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는 도덕성과 혁신으로 좌파에 맞서야
- 중국은 北 돕는 적국(敵國)…견제하면서 사귀어야
- 일본 역할 없었다면 ‘김일성 왕조’ 지배받았을 것
- 자유주의로의 첫 전향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
- 글로벌 대기업에 애국심, 민족주의 요구하지 말라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글 쓰는 데 쓸란다. 한번 입원하면, 다시 책을 쓰기는 어려울 거다. 암 치료 받기 시작한 작가들 결국 소설다운 소설 못 쓰고서….”
“그래도 아빠, 일단 살아야 하잖아? 그럼 우린 어떡해. 아빠가 치료도 안 받고 그냥….”
복씨가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에 나오는 부녀(父女)의 대화다. 실제 얘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2012년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2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건강해 보였다. 치료 대신 글쓰기에 몰두한다. 그를 두고 말과 행동, 겉과 속이 같다고 평가하는 이가 많다. 2014년 자유인상, 시장경제대상을 수상했다. 글자 그대로 자유주의 전도사다.
인터뷰 내내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느껴졌다. 질문마다 강렬하면서도 담백하게 답했다. 그는 민족사회주의가 자유주의의 적(敵)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유주의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외의 다른 길은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가진 자유주의 이데올로그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국가미래전략을 들었다.
‘태백산맥’의 부정적 측면
▼ 소설가이신 만큼 소설과 관련한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8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입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결합하면서 이른바 486세대가 좌파적 역사·사회 인식을 공고화하는 데 적지 않은 구실을 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작품의 영향력이 큰 것만은 분명합니다. 문학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은 없으나 부정적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까지 좌파의 행위를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좌파는 온갖 모략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했습니다. 전쟁 때는 대한민국을 침략한 북한을 도왔고요. 좌파가 한 일이라도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다루면 문제 될 게 없으나 대한민국에 살면서 글 쓰는 작가가 좌파의 잘못된 행동을 미화해선 안 됩니다. 조정래 씨는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좌파를 미화했습니다. 편향이 있더라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드러나면 괜찮지만 ‘태백산맥’은 그렇지 않다고 봐요.
‘태백산맥’을 보면 좌파는 하나같이 사려 깊고 인정 많은 데다 꿈을 가졌습니다. 반면 우파는 이익만 따지고, 지조가 없으며, 무자비합니다. 좌파를 미화하기만 한 게 아니라 우파를 폄하한 것이지요. 요컨대 ‘태백산맥’은 소설문학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과 관련해 ‘양(量)’은 많지만 ‘대본’이 되기엔 약합니다. 조정래 씨가 초기에는 좌파적 작품을 쓰지 않았습니다. 좌파에서 작품에 열광하니 점점 끌려들어가 우파를 비난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는 최근 첫손에 꼽히는 베스트셀러입니다. 100만 부 넘게 팔려나갔습니다. 중국을 기회의 땅,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묘사합니다. ‘지금 당신은 미래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는 광고 문구가 붙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이 중국에 대한 환상을 확산하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반미를 강조해온 일부 486세대가 최근 중국에 경도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요.
“그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내용이 담겼다면 경계해야 할 겁니다. 전체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좌파 지식인이 지닌 치명적 결함이 경직성입니다. 삶을 절충적으로 보지 못해요. 대한민국 건국을 폄하하고 미국을 싫어하다보니 중국에 지나친 호의를 보이는 관념적 문제가 조정래 씨 등에게서 나오는 것 같은데, 중국은 우리를 참으로 곤혹스럽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웃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개인은 이사를 가면 되지만 나라는 그러지 못합니다. 이웃 나라가 강해지면 예전에는 침략이 일어났습니다. 현재도 어떤 형식으로든 압박받을 수밖에 없어요. 지정학적 조건은 잘 안 바뀝니다. 변화한 것 같아도 한국과 중국 사이의 근본적 문제, 한쪽은 크고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작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큰 나라는 지배하려 하고 작은 나라는 살아남으려 큰 나라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게 본질적 상황인 것입니다.
중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주장은 한쪽 면만 본 것입니다. 물론 기회일 수 있죠. 그러나 기회로 만들 때 우리가 치를 대가도 큽니다. ‘정글만리’는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넓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접근한 것 같은데, 중국의 부상(浮上) 탓에 압박받는 상황도 드러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中 먼저 간 것, 섣부른 결정”
▼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한중관계는 광복 70년 역사에서 가장 우호적인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미래전략, 통일전략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중국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 한중관계와 관련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합니다.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중관계가 과연 우호적인가요? 중국은 북한을 두둔합니다. 후견인 노릇을 자처하면서 북한 정권이 지탱하도록 도와줍니다. 세계 무대에서 평양을 옹호하고요. 남북 간의 사생결단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외적 환경입니다. 북한을 두둔하는 나라는 우리와 우호적일 수 없습니다. 중국이 강해지는 데다 경제적 의존이 커지니 친화적으로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중국이 북한을 돕는 적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중관계가 우호적이라는 것은 물결 같은 것일 뿐입니다. 바다는 그대로 있는데 물결 하나가 친다는 얘기예요.
박근혜 정부의 결정적 실책은 중국을 챙기느라 한미관계에는 소홀한 것 아니냐는 인상을 준 점입니다. 미국은 노무현 정권의 반미 정책에 충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공식적으로 발표한 글에서 한국을 베트남보다 아래에 뒀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관계를 복구해놓았는데, 현 정부가 중국에 편향된 태도를 보인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실수입니다. 중국 인사들에게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미국이라고 얘기하지 않은 것도 실책입니다. 미국이 섭섭하게 여겼겠으나 미국과의 관계는 괜찮습니다. 6·25전쟁 때 수많은 미군이 전사했습니다. 실책이 있더라도 혈맹을 강조하면서 대화하면 풀리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한일관계예요. 한국 대통령이 취임한 후 해외 방문 순서가 전통적으로 미-일-중-러였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덜컥 일본보다 중국에 먼저 갔습니다. 외교는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일본은 기분이 몹시 상했을 겁니다. 일본 덕분에 우리나라가 살아남았습니다. 6·25전쟁 때 일본의 역할이 없었다면 북한에 점령돼 지금껏 김일성 왕조 지배를 받았을 수도 있어요. 당시 일본 물자를 공급받아서 북한과 싸운 겁니다. 지금도 일본의 중요성은 여전합니다.
차기 대통령은 일본에 먼저 갈까요, 중국에 먼저 갈까요. 일본을 먼저 방문하면 중국이 불쾌해할 공산이 큽니다. 중국인 관광객만 덜 와도 GDP(국내총생산)가 줄어드는 게 현실입니다. 서울 제주도뿐 아니라 상당수 지방도시의 소매업이 중국 관광객에 의존합니다. 또 중국을 먼저 방문한다? 일본은 ‘한국이 우리를 격하하기로 결심했구나’ 여기겠죠. 딜레마입니다. 대책이 없어요. 박근혜 정부가 중요한 일을 섣부르게 결정해버린 겁니다. 내가 사석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대놓고 맹비난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더라도 우리 대통령은 미국-일본-중국 순서로 방문하는 게 맞습니다. 중국 쪽에서 ‘베이징에 먼저 와달라’고 부탁하게 해야 합니다. 강국과 작은 나라 관계는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건, 한국 정부가 중국에 스스로 진상한 꼴이에요. 외교장관이 한심한 행동을 한 겁니다. 외교관들에게 물어봤더니 윤병세 장관이 ‘디테일 제왕’이라고 해요. 시시콜콜한 거 잘한다는 거예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에서 국빈으로 환대받는 등 겉모습은 좋았죠. 박 대통령도 디테일에 강한 분 아닙니까. 약점은 큰 것을 보는 데 약하다는 것이고요.”
한국과 베트남의 ‘다른 역사’
▼ 미국은 한국이 친(親)중국으로 갈 것을 우려하는 듯합니다. 안보관계 신뢰도에서 베트남보다 한국을 낮게 보는 듯한 징후가 최근에도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원자력과 핵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워싱턴은 2014년 초 체결한 미국-베트남 간 원자력협정에서 베트남의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했습니다. 한미 간 협상도 진행 중인데 베트남과 비교해 재처리 조건을 더 까다롭게 해서 허용하는 쪽으로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국가 미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베트남의 차이를 잘 압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실패한 이유를 살펴보면서 역사 공부를 제대로 했습니다. 베트남은 3000년 동안 중국과 싸워온 민족입니다.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복거일 씨는 도덕이 허물어지면 아무것도 새로 세울 수 없다고 강조한다.
▼ 중국과 베트남은 1979년에도 전쟁을 했지요.
“조선뿐 아니라 고려, 신라, 고구려도 중국을 향해 칭신(稱臣)을 했습니다. 연개소문이 당 태종과 싸울 때도 외교문서에서 스스로를 ‘신(臣)’이라고 했죠. 우리는 중국에 거스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워싱턴이 그 점을 잘 아는 겁니다. 중국이 더욱 강해져 동아시아를 뒤덮을 때 한국은 중국에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베트남은 절대로 안 끌려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역사는 무시하지 못합니다. 경로(經路) 종속적이에요. 우리와 베트남은 걸어온 길이 다릅니다. 미국이 중국과 관련해 베트남을 신뢰하는 데는 이렇듯 근거가 있습니다.”
약한 민족의 피해의식
▼ 지난해 한국과 중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습니다. 사회·경제·안보에 큰 영향력을 미칠 일대 사건입니다. 중국의 대학교수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중국 쪽 협상 팀에 조공(朝貢)무역을 전공한 역사학자도 포함됐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은 행정 실무 관료와 경제 전문가만 참여했고요. 한중 FTA가 대한민국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봅니까.
“흥미로운 대목을 지적했습니다. 중국인은 역사적 맥락에서 현재의 일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중국 문명은 고대 문명 중 전통이 단절되지 않은 유일한 사례예요. 한자로 이어진 상나라 갑골문자를 아직도 사용합니다. 2500년 전 공자 맹자 순자 노자 한비자를 지금껏 우리가 읽습니다. 중국인은 이 같은 고대 문명을 이어받은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처럼 논리적인 역사서를 펴낸 고대 문명은 없어요. 본기와 열전을 결합한 기전체는 지금도 훌륭한 역사서 양식이죠.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남송이 몽골에 멸망당할 때 수도를 지키던 태수가 몽골군이 몰려오자 성문을 열면서 ‘나라는 망해도 괜찮지만, 역사서는 불타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역사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겁니다. 동북공정, 동서공정 같은 것도 중국의 전통에서 비롯한 거예요. 그러니 베이징의 전략가들이 한중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땠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얼마 전 중국의 유력 기관 책임자가 공식석상에서 중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는 역사적 고려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중심의 조공외교가 존재했으니 국제 교섭 때 그것을 반영해 중국이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힘을 가졌으니 힘을 쓰겠다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미국은 힘을 사용하면서도 ‘호혜’라고 표현하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요.”
▼ 삼성은 한국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기업집단입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중국 시안에 한국 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75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 등을 지었습니다. 다른 대기업의 대(對)중국 투자 또한 늘고 있습니다.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려 존재합니다. 세계성의 시대예요. 글로벌 기업이 이익을 찾고자 큰 시장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크라이슬러가 독일에 넘어가고 소니가 미국의 유명한 건물을 구입해도 미국인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일각에선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을 사는 것을 문제 삼던데, 그들도 돈 주고 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약한 민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피해의식 비슷한 것을 가졌습니다. 기업은 좋은 제품을 가장 싼 가격에 공급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공장을 짓는 게 유리하죠. 중국 투자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주주 구성은 물론이고 생산시설이나 매출 등도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로 아주 낮습니다. 로컬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회사예요. 이런 현실에서 한국 기업은 영원히 한국인, 한국 법(法)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국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비현실적입니다.
다만 마음이 어두운 것은, 북한이 개성공단의 우리 기업들을 볼모로 여기듯 하는 것처럼 향후 중국 정부가 한국 기업의 목을 조를 수단을 갖게 돼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중국이 재산권이 완전히 보장된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찜찜하고요.”
우리가 중국에 힘 쓰려면…
▼ 2009년 12월, 일본 집권 민주당 간사장이던 오자와 이치로 씨가 140여 명의 의원, 경제사절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일관계가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듬해 희토류 분쟁 등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해 이후 인도, 아세안 등과의 협력을 대폭 확대해가고 있습니다. 일본이 리밸런싱(rebalancing)에 나선 듯한 양상이에요. 반면 한국은 대중 무역 의존도가 수출에서 26%를 넘어섰고, 한중 무역 규모는 한미·한일 무역을 합한 것보다 큽니다. 이 같은 경향은 한중 FTA로 인해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리와 일본은 사정이 다릅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10배가량 큰 나라예요. 중국을 하나의 옵션으로 여길 수 있지만 우리는 작은 나라라 옵션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은 시장이 작은 데다 노동조합 탓에 기업을 하기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삼성이 뭘 한다고 하면 무조건 막고 나서는 세력이 존재합니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삼성전자 공장을 경기도에 유치하려 애쓰다 포기한 것으로 압니다. 글로벌 회사는 민족주의, 애국심 따지면 안 됩니다.”
복거일 씨는 포퓰리즘을 막으려면 의원내각제보다 대통령제가 낫다고 여긴다.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우리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아요. 우리가 레버리지를 갖지 못해서입니다. 핵무기는 사실 우리 정부 힘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가 중국 레버리지를 잘 활용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보다 중국에 먼저 가서 미국과 소원해지고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했어요.
우리가 중국에 힘을 쓰려면 우리의 역량, 동맹국 미국의 힘, 일본과의 관계를 합쳐야 합니다. 만약 한미관계가 긴밀하지 않고 한일관계가 최악이면 중국이 우리를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중국을 움직이려면 대일관계 개선이 필요합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7월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 기지에서 미국 해병대가 출정하려면 일본 정부 양해를 얻어야 한다’고 한 것은 일종의 협박입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안보도 고려해야 합니다. 국민이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해요. 한일관계에서 대담하게 나가면 좋겠습니다.”
“촛불 하나로 세상 못 밝혀”
▼ ‘자유주의대상’ 수상 연설문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선생께서 연설문에서 언급한 분류에 따르면 중국은 ‘민족사회주의’ 국가라고 하겠습니다. 486세대 가운데 민족사회주의에 대한 향수 혹은 정서를 가진 이가 적지 않습니다.
“이념을 바꾸는 게 힘듭니다. 순교자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자유주의의 실상을 끊임없이 얘기해줘야 생각을 되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첫 전향자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 동유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대통령의 참모들은 자유주의를 못 깨우쳤는데, 대통령만큼은 실상을 깨달은 겁니다. 제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위대한 분이다’ ‘통찰력이 있다’고 얘기해온 건 그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당신은 왜 못 보느냐’고 짜증을 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촛불을 하나 켜놓으면 놀랍게도 10리 밖에서도 보입니다. 하지만 촛불 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옳은 생각을 가졌다고 세상을 밝힐 수는 없는 거예요. 촛불 하나로 세상의 어둠을 거둬내려는 것은 지적 오만이에요. 촛불의 수가 늘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무임 승차자가 많은 게 문제입니다. 기업이 좌파 시민단체에 돈을 대줍니다. 기업이 작은 이익을 구하다 큰 이익을 놓치는 것이죠. 무임 승차자가 하루빨리 실상을 깨우치는 게 국가 미래와 관련해 중요합니다.”
▼ 선생은 민족사회주의를 극복하는 이념으로 자유주의를 제시합니다. 자유주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이사야 벌린은 조국 이스라엘의 역사적, 지정학적 조건을 고민하면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제안했습니다. 주지하듯, 민족주의는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습니다. 민족과 관련한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할 때 자유주의만으로는 답을 주는 데 한계가 있을 듯싶습니다. 벌린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 관련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벌린은 자유주의를 깊이 고민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나 역시 그에게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알게 모르게 그분 생각을 따르지만,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념보다는 정신,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 억압받을 때 유효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는 자유주의가 민족주의 형태로 발현한 거예요. 광복 직후 ‘민족진영’ ‘공산진영’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자유진영’이라는 말 대신 ‘민족진영’이라고 한 것이죠.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민족주의가 아닌 박애주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유주의 사상가 하이예크가 말한 대로 전체주의는 특정한 계층과 결합해 인간이 보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늘 국제주의를 주장했으나 러시아만 보더라도 실제로는 자기 민족만 따졌습니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민족이라는 낱말에 대한 본능적 친밀감을 오히려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은 도덕심”
▼ 한국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발전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삼아 성장했지만, 부패와 연결됐다는 오명을 얻었고 권력 획득을 위해 지역주의를 악용하는 행태도 보였습니다. 한국의 보수는 어떻게 혁신해야 할까요.
“어느 사회에나 보수가 있습니다. 정설(定說)을 지키려는 이들과 이설(異說)을 실현하려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한국의 오소독시(Orthodoxy·정설)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입니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오소독시인 반면 자유민주주의가 헤테로독시(Heterodoxy·이설)고요.
보수는 정설을 지키려는 태도 또는 세력을 뜻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정설로 삼았으니 보수는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정설보다 더 매력적인 이설이 나타나는 것도 막아야 하고요. 좌파는 보수가 부패, 무능하니 자기네가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보수는 그런 좌파에 대응해 더 나은 패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혁신이 필요하고요. 게임이론은 더 나은 카드를 내놓으면 체제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어떤 대안보다도 낫다는 게 증명됐습니다. 보수가 영원히 권력을 장악하는 게 옳습니다.
보수가 체제를 지켜낼 때 가장 필요한 게 도덕심입니다. 자본주의가 매정하다고 비판하는데, 인간은 도덕심 덕분에 서로 돕습니다. 세월호 사고도 단계마다 도덕심 없는 사람이 역할을 해서 발생한 겁니다. 도덕이 기본이라는 것을 ‘위’가 잘 모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저쪽 분이니까 논외로 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입에서 도덕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덕은 국제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약소국의 무기예요. 인민을 억압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을 대우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중국에 말해야 합니다. 우리 지도자가 도덕을 외쳐야 해요.”
▼ 자유주의는 국가의 간섭과 세금을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핵심 정책 기반으로 삼지만,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복지정책이 필요합니다. 복지와 관련한 질문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무상급식 등 좌파의 포퓰리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하나고, 자유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효율적인 복지정책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가 다른 하나입니다.
“포퓰리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바탕을 뒀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원숙해질수록 포퓰리즘이 강해집니다. 건국 시기에는 강고한 도덕적 바탕 위에 개척자 정신이 나타납니다. 정치가도 국가에 헌신하고요. 사회가 자리 잡으면 도덕적으로 나태해져 헌신적 정치가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혁명, 내전이 일어나면 기득권이 사라져 사회가 다시 자라납니다. 천둥, 번개가 산불을 일으켜 새로운 세대의 숲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죠. 사회를 고치자고 혁명, 내전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결국 도덕심을 높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제가 의원내각제보다 포퓰리즘을 막는 데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국회의원은 다음 총선에서 당선되는 게 최고의 목표입니다. 포퓰리즘에 젖어들기 쉬워요.
어떤 일이든 개선할 때는 혼란과 관련한 비용이 듭니다. 복지정책도 그렇고요. 고지에서 더 높은 고지로 이동할 때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까지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야 하기에 힘든 것 아닙니까. 시원한 방책이 없습니다.
복지정책과 관련해 가장 나은 것은 주류경제학이 강조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낙수효과)입니다. 돈은 부유한 사람으로부터 가난한 사람으로 내려오게 마련입니다. 돈 버는 사람은 돈 벌게 놔둬야 합니다.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 거기서 나온 재원으로 가난한 이를 도와야 하는데, 이런 견해가 사람들에게 잘 안 먹히잖아요.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