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또 한 번의 협상을 꿈꾸며

  •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입력2015-01-20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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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는 나를 ‘협상의 달인’이라고 일컫는다. 흉인지,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자민련 측과 협상을 통해 이른바 ‘DJP 연합’을 이뤄낸 일, 그리고 다음 해인 1998년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 노사정 대타협을 이뤄낸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19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 기자회견을 한 뒤 일본 도쿄의 모 대학교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들은 “다른 나라에선 3~4년을 끌어도 해결하지 못하는 노사정 대타협을 단기간에 해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비결이 없는 것이 비결”이라는 답으로 웃어넘겼지만 분명히 ‘나만의 협상방법론’은 있다.

    첫째는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싶다면 협상에 앞서 신뢰 구축을 우선순위로 둬야 한다. 둘째는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아무리 상대방이 나와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가 그의 위치에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의 처지에 서는 일이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면 뜻밖으로 쉽게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셋째는 문제의 핵심에 빨리 접근하는 것이다.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만나면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변죽만 울리고 시간만 보내는 헛수고가 되고 만다. 넷째는 상대가 미안해할 정도로, 나를 이해해줄 때까지 참고 또 참으면서 타협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협상을 이끌어내든 소신(所信)과 백인(百忍)의 정신으로 상대방과 협상해야 한다. 중국 당나라 때 고종이 9세(世) 동안이나 일족(一族)이 함께 산 장공예(張公藝)에게 그 방도를 물으니 참을 인(忍)을 100번 써서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백인(百忍)의 정신으로 협상에 임하는 것이 나만의 협상방법론이다.

    마지막 승부수



    1996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나를 김대중 총재가 불렀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 즉 김대중 총재와 김종필 총재의 공조 단일 협력 체제를 구축하라는 임무를 줬다. ‘참으로 어려운 일을 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성사되리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민련 김용환 사무총장을 처음에는 극비리에 만났다. 그는 국회와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중진이며 합리적인 정치인이다. 김대중·김종필 두 총재의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자민련에서도 대통령후보를 내야 할 상황이라 협상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양보를 받아야 하는 처지이고, 자민련은 양보를 해야 하는 처지인 만큼 자민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우리 앞에는 숱한 난제와 난관이 산적해 있었다. 나는 이런 때에 내가 김 총장의 처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역지사지였다.

    김 총장과 내가 어렵게 합의를 도출해도 양당의 내부 사정에 따라, 그리고 의견 조율을 거치는 과정에서 물거품이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았다.

    협상이 원점을 맴돌던 1997년 10월 26일 김용환 총장을 만나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가 합의서에 먼저 사인을 하고, 두 분 총재에게 들이밀어서 안 되면 그만둡시다.”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합의문에 김대중, 김종필, 한광옥, 김용환의 이름을 써 넣고 나와 김 총장이 먼저 사인을 했다. 양당 총재의 허락도 없이 우리가 먼저 합의문에 서명한 무리한 절차였다. 좋게 말하면 결단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경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튿날 김대중 총재에게 합의서를 보고하며 “이 이상은 안 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할 수 없군”하며 수용했다. 김종필 총재도 그런 식으로 합의문을 받아들였다. 두 총재는 1주일 뒤인 11월 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야권 후보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았다. 1년 6개월 동안 공을 들인 야권후보 단일화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포장마차 협상

    그 후 나는 또 한 편의 ‘역사’를 써야 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기도 전에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인수위 사무실로 나를 불러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노사정의 협력과 화합이 필요하오. 지금 나라를 구하는 길은 노사정이 타협하는 길밖에 없소. 그게 안 되면 IMF에서 돈을 꾸어줄 수 없다고 하지 않소. 한 동지가 이 국난을 해결하도록 하시오.”

    그래서 나는 또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번에는 노사정이 협력하고 화합하는 체제를 만들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했다. 선거과정에서 든든한 후원군이 돼준 노동자들로부터 희생을 약속받아야 하는 악역을 맡은 것이다.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가 발족했다. 노동계를 대표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고통분담 차원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경제단체, 정부와 정계 대표들도 한 테이블에 앉았다.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협상에 나선 노사정 3자 모두 외환위기에 대한 인식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하고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서로의 견해는 달랐다. 고비마다 의견이 충돌했고, 회의장과 협상장엔 고성(高聲)이 가득했다. 교착 상태는 물론이고 회의 불참을 선언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상황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역지사지 정신이 필요했다. 경영자는 노동자 처지에서, 노동자는 경영자 처지에서 생각해보도록 유도했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서로 양보해 고통을 분담하는 길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협상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대화를 해도 허사다. 그런데 당시 서로가 마음을 열고 신뢰하기까지는 우스운 이야기지만 술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회의장이 있던 한국노동연구원 앞에는 포장마차가 두 개 있었다. 한 집만 들르면 섭섭하니까 두 집을 번갈아가며 들러 소주를 마셨다. 회의 때는 속내를 감추다가도 소주 몇 잔 마시다보면 속을 터놓고 불쑥 “이 문제만큼은 꼭 풀어주셔야 합니다”라며 의견을 들이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리 늦어도 경기도 일산의 대통령당선자 자택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의 요구 내용을 전달하고, 그들을 대신해 생떼도 쓰는 등 여러 차례 결례도 했다.

    1998년 1월 15일 발족한 제1기 노사정위원회는 2월 6일 마침내 노사정 대타협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탄생시켜 대한민국은 외환위기의 벼랑 끝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협상은 ‘양날의 칼’

    협상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고 했다. 특히 정치권의 협상은 자칫 오해하면 ‘야합(野合)’으로 비치지만 꽉 막힌 정국을 풀어주는 돌파구 노릇도 하고 대화와 협력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한다.

    또 한 번의 협상을 꿈꾸며
    한광옥

    1942년 출생

    중동고, 서울대 영문과(중퇴)

    11, 13, 14, 15대 국회의원

    노사정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제22대 대통령비서실장,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 국민대통합위원장, 現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장

    저서 : ‘선택’등


    DJP 연합을 통해 헌정사 최초로 수평적·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외환위기 극복에 헌신한 나의 작은 노력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역사 발전에 한 알의 밀알이 됐다면 큰 보람으로 여기겠다.

    나는 또 하나의 협상 테이블에 앉고 싶다. 그것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남북통일 협상 테이블’에 남북한 대표가 나란히 앉아 통일을 논의하는 자리다. 그 바람은 내가 조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간절한 꿈이고 희망이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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