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시리아 반군 돕다 자충수 행정부·사법부는 자중지란

‘이슬람국가(IS)’ 늪에 빠진 ‘이슬람 국가’ 터키

  • 김영미 | 분쟁지역 전문 PD

    입력2015-01-22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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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는 유럽과 중동을 잇는 나라다. 중동에서 시작된 바람이 고스란히 옮겨온다.
    • 최근 터키는 100년간의 세속주의를 버리고 이슬람 국가로 회귀했다.
    • 수니파 출신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를 주도했다.
    •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지만, 에르도안의 터키 장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터키는 이슬람 반군, 특히 ‘이슬람국가(IS)’의 근거지 시리아로 들어가는 통로로 이용돼왔다. IS 대원이 되고 싶어 하는 서방 젊은이들이 이스탄불 공항으로 몰렸다. 예비 IS대원을 적발하려 각국에서 파견한 정보국 요원들이 이스탄불 공항 곳곳에 진을 치고 있을 정도.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용의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이다 사살된 범인의 동거녀도 터키를 거쳐 시리아에 입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슬람국가를 포함한 중동의 이슬람 반군 세력이 강해질수록 터키는 주목을 받는다. 유럽과 중동을 잇는 관문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터키는 1923년 중동 국가 중 처음으로 세속주의 통치를 헌법에 명시하며 사실상 이슬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최근 깨졌다. 3선 총리를 거쳐 지난해 대통령이 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거의 100년의 세월을 되돌려 터키를 이슬람 율법이 통치하는 나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 에르도안은 취임 이후 여성 히잡 착용,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 금지, 주류 판매 규제 등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에르도안의 이런 정책을 ‘신(新)오스만주의’라고 부른다.

    시곗바늘 거꾸로 돌린 대통령

    터키는 관광국가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끼어 있어 유럽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관광객의 영향 등으로 터키는 오랫동안 서구 사회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에르도안의 ‘신오스만주의’는 이슬람식 율법을 강화해 국민의 반발을 산다.



    지난해 11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스탄불에서 열린 여성과 정의 관련 회의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창조됐으며 여성은 남자와 똑같은 일을 떠맡을 수 없고 여자들과 남자들을 대등한 지위에 놓을 수 없다”고 말해 여성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뷸렌트 아른츠 부총리도 “여자는 공공장소에서 웃으면 안 된다.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순결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 내용이 알려진 뒤 양식 있는 터키 국민은 반정부 시위를 이어가며 에르도안의 이슬람 율법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터키 정부는 법원의 결정 없이도 웹사이트 접속을 차단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했다. 터키 정부는 조만간 이와 같은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만약 법안이 통과되면 총리나 관련 부처 장관들이 콘텐츠의 유해성을 판단해 먼저 통신청에 차단을 요청한 뒤 24시간 안에 법원의 승인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터키 정부는 지난해 9월에도 비슷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지만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단해 시행되지 못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르도안은 오히려 터키 최대 일간지 ‘자만’의 편집국장, 방송사 회장과 프로듀서 등을 체포했다.

    동업자 간 갈등

    유명 여성 앵커가 사법부의 부패를 비판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경찰에 체포되는가 하면 16세 고등학생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 때문에 대통령 모욕죄로 학교에서 체포됐다. 터키에서 활동하는 네덜란드 기자는 ‘테러 선동’ 혐의로 체포됐다. 외신기자인 그는 쿠르드족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블로그를 운영했다. 급기야 국제사회까지 나서 터키 정부의 언론 탄압을 비판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보다 언론 자유가 더 보장된 곳은 없다”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에르도안에 가장 강력히 저항하는 세력은 사법부다. 이미 서구 사회의 세속주의에 물든 검사와 판사들이 강력히 저항한다. 삼권분립과 신정분리 원칙에 의해 통치되길 바라는 이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른 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법부는 에르도안의 행정부와 곳곳에서 마찰을 빚는다.

    지난해 1월, 터키 남부 아다나 주의 시리아 국경 인근 도로에 화물차 7대가 줄지어 지나갔다. 화물차엔 무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국경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화물차를 세웠다. 그리고 이내 실랑이가 벌어졌다. 화물차는 터키 국가정보국(MIT) 소속 차량이고 화물차를 세운 사람은 터키 검찰이었다. 미리 알고 와 있던 많은 기자가 이 상황을 취재했다. 왜 정보국과 검찰은 국경에서 대치한 걸까.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터키 검찰은 경찰과 치안군으로부터 첩보를 입수해 터키 남부 하타이 주에서 시리아로 들어가는 무기를 실은 차량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 MIT 직원이 탄 화물차가 적발됐다. 그런데 MIT 직원은 국가기밀이라며 수색을 거부했다. 화물차를 촬영한 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연행됐다. 사건이 보도되자 주 당국은 “화물차에는 MIT 직원이 타고 있었으며 정기적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논란은 계속됐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2013년 12월 터키에서 벌어진, 장관 3명의 아들과 국책은행장 등 주요 인사 50여 명이 관련된 입찰 비리, 뇌물 수수 사건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검찰에 체포된 이들은 모두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수사는 처음부터 에르도안 당시 총리를 겨냥했다. 에르도안은 “(이슬람 사상가) 페툴라 귤렌을 지지하는 세력이 벌인 사법 쿠데타”라며 반발했다.

    에르도안이 언급한 귤렌은 ‘히즈메트’(봉사)라는 이슬람 사회운동을 이끄는 인물이다. 2002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이 집권할 당시 큰 기여를 했다. ‘제마트’(공동체)로 불린 귤렌 세력은 경찰과 사법부, 언론계, 교육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집권 후 에르도안과 귤렌 세력은 사이가 나빠졌다.

    “집에 있는 돈 분산시켜!”

    ‘화물차 사건’은 에르도안이 이끄는 행정부와 귤렌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법부 간 충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정의개발당 대변인은 화물차 사건과 관련 “MIT와 관련한 모든 절차는 총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검찰이 권한을 남용해 수사했다. (이 사건은)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귤렌이 이끄는 사법기관을 비판했다. 결국 화물차 사건은 사법부의 완패로 끝이 났다. 에르도안 당시 총리는 화물차 수색을 시도한 경찰을 직위해제하고 하타이 경찰청 테러범죄부 간부들을 교체했다.

    화물차 사건 조사 과정에서 MIT가 시리아 반군에 무기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가 된 화물차에 실린 무기도 모두 시리아 반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사건 후 터키 내무장관은 “(시리아에) 투르크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를 보냈다”고 해명했다. 그동안 “인도주의적 지원만 했다”고 한 터키 정부의 말과는 다른 설명이었다.

    화물차 사건이 발생한 무렵인 지난해 1월 초, 사법부 최고기관인 판사·검사 최고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알트노크 이스탄불 경찰청장에 대한 수사에 나선 바 있다. 알트노크 청장은 에르도안 당시 총리의 최측근 인물로 장관 아들 등이 관련된 뇌물수수 사건으로 경질된 휴세인 찹큰 청장의 후임이었다. 에르도안의 측근인 그는 취임 이후 줄곧 검찰과 갈등을 빚었다.

    에르도안은 보복에 나섰다. 행정부는 수사를 담당해온 경찰 350명을 전격 해임하거나 직위해제하며 경찰 장악에 나섰다. 사법부가 행정부를 공격하면 행정부가 반격하는 일이 이어진 것이다.

    지난해 2월 말에는 에르도안과 그의 아들 간의 통화를 도청한 파일이 유튜브에 올라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파일에는 에르도안과 아들이 10억 달러(약 1조654억 원)의 현금을 숨기려고 상의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통화가 감청된 시점은 2013년 12월, 검찰이 부패에 연루된 집권 정의개발당 인사들을 줄줄이 체포하던 때였다. 파일에서 에르도안의 아들은 “집에 있는 현금을 분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르도안은 “도청될 수 있으니 자세하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뇌물을 받고 기업에 특혜를 주는 내용과 방송사에 야당 대표의 연설 중계 방송을 중단하라고 직접 압력을 넣는 발언도 쏟아냈다.

    파일이 공개되자 터키는 혼란에 빠졌다. 언론은 연일 이 내용과 음성을 보도했다. 터키뿐 아니라 전 세계가 이 음성을 타전했다. 그러나 에르도안 측은 “통화 내용은 날조된 것”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녹음 파일은 터키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10여 개 도시에서 총리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2013년 반정부 시위 당시 최루탄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소년의 사망도 시민을 자극했다. 소년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이 연일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녹음 파일이 공개될 당시 총리였던 에르도안은 대권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오랜 기간 준비한 대권의 꿈이 한방에 날아갈 상황이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위기를 극복했다. 아니, 위기를 기회로 살렸다.

    의혹이 불거지자 에르도안은 음모론을 펼치며 상황을 돌파했다. “(정적인) 귤렌과 사법부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에르도안의 지지층은 오히려 결집했고, 지난해 8월 치러진 대선에서 에르도안은 집권에 성공했다. 많은 전문가는 에르도안이 재선에 성공해 2024년까지 터키를 통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은 2002년 이후 총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에르도안의 인생 역정

    에르도안은 1954년 흑해 연안 도시인 리제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부모를 따라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빈민가로 이사 왔다. 가난한 또래 소년들이 그랬듯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생수와 레모네이드를 팔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타고난 총명함과 향학열이 있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한 그는 이스탄불 마르마라대에 입학했고 날품을 팔며 학비를 조달했다. 재학 중 세미 프로축구 선수로도 이름을 떨쳤다.

    에르도안의 이러한 성장 배경은 대다수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국민은 자신들처럼 가난했지만 역경을 딛고 성공한 에르도안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에르도안은 이를 바탕으로 만 40세에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화려하게 입문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은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며 승승장구해온 에르도안에게 큰 악재가 됐다. 시리아 내전 초기 에르도안은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비난하며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에르도안이 지원한 세력은 자신과 같은 수니파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과 무장단체 하마스 등이었다.

    하지만 과격 반군세력이 이슬람국가(IS)를 만들면서 에르도안과 터키 정부는 난처해졌다. 자칫 터키 정부가 대량학살을 일삼아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IS를 지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 수니파라는 이유로 지지를 선언하기엔 IS의 폭력성은 도를 넘어섰다.

    수니파 대통령의 고민

    IS의 세력이 커지면서 터키로 넘어오는 시리아 난민 문제도 에르도안의 고민을 깊게 했다. 특히 IS가 터키 국경과 매우 근접한 시리아의 북부 도시 코바니(아인 알 아랍)를 공격한 뒤로는 최대 2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터키로 넘어와 에르도안 정부를 당황케 했다. 터키 정부가 준비한 난민 수용 시설이 한계에 달했을 정도다.

    터키 국경을 넘어오는 난민의 대다수는 쿠르드족이다. 쿠르드족은 터키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소수민족이다. 현재 전 세계에 3800만 명이 넘는 쿠르드족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중동의 집시’로 불리며 유랑생활을 한다. 쿠르드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며 나라 없는 민족으로 수난을 겪었다. ‘쿠르디스탄’을 건설한다는 쿠르드족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이 분리독립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쿠르드 반군을 공격했다. 1998년에는 쿠르드 반군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시리아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시리아가 쿠르드 반군 지도자 오잘란을 추방하고 터키와 안보협정을 체결하고서야 전쟁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쿠르드 반군이 주축인 ‘쿠르드 노동자당’(PKK)을 이끌어온 오잘란은 현재 터키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터키 동부에선 요즘도 종종 터키 정부와 쿠르드족이 갈등을 빚는다. 터키 정부로서는 쿠르드족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리아에 있는 쿠르드족이 터키 영토로 계속 유입되다보니 터키 정부가 IS보다 쿠르드족을 더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내에선 잘 먹힌 에르도안의 정책(신오스만주의)이 외부 사정으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에르도안의 신오스만주의는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변해갈까. 그리고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을까.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로 변한 터키의 미래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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