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區) 재정 안 좋은데 의정비만 올려서야”
- 부당이득반환소송 패소…소송비용 최고서 날아와
- 공익소송 제도적 보완 필요
‘사건 2014아○○○○ 소송비용액확정. 신청인 서울특별시 ○○구청장, 피신청인 김○○ 외 ○명(주민). 위 당사자 사이의 서울행정법원 2008구합○○○○○, 서울고등법원 2009누○○○○○, 대법원 2011두○○○○○ 사건에 따른 소송비용액확정결정 신청에 관하여 신청인이 제출한 비용계산서를 송부하오니 이 최고서를 받은 날부터 10일 이내에 이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최고서’를 받은 주민 정미라 씨는 “벌써 수년 전 일이라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데 대법원의 패소 판결에 이어 소송비용을 물어내라는 최고서를 받으니 당혹스럽다. 소송비용을 둘러싸고 또 재판에 불려 다니게 될까 암담하다. 무력감이 크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법원에서 모두 패소
‘소송비용액확정’은 소송에서 이긴 쪽이 소송 행위로 인해 발생한 비용을 진 쪽에 청구하는 것으로, 법원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법원은 패소자에게 ‘최고서’를 보내 승소자가 청구한 비용이 적절한지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한 뒤 최종적으로 ‘소송비용액확정결정’을 내린다. 그에 따라 패소자는 소송비용을 물어야 한다.
주민들이 많게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소송비용 폭탄’을 맞은 이유는 2008년 각각의 기초자치단체장(구청장)을 상대로 주민소송에 나섰기 때문. 2006년 5월 일부 구의회가 의정활동비와 월정수당(이하 의정비)을 대폭 인상한 것이 계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이 “ 부당하게 인상된 의정비를 구의원에게서 돌려받으라”며 구청장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부당이득반환소송을 냈다. 의정비 인상에 앞서 실시한 주민설문조사에서 수당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암시하는 문항을 넣는 등 인상 과정에 편법이 있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 서울시 25개 구 중 14개 구 주민이 소송을 냈고, 그 가운데 12개 구 주민이 1심에서 승소했다. 나머지 2개 구의 주민소송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승소한 구의 주민이 구청장에게 회수를 요구한 의정비 인상액은 총 37억9000여만 원에 달했다.
주민소송에 참여한 홍은정 씨는 “주민투표, 주민감사, 주민소환 등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생긴 이래 그동안 10여 차례 소송이 있었지만 주민이 모두 패소했다. 그런데 의정비를 둘러싼 소송에서 도봉구와 금천구, 양천구가 1심에서 승소했다. 주민소송 최초의 승소 사례가 된 것이다. 그 후 대법원까지 간 끝에 결국 우리가 패소했다”고 했다.
구청장이 주민소송의 피고가 된 곳은 강동구, 강북구, 강서구, 금천구, 도봉구, 동작구, 서대문구, 성동구, 성북구, 양천구, 용산구, 은평구였다. 이 가운데 강서구는 2심(서울고법)에서 주민이 패소하면서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나머지 11개 구는 대법원까지 간 끝에 ‘파기환송’ 또는 ‘원고(주민)패소’ 판결을 받아 결과적으로 12개 구 모두 주민이 패소했다.
다음은 주민소송을 진행했던 법무법인 충정 김문성 변호사의 말이다.
“원래 지방의회 의원은 무급 봉사 차원에서 회의 참석 시 실비만 지원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유급으로 바뀌면서 지자체마다 조례를 개정해 의정비를 대폭 인상했다. 월급 개념으로 현실화하다보니 2년 사이 구의원이 연간 받은 의정비의 총액이 2000만 원대에서 4000만~5000만 원대로 급상승했다. 주민이 ‘우리 구의 재정 상황은 나아진 게 없는데 왜 의정비는 급격히 높아졌느냐’며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도가 재도입된 건 1995년. 10여 년간 이어진 ‘무급’ 개념이 깨진 것은 2006년 초 국무회의에서 당시 행정자치부의 지방자치법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되면서다. 이때 전문성과 책임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의정비 유급제’가 도입됐다. 그 결과 수많은 구의회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의정비를 인상했고, 무더기 주민소송을 불러왔다.
구의원 의정비 인상에 반대해 ‘부당이득반환소송’에 참여한 주민 정미라(왼쪽), 홍은정 씨.
구의원 눈치 보는 구청장
‘서울시 자치구 25개 구의 의정비 인상내역’에 따르면, 주민소송이 시작된 2008년 12개 구의 의정비 인상률은 전년 대비 평균 65.4%에 달했다. 그에 비해 25개 구 전체의 평균 인상률은 35%에 그쳤다. 재정자립도는 12개 구 평균 40.5%로 열악한데도, 12개 구 가운데 일부는 2007년에도 의정비를 86~132% 인상했다. 당시 언론에서 의정비 인상 소식을 접한 주민은 분노했다.
“주민소송을 하려면 그에 앞서 서울시에 주민감사를 청구해야 한다. 감사 청구에는 일정 수의 주민동의가 필요해 수개월 동안 거리에서 서명을 받았다. 지자체를 활성화하고 주민이 지역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소송의 또 다른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건 아닌지, 정치 혐오를 더 가중시키는 건 아닌지 고민됐다.”(주민 오나경 씨)
많은 주민이 소송에 참여한 것은 ‘구청장이 할 일을 제대로 안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주민 김은영(가명) 씨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의정비 인상에 문제가 있다고 했고, 1심 재판에서도 법원이 주민 손을 들어줬는데도 구청장은 의정비를 돌려받지 않았다. 그러다 구청장이 바뀌었는데, 신임 구청장은 구의회의 협조가 필요하니까 눈치를 보느라 운신의 폭이 좁았던 것 같다고 한다. 이미란(가명) 씨는 “의정비 인상이 구의원들에 대한 구청장의 ‘당근’처럼 변질돼 ‘쿵짝’이 맞은 것”이라며 성토했다.
1심에서 이긴 12개 구 가운데 2심에서 승소한 곳은 단 두 곳에 그쳤다. 그마저 3심(대법원)에서는 모두 패소했다.
지금까지 법원으로부터 최고서를 받은 주민은 9개 구 40여 명이다. 나머지 3개 구는 아직 소송비용액확정 신청서를 내지 않았거나 내려고 준비 중이다. 소송비용액확정결정이 나서 비용환수 통지를 받은 사람은 2개 구 주민 11명이다.
서대문구 주민 4명 가운데 2명은 이미 1인당 190여만 원의 소송비용을 물어냈다. 아직 돈을 내지 않은 2명에게는 “조만간 납부 고지서를 발송할 예정”이라는 게 구청 담당자의 설명이다. 구청으로부터 비용환수 통지를 받은 11명 중 7명은 은평구 주민. 은평구청 관계자는 “소송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소송비용 환수통지를 했다. 환수 결과는 담당자가 타부서로 옮겨서 당장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데모라도 하고 싶은 심정”
구청에 물어낼 돈의 액수가 크든 작든 취재 과정에서 만난 주민은 한목소리로 “개인에게는 한 푼의 이득도 돌아가지 않는 주민소송에서 패소했다고 소송비용을 주민에게 몽땅 전가한다면 앞으로 누가 주민소송에 참여하겠나. 무서워서 아무도 안 할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장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600여만 원씩 소송비용을 물어내야 하는 주민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많은 주민이 지역활동가, 무보수 봉사자, 목사, 공무원, 주부 등 평범한 서민이다. 오나경 씨는 “지난해 5월 대법원 판결이 났는데, 그 사이(다른 구로) 이사를 해서 최고서는 한참 뒤에야 받았다. 이제는 같은 구 주민도 아닌데, 이게 뭔가 싶어 씁쓸하다”고 했다.
홍은정 씨는 “주민 서명 받으러 다닐 때 아이가 11세였다. 직장인이 몰리는 퇴근시간에 맞춰 서명을 받느라 아이를 근처 도넛 가게에 앉혀놓고 밥 대신 빵을 먹였다”면서 “남편한테는 ‘당신이 힘들게 벌어서 낸 세금을 우리가 이렇게 아낀다’고 큰소리쳤다. 소송비용 물어내게 생겼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금천구·도봉구·양천구 주민소송 1심을 담당했던 법무법인 지평 김영수 변호사는 “비록 구청장이 피고가 됐지만 그를 대신해서 주민이 소송을 낸 것 아닌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위해 구청에서 할 일을 대신 했기 때문에 주민을 상대로 구청(장)이 소송비용 청구를 안 하면 되는데 하는 게 문제”라고 했다. 반면 김문성 변호사는 “법리적으로 따지면 승소한 구청장이 소송비용을 청구하는 게 맞다. 최종적으로 재판에서 승소했는데 소송비용을 환수하지 않으면 상급기관 감사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변호사는 “제도 보완과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김영수 변호사는 “이번 주민소송뿐 아니라 정보공개청구에서도 시민단체가 패소하면 승소한 쪽에서 소송비용을 청구한다. 시민단체는 재정상황이 열악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소송 상대인 정부나 공공기관은 여러 변호사를 선임한다”고 전했다. 그는 “시민단체는 승소해도 실비(인지대와 송달료)만 받고, 정부나 공공기관이 승소하면 시민단체가 엄청난 소송비용을 무는 게 현실이다.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나경 씨는 “소송이 한창일 때 한나절 이상 재판에 참석하고 오면 일이 밀려서 밤을 샜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1심에서 승소했을 때는 지자체 제도의 기본을 우리가 실현한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최고서가 날아오니까 ‘그동안 우리가 뭘 했지’라는 허탈감이 들었다”고 했다. 김미정(가명) 씨는 “남편이 명퇴했고 나도 수입이 없는데 소송비용까지 내라니 ‘데모’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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