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순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언어가 그랬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질문에 짧고 간결한 말이 답으로 돌아왔다. 인터뷰가 끝났을 무렵 기자의 머릿속엔 단어 몇 개가 각인됐다. ‘고용’ ‘내수’ ‘중소기업’…. 하루에도 몇 번씩 쓰고 들은 단어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순(87) 전 경제부총리는 매일 5개의 신문을 본다. 국내 신문 3개와 외지 2개다. 신문을 통해 그는 세계와 소통한다. 그가 보는 외지는 영국에서 발행되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人民日報)’다. FT는 오래전부터, 런민일보는 3년 전부터 구독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누굴 만나는지,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꼼꼼히 챙긴다. 나이와 관계없이, 그는 여전히 눈 밝은 실물 경제학자다.
케인스, 루스벨트 없는 세계
그의 약력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20년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직했고 노태우 정부 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를 맡았다. 1995년에는 서울시장, 1997~98년엔 야당(민주당)과 여당(한나라당) 총재를 번갈아 맡았다. 고향인 강원도 강릉에서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정계를 떠난 뒤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간단하게 정리한 게 이 정도다.
조순 전 부총리를 최근 서울 관악구 자택에서 만났다. 35년 전 조 교수가 직접 지은 집이다. 집을 지을 당시 이곳엔 수도가 없었다. 마당 한가운데 우물을 파고 거기에서 나온 물로 집 짓고 밥 지어 먹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조 교수 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거실 겸 서재로 쓰는 공간엔 탁자에도 바닥에도 책과 신문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경제학자의 책상이라기보다는 기자나 소설가의 그것에 가깝다. 햇빛이 좋은 창가에 1974년 초판이 나온 한국 최초의 경제학 교과서 ‘경제학 원론’ 10권이 적당히 빛바랜 채 꽂혀 있다. 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등과 공저한, 맨 오른쪽에 꽂힌 개정판은 2013년에 나왔다. 지난해 11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경제학원론’ 출간 40년을 맞아 조촐한 행사를 열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서재 곳곳에 펼쳐진 신문엔 형광펜으로 그은 줄들이 선명하다. 몇몇 기사 제목에는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책상 옆에 밀쳐둔 1월 5일자 FT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The west has lost intellectual self-confidence’라는 제목을 달았다. ‘서방 국가들은 지적 자신감을 상실했다’쯤 되겠다. 조 전 부총리가 입을 뗐다.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쓴 글입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이 세계경제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할 지적 자신감을 잃었다. 이것이 현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다’라는 내용이에요.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세계경제의 가장 큰 위기는 금융위기나 외환위기가 아닙니다. 케인스, 루스벨트 같은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는 게 더 큰 위기죠(웃음).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외국발 위기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국내산 위기는 해결할 수 있죠. 그런데 그걸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조 전 부총리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위기의 한국경제, 해법을 찾다’라는 주제 아래 10개 남짓한 질문을 담았다. 그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노학자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터뷰 준비는 기자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는 예의상 보낸 질의서에 예비 답변을 빼곡히 적어놓고 기자를 기다렸다. 쓰고 또 고쳐 쓴 흔적이 역력했다.
실패한 자본주의
▼ 건강은 어떠신가요.
“작년 초에 ‘용궁’에 갔다 왔어요(웃음). 몸 여기저기가 아파 2주 동안 입원했는데, 정말 죽다 살았습니다. 밤에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어요. 요즘은 아주 좋습니다. 다시 연구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 조만간 논문을 발표하신다는 소식도 있던데요.
“네, 학술원에 낼 논문입니다. 거의 끝나갑니다. 제목은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한 경제운용 원리’입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자본주의가 어떻게 하면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영국에서 시작돼 미국에서 꽃을 피운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이제 실패했어요. 세계화한 자본주의는 금융위기를 가져왔습니다. 금융을 자유화해선 안 된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새로운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가 됐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