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허드슨 강 계곡의 ‘조각 파라다이스’

스톰 킹 아트센터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01-20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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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 인근 우드버리 아웃렛을 갈 계획이라면 그 근처 스톰 킹 아트센터도 꼭 들르길 권한다.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 조각 전문 야외 미술관이다. 광활한 초원에 거대한 추상 조각품이 우뚝우뚝 선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허드슨 강 계곡의 ‘조각 파라다이스’

    대자연을 품은 미술관, 스톰 킹 아트센터의 전경. 가운데 보이는 작품은 마크 디 수베로의 \'Phyramidian\'이다.

    미국 뉴욕 주(州)를 남북으로 길게 가르는 허드슨 강은 하구에서 뉴욕 시(市)를 만들면서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이 강과 어우러지는 산과 계곡은 아름답기로 유명해 예부터 많은 화가가 몰려들어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들을 허드슨강파(Hudson River School)라고 한다. 미국 미술사에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긴 화가들이다.

    뉴욕 시에서 이 강을 따라 북쪽으로 한 시간가량 올라가면 ‘마운틴빌(Mountainville)’이라는 아담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한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우드버리 커먼(Woodbury Common) 아웃렛과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군사관학교 옆 동네다. 여기서부터는 ‘스톰 킹 아트센터(Storm King Art Center)’라는 조그만 도로 표지판이 등장한다.

    광활한 조각 들판

    허드슨 강 계곡의 ‘조각 파라다이스’

    마크 디 수베로의 ‘Frog Legs’

    표지판을 따라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가면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가로수길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길 옆으로 이상하게 생긴 철 구조물이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어라, 이게 뭐지?’ 하며 어리둥절해하는 외지인의 눈앞에 곧 500에이커(약 60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초원에는 여기저기 야트막한 구릉도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온갖 형상의 대형 조각 작품들이 각자의 모양을 한껏 뽐낸다. 이곳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 전문 미술관, 스톰 킹 아트센터다. 미술관에는 꼭 지붕이 있어야 하나. 스톰 킹은 미술관에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곳이다.

    ‘스톰 킹’이란 이름은 인근 스톰 킹 산(Storm King Mountain)과 스톰 킹 주립공원(Storm King State Park)에서 따왔다고 한다. 야외이지만 이곳은 조각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술관이지, 정원이나 공원이 아니다. 대자연 속의 조각 전시장이고, 조각 들판(sculpture landscape)이다.



    이곳 조각품은 대부분 건물 3, 4층에서 10층 이상 높이의 대형 사이즈여서 실내 전시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엄청난 작품 사이즈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작품에 걸맞게 전시 공간도 광활한 대자연이고, 작품들은 그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완벽한 야외 조각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워낙 넓기 때문에 트램을 타고 한 바퀴 돌아야 전시장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트램을 타고 멀리서 작품의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한 후, 걸어서 작품 가까이로 다가가 다양한 각도에서 다시 보면 사뭇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본관 건물에서 트램 광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테라스로 들어서보자. 발아래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집채만한 대형 조각물이 여기저기 우뚝우뚝 서 있는 광경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엄청난 규모의 야외 미술관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일까. 그 방대한 구상과 추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설립자는 쇠못 회사 사장

    스톰 킹 아트센터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옥덴(Ralph E Ogden)과 스턴(Peter Stern)이다. 이들은 재벌은 아니고 알찬 중소기업을 운영한 지방 부호였다. 스톰 킹은 작은 부자도 큰 미술관을 만들 수 있다는 증거다. 면적으로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관일 것이다.

    옥덴은 마운트빌에서 ‘Star Expansion Company’라는 쇠못 제조회사를 운영했다. 각종 나사못, 너트, 볼트 등을 생산하는 회사인데, 쇠못 회사 사장이 철제 조각품 전시장을 만들었다는 게 우연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스턴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인텔리로 젊은 시절 국무장관을 꿈꾸며 워싱턴 DC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옥덴의 사위가 된 인연으로 스톰 킹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됐다. 실제 국무장관이 된 사람은 그의 대학 동기동창인 헨리 키신저였다.

    1956년 옥덴은 돈은 충분히 벌었으니 이제부터는 돈 쓰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사위 스턴을 불러들여 사업을 맡기고, 자신은 돈 쓰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미술품 수집과 미술관 설립이었다. 하버드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한 스턴 역시 이 일이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스톰 킹 중앙의 높은 언덕에 서 있는 본관은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마치 유럽의 고성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건물은 실내 전시관이다. 여기에는 사이즈가 작은 작품과 바깥에 전시된 대형 작품의 미니어처 등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창문을 통해 야외 전시장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훨씬 더 운치가 있다. 1935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버몬트 해치(Vermont Hatch)라는 부호의 저택이었다. 옥덴의 친구였던 그는 이 건물과 그 주변 부지를 옥덴재단(Ogden Foundation)에 기꺼이 팔았다. 이렇게 미술관으로 가는 길이 하나씩 갖춰졌다.

    1960년 옥덴은 허드슨 강 계곡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위해 조그마한 미술관을 만들었다. 옥덴의 미술관 사업이 정식으로 출발한 것이다. 1967년 옥덴은 추상표현주의 조각의 대가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1906~1965)의 작품 13점을 구입해 건물 밖에 전시했다. 그래놓고 보니 미술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를 시작으로 야외 전시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의 작은 미술관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스톰 킹 아트센터가 된 것이다.

    제대로 먹혀든 ‘선택과 집중’ 전략

    미술관이 개장된 1960년대는 이런 조각 미술관이 설립될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초대형 조각 작품들이 이때 막 출현하기 시작했고, 가격도 비교적 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 미술관이나 수집가들에겐 이런 대형 작품을 전시할 공간도 없고, 전시하려는 의욕도 없었다. 이런 시기에 옥덴과 스턴은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규모의 땅을 마련해 적은 돈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스톰 킹 아트센터가 탄생할 최적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설립자들이 처음부터 이런 대규모 전시장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만들다보니 오늘날의 모습이 된 것이다. 스톰 킹은 불과 30여 년 만에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발돋움하며, 조각 작품은 공원이나 미술관 정원에 장식물로 진열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스톰 킹은 기업으로 말하자면 성공한 벤처다. 조각이라는 ‘업종’ 선택도 기발했고, 그중에서도 대형 조각물에 집중한 것은 더 기발한 착상이었다. 사업에서 성공한 기업가 기질이 예술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스턴 역시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 유럽의 명화를 사려고 했으면 한 점도 못 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톰 킹의 자금원은 옥덴재단이었다. 재단의 운영과 미술관 경영은 스턴이 담당했다. 재단의 물적 배후에는 옥덴의 쇠못 회사 Star Expansion Company가 있었다. 1974년 옥덴이 사망하자 스턴이 장인의 지분을 물려받았고, 1980년대까지 이 회사는 스톰 킹의 주요 자금원 노릇을 했다. 아시아에서 값싼 쇠못이 쏟아져 들어오자 스턴은 1997년 회사를 매각하고 그 돈으로 미술관 운영에 더 공을 들였다.

    옥덴이 사망할 때까지 이 미술관 소장품은 모두 옥덴재단이 직접 구입한 것들이었다. 이후에는 스턴이 대형 조각품에 역점을 두고 수집했다. 그때부터 드넓은 벌판에 대형 작품이 하나둘씩 설치되기 시작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스톰 킹 아트센터의 주요 자금원은 옥덴/스턴 투자기금(Ogden/Stern Investment Fund)과 옥덴재단이다.

    용접공 출신 거장

    미국 추상표현주의 조각을 창시한 데이비드 스미스는 스톰 킹이 조각 미술관으로 명성을 날리게 한 주인공이다. 옥덴이 1967년 구입한 13점의 스미스 작품이 이 미술관의 ‘종자 작품’이기 때문이다. 옥덴은 이를 계기로 조각 전문 미술관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본관 건물 바로 옆에는 지금도 10점의 스미스 작품이 촘촘하게 전시돼 있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 196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들로 스미스의 예술적 특성이 매우 잘 드러난다고 평가받는다.

    스미스는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 오하이오 주로 이주해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스무 살 때 뉴욕으로 가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으며, 거기서 많은 작가와 교류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뉴욕 주의 북쪽 끝, 볼턴 랜딩(Bolton Landing)이란 곳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역시 조각가인 부인 도로시 데너(Dorothy Dehner)와 함께 작업에 몰두하면서 미국 추상표현주의 조각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옥덴은 볼턴랜딩으로 직접 찾아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스미스는 본래 그림과 공예를 공부했지만, 금속 용접에 재미를 붙이면서 조각가로 변신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차 제조회사에서 용접공으로 일했을 정도로 용접에 정통한 인물이다. 추상 작품을 주로 만드는 그는 조각 분야에서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철과 스테인리스를 용접해 작품을 만든 첫 조각가로도 인정받는데, 그전에는 거푸집을 만들어 청동주물을 찍어내는 조각이 대세였다.

    다섯 살 연상 도로시 데너와는 25년 결혼생활 후 이혼했고,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얻어 작품에 딸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스미스는 59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국의 유명 미술관은 거의 모두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스톰 킹은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 1933~ )의 전용 전시장이라도 되듯 남쪽 넓은 벌판의 아주 좋은 위치에 그의 대형 작품 5점을 설치하고 있다. 어느 것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대작들이다. 작품명을 나열하자면 ‘Mother Peace’ ‘Mozart‘s Birthday’ ‘Pyramidian’ ‘Frog Legs’ ‘Neruda‘s Gate’ 등이다.

    본관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이 작품들은 각기 개성이 뚜렷하다.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추상 작품 역시 작가 나름의 의도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관람하는 이들은 꼭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자기 나름대로 감상하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이런 것이 추상 작품의 매력이다.

    건물 10층 이상 높이의 작품도 있을 정도로 디 수베로의 작품은 거대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전체는 물론 부분 부분이 매우 섬세하게 다듬어졌다. 거대한 철골이지만 균형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스톰 킹이 아니었다면 이런 거대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을까.

    허드슨 강 계곡의 ‘조각 파라다이스’

    행위예술가이자 조각가 장후안의 ‘Three Legged Buddha’



    허드슨 강 계곡의 ‘조각 파라다이스’

    이사무 노구치의 ‘Momo Taro’.

    디 수베로는 이탈리아인인 부모가 무슨 연유에선지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해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상하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1942년 가족 모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미국인이 됐다. 디 수베로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추상표현주의가 만개하던 뉴욕으로 옮겨가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크게 다쳤는데, 재활 중에 용접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고는 철 조각 여러 개를 용접으로 꿰맞춰 대형 조각품을 만들어냈다. 워낙 대작이다보니 장거리 수송이 어려워 뉴욕에 거주하면서도 뉴욕 인근 롱아일랜드와 캘리포니아, 프랑스 등에도 작업장을 갖고 있다. 디 수베로의 작품은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널리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에 디 수베로의 대형 작품이 설치돼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알렉산더 리버먼(Alexander Liberman·1912~1999)의 ‘Adonai’와 ‘Iliad’도 눈길을 끄는 대작이다. 새파란 잔디 위에 주홍색 대형 작품이 기막힌 색채 조화를 이룬다. 이 두 작품은 커다란 철골 원통으로 만들어져, 마치 제분공장이나 정유공장의 일부 같다. 이런 것도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경이롭다. 워낙 규모가 커서 스톰 킹 아니고는 작품을 설치할 곳도 없을 것 같다.

    산업폐기물로 작품 제작

    리버먼은 조각가일 뿐 아니라 잡지사 편집인, 출판업자, 화가, 사진가 등으로도 활동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인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레닌 정부의 자문관이었는데, 1921년 레닌과 정치국의 허가를 받아 9세 아들을 영국 런던으로 유학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리버먼은 서구 자유주의를 맛본 뒤 러시아 사회주의에 등을 돌렸다. 파리에서 그는 정치적 망명가로 살았다. 1941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미국으로 탈출했다. 출판업에 종사하다 마흔이 넘은 1950년대에 와서야 조각에 몰두했다.

    리버먼은 산업폐기물에서 철골 연통을 끌어모아 작품을 만들었다. 여기서 발전해 철골 원통으로 대형 조각 작품을 만드는 개성 넘치는 예술 세계를 열어나갔다. 그런 그의 작품이 스톰 킹에 전시돼 있다. 역시 ‘뮤지엄 산’에도 리버먼의 대작이 미술관 입구에 아치처럼 설치돼 있다.

    본관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는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1904~1988)의 ‘Momo Taro’(1978)라는 작품이 설치돼 있다. 무려 40t에 달하는 9개의 돌로 1년에 걸쳐 만든 거대 조각 작품으로 노구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스톰 킹은 노구치에게 2년간이나 간청한 끝에 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구치는 이미 최고의 작가로 군림하던 터라 너무 바빴고, 스톰 킹은 아직 유명 미술관이 아니었다. 스톰 킹은 설치장소와 설치방법 등 노구치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며 가까스로 그의 승낙을 얻어냈다. 하지만 막상 작품이 설치된 후에는 노구치가 스톰 킹을 매우 좋아하게 돼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Momo Taro’는 이사무 노구치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표현하듯 대형 돌 조각이 매우 난해하게 널린 작품이다.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인생역정에는 20세기 초반 동서양의 관계, 동양 지식인의 고뇌, 예술가의 자유분방함, 애틋한 모성애 등이 녹아 있다.

    노구치의 파란만장 인생사

    이사무 노구치는 100여 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일본인 시인과 미국인 여성 소설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다. 말하자면 미혼모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노구치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아닌 ‘워싱턴포스트’의 여기자와 결혼을 약속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여기자는 이사무 노구치의 출생 사실을 알게 돼, 일본으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파혼해버렸다. 아버지는 노구치의 어머니에게 두 살 된 노구치를 데리고 일본으로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이 제의를 거절했으나, 1907년 마음을 바꿔 아들을 데리고 요코하마로 갔다. 세 살에 처음 아버지를 만난 노구치는 아버지로부터 용기(勇)라는 뜻을 가진 이사무(Isamu)란 이름을 받았다.

    노구치의 아버지는 게이오대 교수를 지낸 당대 최고의 지식인 노구치 요네지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일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도 아버지와 살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 1912년 딸을 하나 낳았다. 이 여동생은 훗날 미국 현대무용을 전공, 일본에서 크게 이름을 날린 무용가가 됐다.

    허드슨 강 계곡의 ‘조각 파라다이스’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공정거래정책 허와 실’‘한국의 그림가격지수’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노구치에게도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이를 간파한 어머니는 그 재능을 연마시키려 많은 노력을 했다. 1917년에는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사했고, 이듬해에는 아예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918년 노구치는 혼자서 미국 인디애나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코네티컷으로 옮겨가 도제식 수업을 받았다. 1923년에는 어머니도 일본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 그리고 노구치를 도왔다. 노구치는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길로 들어섰고, 마침내 미국 조각계의 거물이 됐다. 그는 돌로 대형 조각을 만드는 조각가로 자신의 입지를 찾았다. 뉴욕의 롱아일랜드에는 노구치 미술관이 있다.

    스톰 킹 아트센터는 야외라서 계절마다 느끼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단풍이 빨갛게 물든 가을에 찾아갔는데, 나의 필력으로 그 아름다움을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해마다 4월 1일 재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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