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에서 ‘고용’으로 정책 지향점 바꿔야
- 해법은 내수시장·중소기업 육성
- 朴정부, 열심히 하는 건 맞지만 방향 틀렸다
- 정부의 종북주의자 처벌은 불가피
구순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언어가 그랬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질문에 짧고 간결한 말이 답으로 돌아왔다. 인터뷰가 끝났을 무렵 기자의 머릿속엔 단어 몇 개가 각인됐다. ‘고용’ ‘내수’ ‘중소기업’…. 하루에도 몇 번씩 쓰고 들은 단어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순(87) 전 경제부총리는 매일 5개의 신문을 본다. 국내 신문 3개와 외지 2개다. 신문을 통해 그는 세계와 소통한다. 그가 보는 외지는 영국에서 발행되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人民日報)’다. FT는 오래전부터, 런민일보는 3년 전부터 구독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누굴 만나는지,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꼼꼼히 챙긴다. 나이와 관계없이, 그는 여전히 눈 밝은 실물 경제학자다.
케인스, 루스벨트 없는 세계
그의 약력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20년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직했고 노태우 정부 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를 맡았다. 1995년에는 서울시장, 1997~98년엔 야당(민주당)과 여당(한나라당) 총재를 번갈아 맡았다. 고향인 강원도 강릉에서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정계를 떠난 뒤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간단하게 정리한 게 이 정도다.
조순 전 부총리를 최근 서울 관악구 자택에서 만났다. 35년 전 조 교수가 직접 지은 집이다. 집을 지을 당시 이곳엔 수도가 없었다. 마당 한가운데 우물을 파고 거기에서 나온 물로 집 짓고 밥 지어 먹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조 교수 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거실 겸 서재로 쓰는 공간엔 탁자에도 바닥에도 책과 신문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경제학자의 책상이라기보다는 기자나 소설가의 그것에 가깝다. 햇빛이 좋은 창가에 1974년 초판이 나온 한국 최초의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 원론’ 10권이 적당히 빛바랜 채 꽂혀 있다. 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등과 공저한, 맨 오른쪽에 꽂힌 개정판은 2013년에 나왔다. 지난해 11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경제학원론’ 출간 40년을 맞아 조촐한 행사를 열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서재 곳곳에 펼쳐진 신문엔 형광펜으로 그은 줄들이 선명하다. 몇몇 기사 제목에는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책상 옆에 밀쳐둔 1월 5일자 FT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The west has lost intellectual self-confidence’라는 제목을 달았다. ‘서방 국가들은 지적 자신감을 상실했다’쯤 되겠다. 조 전 부총리가 입을 뗐다.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쓴 글입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이 세계경제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할 지적 자신감을 잃었다. 이것이 현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다’라는 내용이에요.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세계경제의 가장 큰 위기는 금융위기나 외환위기가 아닙니다. 케인스, 루스벨트 같은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는 게 더 큰 위기죠(웃음).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외국발 위기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국내산 위기는 해결할 수 있죠. 그런데 그걸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조 전 부총리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위기의 한국경제, 해법을 찾다’라는 주제 아래 10개 남짓한 질문을 담았다. 그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노학자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터뷰 준비는 기자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는 예의상 보낸 질의서에 예비 답변을 빼곡히 적어놓고 기자를 기다렸다. 쓰고 또 고쳐 쓴 흔적이 역력했다.
실패한 자본주의
▼ 건강은 어떠신가요.
“작년 초에 ‘용궁’에 갔다 왔어요(웃음). 몸 여기저기가 아파 2주 동안 입원했는데, 정말 죽다 살았습니다. 밤에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어요. 요즘은 아주 좋습니다. 다시 연구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 조만간 논문을 발표하신다는 소식도 있던데요.
“네, 학술원에 낼 논문입니다. 거의 끝나갑니다. 제목은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한 경제운용 원리’입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자본주의가 어떻게 하면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영국에서 시작돼 미국에서 꽃을 피운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이제 실패했어요. 세계화한 자본주의는 금융위기를 가져왔습니다. 금융을 자유화해선 안 된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새로운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가 됐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조 전 부총리의 ‘경제학사 강의’를 요약해 싣는다. 그가 앞의 논문을 소개하며 설명한 ‘현대 자본주의의 뿌리’다. 그가 ‘실패했다’고 단정한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자본주의는 영국의 농업혁명에서 시작됩니다. 사상적 배경은 개인주의, 자유주의였죠. 당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였어요. 평등이란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을 때였으니까. 자유주의의 시작은 영국의 가정생활입니다. 되도록 빨리 (부모로부터) 독립해라,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라…이런 것들이 자유주의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자본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됩니다. 모험심, 용감성 그런 것이 중요했죠.
그런데 영국에서 시작된 자유주의는 19세기 인클로저 운동을 거치면서 점차 발전해 제국주의로 이어집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한다며 만들어진 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낳았다는 게.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라’ ‘그 나라의 주인이 제대로 일을 못하면 네가 가서 대신 지배하라. 그것은 신의 뜻이다’…이런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영국 사람 들이 미국을 식민 지배한 논리가 그런 거였어요.
하지만 잘 발달하던 자본주의가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서서히 쇠락합니다. 식민지를 잃은 영국의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죠. 그때 나온 사람이 마거릿 대처입니다. 강력한 자유시장주의자가 등장한 겁니다. 정치적으로는 극우세력이 득세합니다. 미국에서도 레이건이 같은 정책으로 집권합니다. 그러나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잘못’ 덮어줄 ‘성과’ 없다”
▼ 그렇다면 앞으로의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쌍두마차가 필요합니다. 정부(政府)라는 말 한 마리와 자유시장이라는 말 한 마리, 국가는 이 두 마리가 같이 끌고 가는 마차가 돼야 합니다. 대처나 레이건은 ‘정부는 없어도 된다’는 식이었어요. ‘자유시장만 잘 작동하면 경제도 국가도 발전한다’고 믿었죠. 이제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자유방임경제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시장에는 자유가 주어지지만, 질서 속의 자유, 질서를 지키는 자유라야 합니다. 공익을 책임질 말도 필요하죠. 두 마리의 말이 각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가 됩니다. 한마디로 민간은 자유주의 정책을, 정부는 철저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강조한 1930년대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비슷하지만 뿌리는 다릅니다. 민간 부문에 대해선 최대한 자유경제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르죠. 물론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요.”
▼ 한국 경제, 특히 정부의 경제정책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에 모든 것을 집중했습니다. 역대 정권이 다 그랬습니다. 경제성장률 몇%, 수출 흑자 얼마…이런 것에 집착했어요. 그런 정책이 가져올 부작용은 생각하지 않았죠. 잘했든 못했든 머릿속엔 다들 경제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게 큰 문제가 안 된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세계경제가 정상적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죠. 이런저런 잘못이 드러나도 경제성장의 성과가 다 덮어주고 가는 식이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안 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예전 같은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현실이거든요. 잘못을 자연스럽게 덮어줄 만한 경제적 성과가 없다보니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가 요즘 들어 더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야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 지금 정부도 마찬가지인가요?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도 똑같습니다. 역시 수출과 성장 중심의 경제관을 유지하고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잊고, 수출 늘리고 경제성장 하는 데만 관심이 있죠. 정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폐기돼야 할 과거 패러다임을 그대로 좇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향이 틀렸어요. 정책의 지향점을 바꿔야 합니다.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판을 바꿔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고 욕을 먹더라도 바꿔야 해요.”
“난초 기르는 마음으로”
▼ 어떤 지향점이 필요합니까.
“성장보다는 고용을 중요시하는 정책이 긴요합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내수산업을 육성해야 하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는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하고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아~그렇군요, 늘 듣던 말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여요.”
▼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생각해보세요. 고용을 늘리고 중소기업을 살리는 것. 누구나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정책입니다. 생색 내기 위해, 적당히 성적표를 받기 위해 끼워 넣는 정도였죠. 그걸 제대로 한 대통령이 없었어요. 중소기업 살린다고 말만 했지, 결국은 재벌 중심 경제구조를 유지해왔잖아요.”
▼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특별한 방법이란 건 없어요. 그리고 대단한 정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꾸준히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난초를 기르는 마음으로 중소기업과 내수시장을 키워야 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기술과 의지가 있는 중소기업이 돈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정부와 금융기관이 리스크를 나눠 가지면 됩니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기술과 의욕을 갖고 있어도 담보가 없으면 돈을 안 빌려주잖아요. 기다려주지도 않죠.”
▼ 과거와 같은 식의 경제 목표를 가지고도 고용을 늘리고 내수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과거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은 한마디로 재벌을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재벌을 키워 고용을 늘리는 식이었죠. 그러나 이제는 재벌을 통한 고용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재벌 대부분은 기술집약적인 수준으로 진입했어요. 이제는 중소기업 육성, 내수산업 발전을 통해서만 고용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용이 늘어야 소득의 양극화도 막을 수 있고요. 고용이 안 되면서 소득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국가는 앞으로 더 지탱할 수 없습니다.”
▼ 고용의 확대도 중요하지만 고용의 형태도 중요할 겁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비정규직을 늘려놓고 고용이 늘었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죠. 정규직화한 고용이 늘어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체 근로자의 평균 급여를 낮추더라도 정규직을 늘리는 정책을 펴야 합니다.”
창조와 파괴가 없는 경제
▼ 그 말씀은 성장과 복지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를 실어야 하느냐는 고민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르죠. 성장과 복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장도 포기할 수 없어요. 다만 예전과 같은 고성장이 아니라 저성장이죠. 복지도 필요합니다. 특히 고령화 시대를 잘 대비해야죠. 앞으로 근로 임금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겁니다. 복지를 할 수 있는 재원도 점점 줄어들겠죠.
따라서 정부는 하루빨리 중장기 재정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앞으로 5~10년간 재정은 대체로 이 정도다’라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그것에 맞는 계획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획을 준수해야 해요. 그래야 불필요한 지출과 낭비가 줄어듭니다. 그렇게 마련된 재원을 복지에 쓰면 됩니다.
이게 바로 영국의 대처가 실시한 경제정책입니다. 지향점은 달라도 계획하고 실천하는 방법론은 배워야 해요. 잘 알려진 대로 대처는 1979년 총리가 되기 몇 년 전부터 ‘그림자 내각’을 준비하고 경제계획을 세웠습니다. 총리가 되면 뭘 어떻게 한다는 계획이 취임 전에 이미 다 세워져 있었어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떠오릅니다.
“방식은 비슷한데 목표가 다르죠. 그때는 성장과 수출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달렸어요. 제가 말하는 건 그런 계획이 아닙니다. 재정의 테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결정하고, 정부 수입과 복지 수요, 지출에 대한 계획을 미리 세우자는 겁니다.”
조 전 부총리는 이 대목에서 국가통계의 문제를 언급했다. 경제계획을 올바로 세우려면 확실한 통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 정부 부채, 공기업 부채, 지방정부 부채가 투명하게 관리되고 공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확한 통계의 필요성에 대한 얘기를 기사에 꼭 넣어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도 짚고 넘어갈까요.
“우리나라 30대 기업 명단을 한번 보세요. 지난 수십 년간 거의 바뀐 게 없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가진 기업이 들어오고, 나갈 기업은 나가는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창조와 파괴가 없는 경제구조입니다. 기업이 하나의 왕조처럼 세습을 해서 내려갑니다. 문제는 지위는 세습이 가능할지 몰라도 능력은 세습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만한 경영, 잘못된 관행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같은 일도 다 그런 데서 비롯됐습니다. 재벌이 자진해서 그만둬야 합니다.
혁신과 파괴가 없는 자본주의는 정말 위험해요. 이대로 가면 결국은 스태그네이션(장기적 경기침체)으로 가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스태그디플레이션’(장기적 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이죠. 2013년 3월엔가 매킨지에서 이런 보고가 나온 적이 있어요. ‘한국의 진짜 위험은 북한 핵이 아니라 성장동력의 상실’이라고. ‘한국 기업들은 뜨거워지는 물에서 놀고 있는 개구리와 같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 너무 비관적인 얘기만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경제의 활로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거듭 강조하지만, 내수산업과 중소기업 육성입니다. 일본은 그나마 내수산업이 강한 덕분에 20년 넘는 장기 침체를 버틸 수 있었어요. 독일도 그렇고요. 솔직히 당장 우리 경제를 일으킬 해법이 제 머릿속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해요.”
질서·원칙 안 가르치는 교육
▼ 경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견해도 들었으면 합니다. 지난해 우리 사회는 세월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국가 운영 시스템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사회는 무엇보다 교육이 잘못돼 있습니다. 오로지 경제, 수출과 성장만 얘기했죠. 교육을 ‘제2의 경제’라고 일컬었을 정도죠. 정부도 사회도 교육을 잘하려고 애를 쓴 적이 없어요. 그런 것이 결국 세월호 사건 같은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 교육과 세월호 사건, 언뜻 잘 연결이 안 되는데요.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려는 사람이 드물어요. 우리 사회에 그런 전통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선장은 선장대로, 배를 운영하는 회사는 회사대로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 되는데 말이죠. 질서도 원칙도 없이 오로지 돈만 좇는 사회, 그런 문화만 남았어요.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원칙을 가르치는 교육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세월호 사건을 보세요. 해도(海道)가 있건 없건 오로지 빨리 가는 것만 생각하는 정신문화가 결국 그런 참사를 낳았잖아요. 나라의 기풍이 잘못된 겁니다.”
그의 교육 비판은 구체적이었다. 한자(漢字)를 쓰지 않는 어문정책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자교육을 통해 정확한 뜻을 가르치지 않고 한글로 발음만 가르치는 것은 문제다. 어영부영 공부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것. 교육구조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대학을 너무 많이 만들었고,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를 만드는 노력은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든 돈만 있으면 학교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시한 대학들이 4년제 대학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졌어요. 사회에도 기업에도 도움이 안 되는 껍데기뿐인 ‘고급인력’만 양산됐죠. 우리 교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도 당장 철폐해야 합니다. 대학이 알아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하면 됩니다. 수능과 평준화가 나라를 망치고 있어요. 사람의 능력은 제각기 다른데, 모두 같은 수준에서 가르치고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민정책입니다. 사람마다 소질이 다르기에 교육도 달라야 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A학교를 갈 수 있는 학생이 수능 문제 하나 틀리는 바람에 F학교를 가야 되는 상황이 과연 정상인가요.”
질서와 자애가 부딪치면…
▼ 세월호 사건을 두고, 정부와 정치권의 부적절하고 잘못된 대처가 문제였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교육 다음으로 잘못된 것이 정치라고 생각해요. 국가관리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봅니다. 이런 정치를 가지고는 나라를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좋은 정치가 되려면 일단 국회에 좋은 사람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들은 국회에 안 들어가려고 해요. 설사 들어간다고 해도 패거리에 속해야 뭔가를 할 수 있는 정치문화입니다. 패거리의 지시를 따라야 공천도 받고 정치도 할 수 있죠.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 2015년, 우리나라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15세기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는 자애, 사랑, 관용과 함께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둘 다 가질 수 없는 경우엔 질서를 먼저 택해야 한다’고 했어요. 고전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자애와 정의(법질서) 중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제일 중요한 것이 신(信),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질서’나 공자가 말한 ‘신(信)’은 서로 맥을 같이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를 보세요. 가령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면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잘 믿으려 하질 않아요. 국가지도자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을 안 지키고 자꾸 딴소리를 하니까, 나중에는 아예 듣지를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국민이 잘못한 건 아니죠. 국가에 질서와 믿음이 없어서 생긴 일입니다. 권위를 내세우고 권리만 주장해서는 국민에게 믿음을 줄 수가 없어요.”
▼ 우리 사회가 심각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학자, 정치인, 관료를 모두 경험한 처지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데올로기에서 빨리 해방돼야 합니다. 사실 세계 역사를 보면 제대로 된 혁신은 늘 보수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믿고 따라줍니다. 우리 사회에선 그게 안 되고 있어요.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화도 안 합니다. 줄을 서지 않으면 불안해하죠. ‘너는 누구 편이냐?’만 묻습니다. 내 생각대로 뭔가를 주장하고 추진하는 사람이 없어요. 사회통합에 책임이 있는 학자들이더 합니다. 이 모든 게 자신감의 부족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적 독립(Intellectual independence)이 안돼 있어서 그래요.”
▼ 최근에는 종북(從北) 논란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북한이 인간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곳에 왜 호감을 갖는지 이해를 못해요. 3대가 내려오면서 국민을…아휴, 저런 역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왕조국가도 저렇게는 안 했습니다. 왕조국가였다면 벌써 망했겠죠. 정부가 나서서 종북주의자들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을 두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저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안 하면 시스템 유지가 안 됩니다. 질서가 안 잡힙니다. 질서와 자애가 부딪치면 질서를 택하는 것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