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低)유가. 남의 나라 일 같겠지만, 한반도 정치·경제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큰 변화다. 일각에선 ‘3차 석유전쟁’이라고 한다. 배럴당 200달러까지 치솟던 유가는 2015년 60달러 이하에서 형성될 전망이다. ‘에너지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 저유가는 한국과 주변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최근 6개월 새 국제유가는 반토막 났다.
2차 석유전쟁은 유가 인하였다. 1986년 사우디는 북해의 신규 유전에 대항해 산유량을 하루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5배 늘렸고 가격을 배럴당 10~20달러로 크게 낮췄다. 이후 세계 정치 경제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저유가로 소련이 붕괴됐다.
반면 한국, 대만 등 공업화를 추진한 개발도상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 호황기로 불리는 ‘3저 시대’는 바로 영국과 사우디 간 석유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값싼 연료에 기반을 둔 물류이동 활성화는 국가 간 분업화를 촉진하고 글로벌 시대를 이끌었다.
이번에 시작된 미국과 사우디의 3차 석유전쟁도 전 세계적 지각변동을 초래할 것이다. 특히 한국에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3차 석유전쟁’
저유가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공급 과다에 있다. 2010년부터 원유 탐사에서 큰 성과가 나왔다. 경제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육상 유전들의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이어 바닷속 사할린 유전, 브라질 심해유전에서 기름이 올라왔다. 2012년부터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셰일가스, 셰일원유, 샌드석유가 본격 생산됐다. 가장 주목되는 것이 미국의 셰일원유다. 생산량이 2013년 하루 384만 배럴로 급증했다. 시장으로 쏟아진 원유가 덤핑 처리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유업계에서는 하루 평균 200만 배럴 정도의 원유가 떠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2014년 초부터 선물시장에서 눈치 빠른 투기자본이 빠져나갔다. 한때 배럴당 200달러까지 치솟던 유가는 60달러까지 폭락했다.
가격이 떨어져도 새로 시장에 진입한 업자들은 생산을 중단할 수 없다. 이미 투자한 원금의 이자라도 벌기 위해선 한계생산비용 이하라도 유전을 닫아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석유산업은 만만치 않은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늘 부채에 시달리는 원유 생산업체들은 즉각적인 현금 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면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생산량을 계속 늘리려 한다.
미국 정유업계는 유가 하락에도 2015년 산유량을 42년 만에 최대치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신규 유전 개발은 주춤하겠지만 이미 파놓은 유전들은 상황이 다르다. 산유국들은 저유가를 감당하기 위해 생산량 증대라는 극단적 카드마저 불사한다. 세계 최대 석유생산국인 사우디도 ‘갈 데까지 가보자’며 덤핑 경쟁에 동참했다.
그렇다면 유가가 얼마까지 떨어져야 공급이 줄어들까. 아무도 그 수치를 모른다. 따라서 사우디와 전체 에너지업계는 치킨게임을 멈출 수 없다. 지난해 6월 유가가 고점 대비 50% 가까이 폭락했을 때도 미국 정유업계는 감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 셰일석유 생산단가는 배럴당 60~70달러에 집중돼 있다. 최근 생산성이 향상돼 배럴당 40~50달러에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 경우 증산이 불가피하다. 손실을 생산 증가로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 에너지부는 2015년 5월 미국의 산유량이 하루 평균 942만 배럴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는 1972년 이후 최대치다.
사우디는 60달러 수준에서도 원유가 계속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50달러, 40달러, 최악의 경우 20달러에도 원유를 공급할 계획이다. 이 경우 인위적 담합만 없다면 저유가는 1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 ‘에너지는 유한하다. 생산하는 데 드는 에너지 양과 생산되는 에너지 양이 비슷해지는 시점이 온다’는 에너지 피크 이론은 낡은 이론이 됐다. 투기세력이 섣불리 덤벼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유가 하락의 또 다른 원인은 석유 수요가 늘지 않은 데에 있다. 지난해 세계 원유소비량 증가율은 1.1%였다. 2015년엔 1% 미만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석유를 많이 쓰는 나라 중 미국만 경기가 회복 중이다. 일본과 유럽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중국도 고성장 국면에서 내려온다.
갈 데까지 가보자
지난 20년 동안 고유가는 세계경제를 유가절약형 체질로 바꿔놓았다. 자동차 연비는 지속적으로 개선됐다. 전기를 훨씬 적게 쓰는 LED 조명도 보편화했다. 선진국에선 고령화가 진행 중인데, 나이가 들면 에너지를 적게 쓴다. 컴퓨터 산업의 발전도 에너지 소비량을 줄인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폭락하면서 석유화학산업의 원료인 석유도 천연가스로 대체된다. 석유 수요가 증대할 만한 곳은 아프리카, 인도 같은 곳밖에 없다고 한다.
미국이 유가 하락을 즐긴다면 사우디는 전략적으로 유가 하락을 유도한다. 사우디는 셰일가스, 셰일석유 등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뒤처질 것을 우려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미국이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지난해 8월 미국의 산유량은 사우디와 거의 같은 수준이 됐다. 사우디는 미국으로의 원유 수출도 막혔다. 아시아 시장마저 미국에 의해 잠식당할 위협에 처했다.
사우디는 ‘국가적 주적’으로 떠오르는 셰일원유를 무너뜨리려 공급을 늘리고 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셰일원유의 생산단가가 자국산 원유보다 높다는 게 사우디가 믿는 구석이다. 반도체 전쟁과 마찬가지로 손해를 무릅쓰고 상대방을 몰락시키려는 것이다. 석유패권 전쟁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저유가가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 북한, 한국에 각각 어떤 정치적, 경제적 영향을 미칠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러시아의 경우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2차 석유전쟁으로 소련이 붕괴된 것과 같은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차 석유전쟁에서 링에 오른 선수는 사우디와 미국인데, 직격탄을 맞은 나라는 러시아다. 사우디는 아마 미국의 셰일회사들이 망할 때까지 저유가 정책을 지속할지 모른다. 실제로 일부 셰일회사가 도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망하는 곳은 러시아가 될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의 위기
사우디는 유가가 20달러 미만으로 떨어져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이미 감가상각이 끝난 유전들을 보유한 데다 70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외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산유국은 버텨내기 힘들다. 이미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이라크, 멕시코, 앙골라 같은 산유국은 재정위기에 직면해 통화가치가 급락했다. 이들 국가는 원유생산 감축을 주장하며 사우디와는 다른 길을 가려 한다. 그러나 생산 규모가 작고 시장지배력이 없기 때문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지난해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지역마저 넘보자 미국은 석유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했다. 미국은 경제제재 대상에 러시아 에너지 기업을 포함시켰다. 서방 에너지 기업의 러시아 유전 개발 참여 및 석유기술 이전을 금지했다. 그래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물러서지 않자 미국은 저유가라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던 러시아도 저유가 앞에서는 비틀거렸다. 환율이 폭락했고 신용등급이 떨어졌다. 러시아는 자국민이 일정액 이상의 루블화를 달러로 바꾸지 못하도록 했다. 러시아 경제는 이미 패닉 상태다. 저유가는 핵무기보다 더 강력하게 러시아를 파멸로 몰아갈지 모른다. 미국은 일부 자국 에너지 기업을 희생시키더라도 저유가를 지속할 충분한 이유를 찾은 것이다.
러시아에는 소련이 저유가로 망한 트라우마가 있다. 러시아는 세계 4위 규모인 419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부펀드를 만들어 산업 현대화를 추진하고 지역개발을 가속화했다. 저유가 폭탄은 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저유가 초기 국면에서 이미 1400억 달러의 손해를 봤다. 루블화 평가절하와 이자율 상승으로 경제위기 국면으로 진입했다.
국가예산의 약 60%를 원료 수출로 충당하는 경제 체질상 위기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유가가 95달러일 것으로 예상하고 2015년 예산을 책정했다. 그런데 유가는 60달러가 됐다. 2015년 예산에 구멍이 생겼고 성장률은 마이너스 5%로 추락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유가가 50달러, 40달러로 떨어지면 디폴트 상태로 갈 수도 있다.
고유가 상황에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실효가 없지만, 저유가 상황에서 경제제재는 러시아의 목을 조를 것이다. 러시아의 금융기관들은 이제 정부의 보증 없이는 서방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없다. 금융기관의 연쇄 부도 사태가 예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미국에 항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의 중산층이 어느 날 갑자기 극빈층으로 전락하든 말든 푸틴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푸틴은 “이 모든 불행은 오직 미국 탓”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선전은 러시아 국민에게 먹혀든다. 슬라브 민족은 고난의 행군에 익숙한 편이다. 더욱이 지금 러시아엔 푸틴을 대체할 만한 정치세력이 없으므로 그는 건재할 것으로 보인다. 죽어나는 건 러시아 국민이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돌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푸틴은 2015년 연두교서에서 크림 반도에 대해 “주권을 지키거나 세상에서 사라지거나”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다만 우크라이나 동부의 합병을 추진하는 데선 한발 물러설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치 않다. 러시아는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버텨보려 할 것이다.
살아난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경우 저유가는 경제 활황의 불쏘시개가 된다. 감세 효과를 내고 소비를 진작한다. 주택 가격은 저점 대비 30% 상승해 금융위기 직전 수준을 회복했다. 주가지수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매월 20만~30만 개의 일자리가 생겨나고 실업률도 크게 하락했다. 저유가 덕택에 물가도 잡혔다. 미국 경제의 체질이 강화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미국은 인명 손실이나 군사비 지출 없이도 저유가를 통해 반미 성향 산유국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처지에서 저유가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부 자국 에너지 기업이 피해를 보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태세다.
특히 미국은 저유가가 러시아에 독약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러시아가 남의 나라 영토를 제멋대로 병탄하고 합병해도 미국이 손놓으면 러시아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아랍에서 미국을 밀어낼지 모른다. 미국으로선 러시아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다. 미국은 앞으로 수년간 저유가로 러시아를 압박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저유가가 팍스 아메리카나를 살려놓았다’는 말이 나온다.
중국은 저유가로 큰 어부지리를 얻게 됐다. 세계 최대 에너지 수입국인 중국은 유가가 80달러만 돼도 GDP의 0.15%가량인 500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중국 중앙은행이 추가 경기 부양을 진행하는 데도 부담을 덜고 있다. 석유화학산업의 원가 경쟁력이 확보되고 수출 물류비용도 줄었다. 중국 상품의 대외 경쟁력이 높아졌다.
일부 국제정치 전문가는 저유가가 수년 혹은 10년 정도 지속되면 동북아에서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힘의 균형이 중국 쪽으로 완연하게 기울 것으로 본다.
중국은 현재 러시아를 적극 지원한다. 러시아가 무너지면 미국의 다음 타깃은 자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1500억 위안(약 26조 원)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다. 앞으로 러시아의 우량 자산이 헐값으로 나오면 중국은 이를 적극 인수할 것이다. 중국은 자국민의 러시아 출입 비자 발급조건이 완화되기를 원한다. 러시아가 중국 자본이 필요해 이를 들어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 북동쪽 러시아의 연해주는 중국 동북3성과 국경을 맞댄다. 인구 600만의 연해주에 중국인 수천만이 물밀 듯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이곳은 청나라 때까진 중국 땅이었다.
미국은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효과’를 걱정한다. 러시아를 잡으려다 자칫 가상 적국인 중국을 너무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다. 이는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주면서 중국의 성장도 견제할 절묘한 저유가 정책’을 미국에 요구한다. 매우 어려운 고차방정식임에 틀림없다. 미국은 이번 석유전쟁을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끌고 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왼쪽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일본의 경우 저유가는 제조업의 원가 절감 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는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겪는 상태라 저유가가 중국만큼 큰 효과를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북한은 일상적으로 에너지난에 시달려온 만큼 저유가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펀더멘털(기초경제여건)이 워낙 나빠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반면 미국과 러시아가 저유가로 인해 갈등을 빚는 상황은 북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중국이 한국과 가까워지자 그 반작용으로 북한은 러시아에 접근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에 반대하지만, 이와 별개로 2013년 9월 연해주 하산에서 북한 나진항에 이르는 54km 구간의 철도를 현대화하는 공사를 완공했다. 지난해 3월 알렉산드르 갈루쉬카 러시아 극동개발부 장관은 평양을 방문해 1억1200만 달러 수준의 북한-러시아 교역량을 2020년까지 10억 달러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한 달 뒤엔 소방차 수십 대를 북한에 기증하기도 했다.
북한의 김정은은 친중파인 장성택을 처형한 후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새를 메우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한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에너지, 원자재, 식량을 공급받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를 얻고자 한다.
러시아의 처지에서 미국 주도의 저유가에 버텨내려면 미국을 압박할 사건을 만들어야 한다. 러시아가 “우리는 핵무기를 많이 가졌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러시아가 그나마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곳은 현실적으로 동유럽과 북한밖에 없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이외의 동유럽에서 추가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 벅차다. 결국 러시아는 북한에서 활로를 찾으려 할 수 있다. 북한도 ‘군사대국 러시아의 개입으로 한반도 문제가 복잡해지는 게 나쁠 게 없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반기 경제에 약발?
한 주유소가 휘발유 가격을 L당 1400원대로 표시하고 있다.
2013년 한국의 원유 수입비용은 993억 달러에 달했다. 이런 현실에서 저유가는 에너지 비용 절감과 물가 하락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다. 구매력 증가로 소비도 늘 것이다. 정부의 축소된 재정 및 금융 정책 여력을 보충해줄 수도 있다.
2013년 한국의 원유 평균 도입 단가는 배럴당 108달러인데, 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지속된다면 국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골드먼삭스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20% 하락할 경우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GDP 성장률은 1% 오를 것으로 예측된다. 인도는 저유가 덕택에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면 6% 이상의 성장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에도 이런 기회가 올지 기대를 갖게 한다.
저유가가 한국 경제에 기회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저유가에 따른 미국과 중국의 경기회복에 있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의 최대 시장이므로 두 나라 경제가 좋아지면 한국 경제도 덩달아 좋아진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무능하게 대처하면 모처럼의 기회도 날려 버릴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금리인상에 대비해 부실자산, 가계대출 등 거품을 제거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한다.
산업별로 보면, 석유를 수입해 여러 제품을 만드는 LG화학 같은 회사는 저유가가 매우 반가울 것이다. 낮은 가격으로 원료를 들여오므로 마진이 커지기 때문이다. 휘발유 값이나 디젤유 값이 내려가면 사람들이 자동차를 더 사게 되므로 현대기아자동차 같은 회사도 저유가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철강회사는 무거운 철광석을 수송하는 데에 드는 운임이 생산원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유가가 내려가면 생산원가를 줄일 수 있다. 자동차가 많이 팔리면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의 수입도 늘어난다. 해운회사의 경우 매출액 대비 벙커C유 비용이 20%에 달한다. 유가하락은 곧 영업이익 증대를 의미한다. 항공사도 마찬가지다.
반면 태양광산업 같은 대체 에너지 산업은 석유대비 가격경쟁력 약화로 성장세가 둔화할 것이다. 해양플랜트 위주의 조선회사도 불황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35억 달러에 달했던 해양플랜트 수주 액이 2014년 1~10월 34억 달러로 격감했다. 건설회사는 내수가 살아나면 경기가 좋아지지만, 산유국들의 경기침체로 ‘중동 붐’ 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다.
물리적 충돌 가능성
저유가는 한국 경제에는 대형 호재이지만 대북 관계에선 지뢰밭으로 여겨진다.
저유가로 인한 미국과 러시아 간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므로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 유럽을 공동체로 묶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재정비해야 한다. 미국이 보기에 이 제안은 그야말로 뜬금없다. ‘미국이 러시아와 크게 한판 붙었는데 미국의 군사동맹국인 한국이 러시아와 하나가 되자’고 한 것이기 때문. 사실 미국-러시아 대결에서 한국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북한과 미국 간 긴장이 고조되면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도 탄력을 받기 어렵다. 한국 정부의 최근 남북대화 제의는 인권 문제 등으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는 미국과 유엔의 움직임과는 어딘지 모르게 동떨어졌다. 한국 정부가 과연 한반도 정세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타이밍에 맞게 대처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국이 신경 써야 할 점은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이 북한에서 벌어질 가능성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니픽처스가 해킹당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최근 대북 제재에 나섰다. 북한과 러시아는 공동의 적인 미국을 앞에 두고 지금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푸틴은 올해 5월 모스크바에서 개최하는 2차대전 승전기념 70주년 행사에 김정은을 초청했다. 북러 관계는 나진-하산 프로젝트 가동 이후 급진전됐다.
러시아와 북한이 반미 카르텔을 만들고 미국이 이를 좌시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은 높아진다. 세계의 화약고인 한반도에서 에너지를 매개로 한 저강도 군사 충돌이 일어날 여지도 있다. 에너지 문제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사국은 필사적으로 나온다. 한국 정부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의외의 사태를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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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위해 한국의 대러시아 접근과 남북관계 개선을 사실상 주저앉힐 가능성이 있다. 한국 정부도 ‘한미 갈등의 부담을 지면서까지 남북관계의 성과에 계속 집착할 필요는 없다’며 구상을 접을지 모른다. 이럴 경우 북한과 러시아는 더욱 긴밀해진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독자적 전략이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말과 행동이 일관되지 않고 가끔 모순으로 비친다. 주변국을 잘 설득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위기상황으로 몰릴 것이다. ‘러시아의 핵무기 운운이 한국도 염두에 둔 말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