐다. 다리 난간은 불현듯 할머니 손을 잡고 영도다리를 구경하러 온 다섯 살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한국 현대사의 슬픔
나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명물다리는 인구 증가로 인해 1966년 9월 도개를 중단했다. 전차궤도도 철거됐다. 그러나 운 좋게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건축물로 평가되면서 2007년 대규모 복원 공사 끝에 2013년 7월 도개 기능도 다시 살아났다. 다리 입구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연신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셔터 누르기에 열심이다. 황동색으로 칠해진 가수 현인의 동상이다. ‘굳세어라 금순아’ 등 현인의 노래가 연이어 흘러나온다.
영도는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 1919~2002)의 고향이기도 하다. 동상 현판에는 그에 관한 이력이 빼꼭하다. 현인은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신여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1938년 경성 제2고보(경복고)를 졸업한 후, 1942년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도쿄예술대) 성악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모든 것을 갖춘 인재였다.
처음엔 순수음악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대중가요 부르기를 망설였으나 가요계의 대부 격인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녹음한 것을 계기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전우야 잘 자라’ ‘서울야곡’ ‘인도의 향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다. 하지만 대표곡을 꼽자면 역시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절 실향민의 향수와 힘든 삶을 이어가는 서민의 아픔을 달래주었던 ‘굳세어라 금순아’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 울음 뒤에 있는, 귀에 익은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를 더 주목하고자 한다. 노래에는 한국 현대사의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영도다리, 국제시장 등 노래의 무대를 찾으면서 나는 아버지 세대의 슬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모진 세파 모진 설움 받고 산 이 땅의 아버지들, 그래서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라고 일찍이 어느 시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감천 비석마을의 겨울밤 풍경, 1·4후퇴 때 몰려온 피란민들이 산꼭대기 공동묘지 비석에 거적을 두르고 살기 시작한 것이 천막촌의 유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