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시에 일어나건 관계없는 사람
- 단 하루라도 저기서 일하고 싶다
- 참담했고 피폐했고 절망했다
사업이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고, 하고 싶은 열망도 강했다. 인터넷과 관련된 일이었는데 여러 전문가가 “괜찮은 아이템이네”라고 칭찬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공동 창업했다. 그렇게 1년9개월간 청년 사업가로 별다른 삶을 살았다.
“창업하는 남자랑 만나지 말래”
결론적으로 나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창업 연어’가 되지 못했다. 불안정한 현실에, 불확실한 미래에, 월 20만~30만 원의 턱없이 적은 수입에 버텨내지 못했다. “아빠가 창업하는 남자랑은 만나지 말래”란 여자친구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기업가 정신’을 들먹거리며 여자친구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사업을 하면서 ‘세상사람 1000명 중 999명은 평범한 일상을 동경한다’는 걸 알게 됐다. 창업 초기 스스로 ‘배포 있는 꿈을 꾸는 1인’이라며 우쭐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범하지 않은 1인’이라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창업이라는 고된 길을 계속 걸을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2014년 찌는 듯한 여름, 결국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진심으로, 나는 ‘취업시장에서 잘 팔릴 신상’인 줄 알았다. 기업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문과계열이고 변변한 자격증도 없지만, 근 2년간 회사를 키워낸 경력으로 밀어붙이면 될 줄 알았다. ‘도전 정신’ ‘실무형 인재’… 이런 식으로 인사담당자에게 어필하지 뭐,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나는 무려 60곳이 넘는 회사의 입사시험에서, 그것도 모두 서류전형에서 무참히 탈락했다. 혹여 서류전형 합격 메시지가 올까, 오매불망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었건만, 기다리는 문자는 오지 않고 엉뚱하게 대출 광고 문자만 왔다. 내 삶은 점점 피폐해갔다. 현실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면접 보러 와달라는 몇몇 회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나는 매년 가을을 기다렸다. 가을은 ‘희망이 담긴 건전한 공허함’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3, 2014년 가을은 내게 절망 그 자체였다. 나는 ‘10시에 일어나건, 12시에 일어나건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취업 전패’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심리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슬픔이라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자격증 시험 학원과 토익 학원에 등록했다.
각종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던 중 친구가 코엑스에서 진행하는 ‘2014 외국인 투자기업 채용박람회’에 가자고 했다. 박람회가 도움이 될지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가보기로 했다. 박람회를 위해 3일에 걸쳐 참가기업 리스트를 뽑아 분석했고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국·영문으로 준비했다. 자신을 소개하는 말도 다듬었다.
“지원 불가입니다”
박람회는 취업준비생으로 인산인해였다. 7대 3으로 여성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여성은 면접을 위해 면접 화장을 따로 받는다고 했다. 아침부터 비싼 메이크업을 받고 박람회에 참여했다고 하니 왠지 더 절실해 보였다. 그러나 나 또한 그들처럼 취업이 절실했기에 남보다 두 배로 박람회장을 돌아보자고 결심하고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평소 관심이 있던 소프트웨어 판매 회사의 부스로 향했다. 그 회사는 소프트웨어 영업 직원을 채용하고 있었다. 나는 창업기간에 IT 관련 영업을 했기에 해당 직무에 자신 있었다. 채용 담당자와의 긍정적인 대화를 고대하고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이라고 합니다. 이력서 드리겠습니다.”
담당자는 내 이력서 곳곳에 밑줄을 치기 시작했다. 주로 학과, 영어 성적, 경력 사항에 표시를 하는 것 같았다. 담당자가 이력서를 검토하는 동안 ‘우리 회사를 평소 알고 있었나요?’ ‘우리 회사 제품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나요?’ 같은 질문을 할 거라 생각하고는 준비한 답변을 되뇌었다.
그러나 담당자의 첫마디는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 님은 지원 불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충격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 회사 제품이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에 공대 출신만 뽑는다는 것이었다. 약간 열이 받쳤다. 그리고 이력서의 경력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저는 문과 출신이지만 졸업 후 IT 관련 영업을 했습니다.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 없었지만 저 나름대로 먹고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IT 관련 공부를 했습니다. 이 회사는 공대 출신 신입이 들어온다고 교육 안 합니까? 저도 교육 받을 수 있고 똑같이 배워서 소프트웨어 영업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열린 한 채용박람회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렸다.
“창업을 한 것으로 보아 도전정신이 대단한 것 같네요. 그러나 기업에서는 ‘이 사람을 채용하면 또 창업하겠다고 나가버리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합니다. 그래서 창업은 기업 처지에서 그리 구미가 당기는 경력이 아닙니다. 입사한 뒤 힘들어도 버티고 안 나갈 사람을 뽑습니다. 자기소개서에 그런 점을 어필해야 합니다.”
그는 상담 후반부에 “정식으로 이력서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덧붙여 “문과 출신 채용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박람회에 참여해 얻은 소기의 성과였다. 나는 그를 통해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이력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까지 듣게 됐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날 상담을 받은 다른 몇몇 기업에서도 추천을 받았고 실제 면접을 진행하기도 했다.
가을이 지나갈 때쯤, 나는 만족할 만한 어학 성적을 손에 쥐었다. 한국사 등과 관련한 자격증도 취득했다. 상시 채용하는 기업의 문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몇몇 기업에선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여의도 카페로 ‘출근’
그 무렵 2년째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와 붙어 다녔다. 우리는 주로 여의도에 있는 카페에 ‘출근’해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자기소개서를 썼고 면접을 준비했다. 여의도의 밤은 황홀했다.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저마다 ‘미생’의 불빛을 뿜어냈다. 그걸 보며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저기서 일하고 싶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또한 여의도 직장인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도 추레한 청바지 대신 멋진 양복을, 허름한 백팩 대신 반듯한 가죽 서류가방을 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같은 처지의 친구와 서로 의지하며 취업준비생의 겨울나기를 준비했다.
2014년 첫눈이 내릴 때쯤 나는 두 회사에서 서류전형 합격 전화를 받았다. 한 곳은 전에 했던 사업과 같은 분야의 외국계 A사였고, 다른 한 곳은 정말 가고 싶었던 외국계 B사였다.
A사는 전화 온 지 2주일 만에 최종면접을 볼 수 있었다. B사는 최종면접 여부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면접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A사에서 ‘합격’ 통보가 왔다. ‘아~합격.’ 나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B사의 결과가 남아 있어 마냥 기뻐할 수만 없었다.
이어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A사에 가서 내가 잘하는 일을 할지, 이를 포기하고 B사 입사에 올인할지 말이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A사에 ‘입사하겠다’고 말하고, B사 면접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만큼 취업이 어려우니 들려주는 조언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 A사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다. 결국 A사에 전화해 입사 포기 의사를 전했다. 전화한 지 4시간쯤 지났을까. B사에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B사 인사과입니다. 최종 면접 관련해 전화드렸는데요. ○일 ○시 괜찮으세요?”
최종 면접은 3일 뒤였다. 나는 B사를 위해 A사를 포기한 터라 B사 최종면접이 정말 절실했다. 어떻게 말해야 면접관이 나를 뽑아줄지 수천 번 고민했다. 3일 동안 모범 면접 답안을 찾아보는 대신 ‘나는 누구인가, 왜 B사에 입사해야 하는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무엇이 단점인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따위의 속 깊은 문답을 나 자신과 나눴다. 면접 때 어떤 열정, 진정성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대망의 최종면접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면접이 거의 끝나갈 무렵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면접 책을 보고, 취업 카페에 가서 면접 모범 답안을 외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중간은 갈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냥 제가 어떤 사람인지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면접에 대한 답변이 투박하진 않았는지 걱정되긴 합니다. 하지만 고민하면서 내린 자신 있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이 회사에 정말 간절하게 입사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B사의 인사담당자는 3일 뒤 최종 결과를 알려준다고 했다. 나는 3일 뒤에 있을지 모르는 ‘탈락의 충격’에 대비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다. 그렇게 통보 일이 다가왔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왠지 불안했다. 하늘과 땅을 덮은 하얀 눈은 마치 고은의 시 ‘눈길’의 눈만 같아서, 고통을 정화하는 듯싶었기 때문이다. ‘최종 탈락의 고통을 눈으로 덮으라는 뜻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전화를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학 도서관을 찾아 책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나인 투 식스!’ 직장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한다.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인사과 직원들이 6시에 퇴근해버리면 나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1분, 1분 시간이 지나가는 게 피를 마르게 했다. 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휴대전화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답답함에 밖에 나가 연거푸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6시는 다가왔다. 어머니에게 전화해 “모든 게 하늘의 뜻인가 보다”고, “다 더 잘되려고 이번에 안됐나 봅니다”라고 말했다. 밀려오는 먹먹함을 달래고자 카페에 갔다. 점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요”라고 말하는 순간 전화가 왔다. 휴대전화 화면에 뜬 번호는 B사의 번호였다. 인사과 직원은 내게 최종합격을 알렸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는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하염없이 울었다는데 나는 눈물도 안 나왔다. 그저 B사가 너무 고마웠다. 모든 게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그날은 그간 느꼈던 설움을 뒤로한 채 같이 취업 준비한 친구와 한잔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희열을 그날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한 위로는 ‘최종합격’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고 있다. 4000만 원대 초봉, 명함, 양복, 서류가방이 자랑스럽다. ‘신입사원일 때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을 배운다.
가끔 취업 준비하던 시절을 돌아본다. 그러면 다시 마음이 요동친다. 그만큼 그 시절이 힘들고 잔인했다. 나는 취업준비생들의 처절함과 참담함을 안다. 특히 문과계열 졸업생들이 얼마나 막막해하는지 안다.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란 ‘최종합격’이다. 그다음으론 ‘같이 고생하는 친구들’일 것이다. 나는 감히 그들에게 힘내라는 어설픈 위로를 전할 수 없다. 그 처참한 심정이 이해가 돼 가슴이 아프다.
얼마 전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다, 옆 테이블의 중년 신사가 “요새 청년들 취업이 어려운 이유가 대기업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분에게 ‘요새 중소기업 들어가기도 어렵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는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그만큼 문과계열 졸업생의 취업이 어렵다. 청년을 위한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겨 많은 취업준비생이 최종합격으로 위로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