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들의 전쟁’에 대위 출신 도전장
- “국방장관 상대할 장성 출신 원로라야”
- “재정위기 타개할 사업가 출신 필요”
- 성우회와 향군의 역할 분담 필요하다?
김대중 - 노무현 정부 시절 재향군인회는 안보단체로 변신해 보수 여론을 주도했다. ‘노병’들이 시위를 하는 동안 향군의 재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4월 10일 실시하는 제 35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향군) 회장 선거가 관심을 끈다. 장성 대 비(非)장성 출신의 대립 구도가 형성될 것 같기 때문이다. 비장성 출신이 향군회장에 도전한 사례는 딱 한 번 있었다. 해군 병장 출신으로 서울시 향군회장을 지낸 김병관(62) 씨가 32대와 34대 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육군 3사관학교(6기) 출신의 예비역 대위인 신상태(65) 씨가 도전한다. 과거 육군에서 3사 출신 장교는 ‘서자’로 여겼다. 육군사관학교 출신과 마찬가지로 직업군인의 길을 걷지만 진급에 실패해 조기 전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달라져 대장 3명(박영하, 박성규, 이순진)을 포함해 170여 명이 ‘별’을 달았다. 그런데 그들은 가만히 있고 ‘밥풀데기’ 출신이 도전한다니 결과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밥풀데기’의 도전
1952년 창설돼 63년의 역사를 가진 향군사(史)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김영삼 정부 때다.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 때 부활한 지방자치제를 확대 실시해 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았다. 이후 대한민국은 ‘선거공화국’이 돼버렸다. 교육장과 대학 총장도 선거로 뽑는 문화가 조성됐고 향군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상급자가 예하 지휘관을 임명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에 젖어 있던 군 출신은 향군 회원이 되는 순간 180도 다른 문화에 ‘접속’하게 된 것이다.
1994년 향군은 처음으로 회장(27대)을 대의원 직선제로 선출했다. 1979년 12·12 사태 때 신군부의 지시로 서울로 진입하던 9사단 기동부대를 막으려 했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소장 출신)이 그 주인공.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본분에 충실했던 장씨는 12·12사태 직후 강제 예편당했다. 그러한 인물이 향군회장에 선거로 당선됐으니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군은 미군정 치하에서 만들어졌기에 최초의 장교는 군사영어학교에서 배출됐다. 이어 육사의 전신인 경비사관학교를 만들었다. 과거에는 입대 장정을 신체검사해 건강하다고 판단되면 ‘갑(甲)’, 그다음이면 ‘을(乙)’로 평가했다. 건군 후 한국 육군은 급팽창했기에 장교가 부족했다. 그래서 고졸로 갑종 판정을 받은 이를 선발해 광주 보병학교에서 교육시켜 소위로 임관했다(갑종장교). 그때가 1950년 1월이다.
5개월 뒤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소모품 소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초급 장교의 희생이 컸다. 부산으로 수도를 옮긴 정부는 동래고등학교에 육군종합학교를 만들어 부족한 소위를 양산했다. 갑종보다 더 짧은 기간 교육을 받고 임관한 ‘종합’ 장교를 배출한 것. 종합은 임시로 만든 제도라 전쟁이 끝나자 10기로 막을 내렸다.
한미군사동맹이 맺어지면서 ‘미군과 대화할 수 있는’ 대학 교육을 받은 장교가 필요했다. 1951년 정부는 단기 과정이던 육사를 4년제로 재편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규 육사 1기로 불리는 11기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12·12사건을 계기로 11기는 ‘신군부’로 등장해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배출했다.
육군은 1961년 학군(ROTC), 1981년 학사장교(OCS)를 도입해 대졸 장교를 늘렸다. 갑종제도도 개선했다. 1968년 북한군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한 1·21사태 뒤 2사와 3사를 창설해 갑종장교 제도를 흡수한 것. 그리고 2사를 3사에 통합했다.
그때의 3사는 몇 개월에서 십수 개월만 교육했으니, 여전히 단기사관 양성 과정이었다. 3사는 1972년 전문대(2년제), 1996년 4년제 학사 과정으로 재편됐다. 이로써 한국군은 대졸자만 장교로 임관하게 됐다.
이는 향군회장 선거에도 영향을 끼쳤다. 장태완 씨가 선출되기 전까지 정부는 20명을 향군 회장에 지명했는데(연임자 포함), 하나같이 단기 과정으로 장교가 된 사람이었다. 장씨(육군종합학교 출신)를 포함시켜도 4년제 대학 교육을 받고 임관한 이는 없었다.
정규 육사는 단 2명 배출
육사 11기에서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외에도 이기백, 정호용, 이상훈 씨가 대장에 진급했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4성 장군이 됐기에 전역 후에도 국방부 장관(이기백-24대, 정호용-25대, 이상훈-27대)을 하는 등 할 일이 많았다. 전-노 대통령 시절엔 향군을 쳐다보지도 않은 것. 김영삼 정부에서 장태완 씨가 선거로 회장에 당선되자 비로소 향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장씨가 연임하고 물러난 후 치른 29대 선거(2000년)에 11기 이상훈 씨가 출마해 정규 육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됐다. 이씨의 후임자는 12기 박세직 씨(31~32대)다. 대졸 육사 출신의 영예는 거기까지였다. ‘정예’라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은 ‘소수’의 한계에 직면했다.
선거에서는 ‘수’가 매우 중요하다. 배출 장교가 가장 많은 집단은 17여만 명의 학군이다. 다음이 학사(4만7000여 명), 3사(4만2000여 명) 순이다. 역사가 가장 길고 ‘별’을 가장 많이 배출한 육사 졸업생은 2만여 명뿐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수가 많은 쪽에서 지휘권을 가지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젊은 향군이냐, 원로 향군이냐
2014년 10월 8일 62회 ‘향군의 날’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이 박세환 회장(박 대통령 왼쪽) 등 향군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때 박세환 씨가 출마해 군으로 보면 대선배인 육사 출신의 민경배(14기, 대장), 조남풍(15기, 대장) 씨를 누르고 당선됐다. 향군이 젊어진 것이다. 실제로 박세환 씨의 캐치프레이즈가 ‘젊은 향군’이었다.
연임을 한 박세환 씨의 임기가 끝나가 35대 회장을 뽑으려는 지금 3사-대위 출신인 신상태 씨가 등장해 바람을 일으킨다. 이러한 파격에 대해 사관학교는 물론이고 별을 단 학군 출신도 상당수가 못마땅해한다. “향군회장은 국방부 장관은 물론이고 국가안보실장, 대통령과도 대화해야 하고, 외국 장성도 만나야 하는데 어찌 대위 출신에게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위계질서를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1972년 3사 6기로 임관한 신씨는 육사 28기, 학군 10기와 임관 동기다. 그러나 3사 6기는 18개월 교육 후 소위가 됐기 때문에 입학 연도로 따지면 2년을 더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신씨는 육사 30기, 학군 12기와 입교 동기가 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육사 31기, 최윤희 합참의장이 해사 31기(육사로 치면 33기), 김요한 육군 총장이 육사 34기다. 신씨는 향군회장 출마 예상자 가운데 가장 젊다(마지막 쪽 표 참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향군회장은 국방부 장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박세환 씨가 예외적으로 젊었다고 할 정도로 원로를 선출해왔다. 3사에서 회장이 나오려면 1기 에서 먼저 나오는 게 옳다. 아무리 민주화했다지만 군을 상대하는 조직이 향군인데 위계질서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한다.
신씨의 등장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향군의 어려운 재정(財政)에 있다. 향군은 스스로를 친목·애국·명예단체로 규정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정부는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이 일어나 참수리 고속정이 격침되고, 북한이 우라늄을 농축해 핵무기를 만들겠다고 해도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안보 시위 속에 멍든 재정
주한미군 훈련 중 한국 여학생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자 좌파는 주한미군을 비난하며 철수를 주장했다. 한미동맹을 책임진 국방부는 가만히 있었다. 정부가 회장을 지명하는 과거의 향군이었다면 ‘역시’ 꼼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훈 회장이 이끄는 향군은 들고 일어났다. 좌파와 정부에 반대하는 친미 시위를 펼친 것.
향군과 정부의 대립은 노무현 정부 때도 반복됐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에 대해 국방부와 합참의 현역들은 ‘순순히’ 따라갔지만, 향군은 또 반대로 갔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서울시청 광장으로 몰려나온 것. 그때쯤 보수 언론은 전작권 전환이 한미연합사 해체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늙은 군인의 데모’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향군이 보수층의 여론을 선도한 셈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명박 정부는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그때도 향군은 제일 먼저 종북과 친북을 척결하자는 안보시위를 벌였다. 서울시청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촛불을 든 젊은 층과 군복을 입은 노병의 물결이 교차했다.
박세직-박세환 회장 시절을 거치면서 ‘어용단체’는 정부 정책은 물론이고 종북·친북 세력에 대항하는 ‘보수운동단체’로 변모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향군의 시위는 군사정부 시절의 관제 데모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관제 데모는 정부 지원금을 받았으나 지금의 향군은 시위 비용을 자체 조달한다. 서울시청 앞에서 한 번 시위하는 데 드는 비용은 1억여 원. 향군은 매번 자체 조달했다. 그렇게 안보 단체로 자리매김하면서 향군은 안으로 급속히 썩어들어갔다. 불치병에 가까운 ‘암’에 걸린 것이다.
향군은 군사정부 시절 든든한 지원을 받았기에 상당한 자산을 갖고 있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이다. 중앙고속, 충주호유람선, 코레일이 운영하는 객차와 역사(驛舍) 등을 청소하는 향우산업, 군에서 나오는 고철을 처리하는 향우실업 등 8개 업체를 거느린다. 그 밖에도 여러 개의 수익사업을 운영한다.
‘아생(我生)’에 실패한 향군
그런 점에서 향군은 군인공제회(군공)와 비교된다. 군공은 현역들이 내는 회원급여금을 모아 투자하는 법인인데, 노하우가 뛰어나 투자 성공률이 꽤 높았다. “군공이 투자하는 곳은 따라가도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증권가에서 주목받는 큰손이 됐다. 군공은 민간 전문가를 영입해 투자했기에 건실한 기업을 거느린 그룹이 됐다. 향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산을 잘못 운용한 것이다.
부동산 경기가 좋던 2006년 향군은 사업개발본부를 만들어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에 뛰어들었다. 군공은 인수합병, 펀드 투자, 부동산 개발 등으로 분산 투자를 하는데, 향군은 이른바 ‘몰빵’을 택했다. 부동산 개발 회사는 신용등급이 낮아 자기 신용으로는 대출을 받지 못한다. 향군은 개발사 보증을 서주고 대가를 받기로 했다. 부동산 개발 사업에도 투자했다. 이른바 ‘고리채 장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 경기가 급락해 분양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향군은 20개 PF 사업에 참여했는데 전부 부도가 났다. 부동산 개발 회사들이 무너지자 금융권은 보증을 선 향군에 변제를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떠안은 빚이 순식간에 7000여억 원대로 치솟았다. 안보시위를 치열하게 펼칠 때였다. 사회운동을 하려면 ‘아생(我生)’부터 해야 하는데, 아생은 등한히 하고 ‘살타(殺他)’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향군의 앞날이 깜깜해졌다.
당시 향군은 PF 사업과 별도로 서울 잠실에 주상복합의 36층짜리 향군타워(향군회관)를 짓고 있었다. 잠실에 갖고 있던 두 필지 가운데 하나를 판 돈으로 다른 필지에 회관을 건설한 것이다. 워낙 요지였기에 2013년 완공된 이 타워의 사무실은 금방 임대가 됐다.
향군은 이 타워를 담보로 제공하고 변제를 연장했다. 그 사이 떠안은 부동산 일부를 헐값에 매각해 빚 변제에 보탰다. 빚은 5500억 원대로 줄었고, 이자율도 크게 떨어져 한숨을 돌리게 됐다.
그러나 5500억 원은 하루 7000여만 원의 이자가 발생하는 거금이다. 향군은 8개 업체 수익금과 향군타워 임대료 등으로 이를 메워가지만 역부족이다. 향군에서 ‘흑자’란 말은 천연기념물이 된 지 오래다. 아끼고 또 아껴도 2015년 향군은 수억 원의 적자를 볼 것이 분명하다.
“재정 안정시킬 리더 필요”
그래서 재정을 안정시키고 빚을 줄일 CEO형 리더를 찾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향군의 친목단체적 성격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신상태 씨는 건국대 행정학과 야간 과정에 입학(70학번)해 1년을 다니고 3사에 들어가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서울 근교에 있는 부대에서 근무했기에, 저녁에 학교를 다녀 졸업할 수 있었다. 의무 복무 후 대위로 전역한 그는 공구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사업가로 일어선 뒤에는 건국대 동문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건국대에서 부동산학 석사와 경영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지금은 환경 관련 사업과 빌딩 임대업, 유통업 등을 한다.
이러한 성공과 재력 덕분에 그는 3사 총동문회 회장을 맡게 됐다. 2008년 18대 총선이 다가오자 3사 졸업생 가운데 11명이 여당에 공천 신청을 하겠다고 했다. 3사의 설움을 절감한 그는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한 명도 공천받지 못했다. 그러자 1기 선배가 “우리의 모태는 군이니 향군이나 자유총연맹 같은 군 관련 단체에 들어가 활동해야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 선배의 주선으로 그는 박세직 회장을 만났는데, 박 회장은 그에게 서울시 향군회장 선거에 나가라고 종용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는 가진 게 없어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라는 자신감으로 선거에 총력을 기울여 당선됐다. 그리고 박세직 씨 타계 후 후임자로 선출된 박세환 회장을 만났다.
향군은 전통적으로 육·해·공군과 해병대 출신을 부회장으로 임명해왔다. 당시의 향군은 안보운동과 함께 재정 건전화에도 주력해야 했으므로 ‘젊은 피’가 필요했다. 박 회장은 운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학군 35기(94학번) 출신으로 ‘와이드 뷰’라는 기업을 운영하는 신동권 씨를 청년부회장에, 그리고 신상태 씨를 특임부회장에 임명했다. 3사 출신도 향군 임원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향군 특임부회장 겸 서울시 향군회장을 할 때 신상태 씨는 업적을 하나 만들었다. 향군은 향군법에 따라 설립된 법인이다. 이 법 16조 3항에는 ‘지자체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향군 사업에 보조금을 줄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서울시와 서울시 의회를 집요하게 설득해 22억 원의 보조금을 받아내고, 그 돈으로 서울시 향군회관을 리모델링해 임대 수익을 늘렸다. 이는 규정을 근거로 해낸 것이니 ‘별것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
그러나 그가 실천할 때까지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지자체도 형편이 좋지 않고 군사정부 시절도 끝났는데 감히 지역 향군을 지원하겠느냐’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사람이 많았던 것. 그러나 그의 성공을 시기한 사람들은 “사업가는 흑백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좌파인 박원순 서울시장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냈으니 좌파 아닌가”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박 시장과 그의 유착 정황을 보여주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 무렵 향군 지도부는 사업에 눈을 떴다. PF 사업이 줄줄이 실패하던 시절 향군은 한국토지공사가 주도한 경기도 동탄 신도시 사업에 참여해 모처럼 돈을 벌었다. 당시 토지공사 사장은 학군 2기 출신인 김진호 씨였다. 이어 향군은 서울 마천지구에 있는 육군 특전사를 지방으로 옮기고 그곳을 개발하는 위례신도시 개발사업에도 참여했다. 이 사업은 향군의 미래 재정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향군 회원의 여론은 “부동산 사업을 잘 아는 이를 회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쪽과 “향군은 안보단체이니 국방부 장관 등과 통할 수 있는 이를 뽑고, 따로 부동산 전문가를 뽑아 그 일을 맡겨야 한다”는 쪽으로 양분됐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35대 향군회장 선거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조직 강한 쪽이 유리
현재 향군회장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사람은 5명이다. 학군 출신으로는 처음 합참의장(대장)에 오르고 전역 후 토지공사 사장과 민주당 안보특위 위원을 지낸 2기의 김진호 씨(고려대), 현 향군 사무총장인 6기의 이선민 씨(부산대, 중장), 육사 15기의 이진삼 씨(부여고, 대장)와 18기의 조남풍 씨(동래고, 대장), 그리고 3사 6기 출신의 신상태 씨(구미공고, 건국대)다.
김진호 씨는 토지공사 사장 시절 향군 사업을 지원했다는 것이 큰 무기다. 이선민 씨는 향군의 조직을 움직이는 현직 사무총장이라는 것이 강점이다. 육사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연로한데 이들은 향군 본연의 임무를 강조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포병 소장 출신인데도 한국 경제를 살려냈다. 경제전문가라서가 아니라 남덕우 씨처럼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믿고 맡겼기 때문이다. 향군은 안보 문제에 집중하고 재정 문제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해 해결하면 된다. 본말을 전도하면 안 된다.”
이렇다보니 향군회장 선거는 ‘사업가 대 비(非)사업가’ 대결 구도로 비치기도 한다. 어떤 구도든 ‘폭풍의 핵’은 신상태 씨다. 향군회장 선거는 390여 명의 대의원 투표로 결정되므로 조직력이 강한 쪽이 유리하다. 대의원의 상당수는 병사 출신인데,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신씨의 바람이 거세지면 학군과 육사 출신은 ‘3사-대위’ 회장 시대가 열리는 것을 막으려해 내부 단일화를 꾀할 수도 있다. 표가 분산치 않게 육사 출신끼리나 학군 출신 간 후보 단일화를 하는 것이다. 대위 출신 회장을 막기 위한 장성 단일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오는 4월 향군 대의원들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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