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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증언〉 윤봉길 의사 장손녀 “보훈처 국장이 ‘청와대 뜻’이라며 사퇴종용”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 단독 인터뷰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최초 증언〉 윤봉길 의사 장손녀 “보훈처 국장이 ‘청와대 뜻’이라며 사퇴종용”

  • ● 日 히로시마 기념관에 줄지은 학생들…“우리는 어떤가요?”
    ● ‘조선에서 제일 나쁜 놈의 아들’ 소리 들은 아버지
    ● 윤봉길은 내 삶의 테두리, 아름다운 구속이었다
    ● “‘매년 100주년’ 마음으로 독립운동 관심 가졌으면…”
    ● “2017년 7월 보훈처 국장이 ‘청와대 뜻’이라며 사퇴 종용”
    ● 피우진 보훈처장 2017년 8월 국회 예결위서 사퇴 종용 사실 인정
    ● 자유한국당 직권남용 고발에도 피 처장, 보훈처 해명 거부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광복 전까지 아버지는 ‘조선에서 제일 나쁜 놈의 아들’이라는 교사들의 비난과 ‘왕따’를 홀로 감당해야 했어요. 적응을 못해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니 점차 말수도 줄었고요.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길 원했어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제게 할아버지(윤봉길 의사)는 삶의 테두리이자 아름다운 구속 정도? 조금은 더 자유분방할 수 있었던 내 삶의 완급을 조절해주는 존재였죠.”

1월 23일 오후 서울 양재동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만난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매헌 윤봉길 월진회 이사)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갖는 삶의 무게와 올바른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윤주경 전 관장은 2014년 9월 22일 독립기념관장으로 취임해 3년 임기를 2개월 넘긴 2017년 12월 17일까지 재임했다.

올해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4월 11일) 100주년(이하 ‘100주년’)이 되는 해.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다채로운 축제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암흑의 시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소리 없이 피를 흘린 독립운동가 후손이 맞는 ‘100주년’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온도차가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독립기념관이 ‘나들이 명소’ 됐으면…”

2015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구 루쉰공원에서 열린 ‘제83주년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식 및 매헌기념관 재개관식’에서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이 윤봉길 의사 흉상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가보훈처]

2015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구 루쉰공원에서 열린 ‘제83주년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식 및 매헌기념관 재개관식’에서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이 윤봉길 의사 흉상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가보훈처]

- 올해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도 의미가 크겠다.

“‘100주년’이어서 크게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매년 100주년’이라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국민적인 관심과 정부의 지원은 자랑스러운 우리 독립운동사를 발굴하고 기리는 초석이다. 독립운동 사적지를 보존하고 국제학술회의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



- 독립기념관장으로서 독립운동을 알리는 데도 많은 노력을 했는데.

“국민 모금으로 1987년 개관한 독립기념관은 그동안 세월이 쌓여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이 많다. 단풍나무길은 단풍이 터널을 이룰 정도다. ‘100주년’인 올해에는 많은 국민이 방문해 그런 자연을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관장이 됐을 때 많은 분이 ‘독립기념관은 엄숙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쉽게 갈 수 없게 되더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가족들이 나들이 왔다가 전시관도 보고, 쉬었다 가는 ‘나들이 명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쉬다가 전시관에 들어가 보고 ‘아, 이런 역사도 있었네’ 하고 편하게 독립운동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길 원했다.”

- ‘나들이 명소’를 위한 전략은….

“여러 가지 있었는데, 육군(2016년 5월)에 이어 국방부(2017년 4월)와 ‘나라사랑 정신 함양을 위한 상호협약(MOU)’을 맺어 국군장병들이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도록 한 게 기억에 남는다. 장병들이 휴가 때 독립기념관이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휴가를 하루 더 주는 협약이었는데, 독립운동 역사를 통해 국가와 민족정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장병들이 아빠가 되었을 때 기념관의 아름다운 자연을 떠올리며 자녀들과 재방문할 수 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독립기념관의 설립 목적도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정신을 선양해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이바지하는 거다. 설립목적을 이루기 위한 프로그램이 가장 필요한 곳이 군대라고 생각했다.”

- 많은 국민이 기념관을 다녀가는 게 중요하겠다.

“그렇다. 국방부와의 MOU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고, 장병들이 부모님, 친구와 함께 기념관을 찾고 있다. 독립기념관이 충남 천안에 있으니 충청 지역에 방송되는 다양한 방송에 출연해 기념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특별전시, 체험행사를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방송에 많이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윤봉길 의사의 손녀라는 점과 첫 여성 독립기념관장이란 점이 시청자에게 호기심을 자극해서인 것 같다. 나는 이런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과거 (원자폭탄 투하 장소인)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과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갔을 때 줄지어 들어가는 일본 학생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탓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올해 독립운동사에서 의미가 큰 ‘100주년’인 만큼 많은 국민이 독립기념관 등 우리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방문해주셨으면 좋겠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특히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유와 평화를 추구한 독립운동가들

- 그래서 관장 재직 시 상설전시관 교체 작업을 했나.

“대략 10주년을 주기로 기념관 7개 상설전시관의 전시 교체 작업을 한다. 여러 전시관 중 가운데 위치한 4전시관을 ‘평화·공감’을 주제로 한 ‘평화누리관’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독립운동은 우리의 독립만 추구한 것처럼 비쳤지만, 실제 할아버지(윤 의사)를 포함해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 한용운 선생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 독립에서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화를 추구했다. 이런 점을 반영해 기념관에서 인류 평화를 사색할 수 있도록 전시관 교체 작업을 한 거다. 개관식에 참석한 분은 ‘독립기념관은 역사적 사실 전달을 넘어서 독립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평화누리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씀하시더라.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 ‘10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 사업도 진행했는데.

“친일인명사전은 있는데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이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래서 2015년 4월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편찬위원회를 출범시켜 1만6000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 했다. 2024년 최종 마무리되는데, 올해 특별판이 나온다고 들었다. 인명사전은 학계에 축적된 연구 성과 위에 독립운동가의 성장 배경과 사상, 업적 등 생애를 종합 정리한 책이다. 따라서 독립운동가의 삶을 통해 독립정신과 세계평화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러한 연구 성과물들을 세계 석학들과 공유하며 우리의 의견과 시각이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 파리 7대학 등 유럽의 대학에 한국독립운동사를 정규 강좌로 개설하려고 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아시아를 넘어 미주와 유럽에서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이어지면 일본인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뀔 거다. 퇴임하면서도 연구원들에게 ‘나는 퇴임하지만 남는 여러분은 꼭 우리 독립운동사가 세계사 속에서 마땅한 위상을 찾게 해주기 바란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답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당부에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다.”

- 어떤 경험인가.

“윤봉길 의사 가족이라고 해서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거니와 생전에 할머니(윤 의사의 부인 故 배용순 여사· 1907~1988)가 할아버지 기념행사에 참석하면 ‘(윤 의사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인데 뭘 그리 대단한 행사를 하느냐’는 가슴 아픈 소리를 종종 들었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한 말이겠지만, 독립운동가 유가족과 후손들은 올바른 역사교육이 왜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당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예우를 받기는커녕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독립운동 역사를 발굴하고 학술회의를 통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 역사가 바로 설 수 있다.”

- 외국인들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 그런 시각을 가진 외국인들로부터 우리 후손들은 ‘한일 양국이 모두 자기 나라를 위한 애국 활동을 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그때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에 맞서 그것을 멈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이웃국가들이 함께 자유와 평화의 길로 나가자고 손을 내민 게 우리의 독립운동이었다’고. ‘어느 길이 인류를 위한 길인가’라고 당당하게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義士 김지섭을 도운 일본인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윤봉길 의사 국민장.

1946년 7월 6일 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윤봉길 의사 국민장.

인터뷰 이후 기자는 윤 전 관장과 3·1운동 100주년이 갖는 의미와 윤 의사의 의거에 대해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눴다. 그는 e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알려왔다.

“2016년 9월 26일 일본 도쿄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기획전시실에서 ‘일본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일본인’을 주제로 한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1924년 1월 5일 일본 궁성 이중교 폭탄의거를 단행한 김지섭 의사 관련 자료가 전시됐는데, 당시 그의 변론을 맡은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김 의사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편지도 처음 공개됐다. 편지는 일제가 형식 절차를 밟지 않고 구류기간을 연장한 것에 항의해 김 의사가 옥중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발굴해 한일 간 역사 인식 간극도 메우고, 독립운동가들이 추구한 정의 실현은 인류 공통 정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 20일 연장 전시했다.”


1932년 4월 26일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식 모습. [사진 제공·국가기록원]

1932년 4월 26일 윤봉길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식 모습. [사진 제공·국가기록원]

잘 알려졌듯이,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는 1930년 중국 다롄(大連)을 거쳐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모색하면서, 세탁소 직원으로 일하며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했다.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김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알렸다. 이듬해 1월 일본이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사령관으로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자 윤 의사는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 정보를 탐지했다. 결국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3일 뒤 상하이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일왕 생일 축하연) 및 전승 기념식장’에 물병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등 군 수뇌부를 섬멸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설한 특공대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수행한 윤 의사의 특공 작전이자 의거(義擧)는 침략의 깃발을 높이 든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당시 국민당 정부 장제스(蔣介石)는 “100만 중국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한국광복군 창설 등 임정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 연합국 수장들을 설득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특별조항을 넣어 광복의 단초를 마련했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보자.


‘할아버지 윤봉길’이 주는 의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연행되고 있다(왼쪽).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동아DB]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연행되고 있다(왼쪽).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동아DB]

-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은 어떤지 궁금하다.

“어릴 적 할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어른들 얘기를 들으며 ‘우리 할아버지가 좀 특별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항상 ‘윤 의사 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초등 저학년 때까지 ‘의사(義士)’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동네 골목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의사인데 병 고치는 의사(醫師)는 아니래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얘길 들은 동네 아주머니가 ‘너 말 한마디, 몸가짐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자랑이 될 수도,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다’며 따끔하게 말씀하셨고, ‘내 말이 할아버지를 부끄럽게 했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학창 시절에도 나만 다른 기준을 적용받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 손녀가 그러면 안 돼’라는…. 그래서 뒤에 숨고 싶은 적도 많았다.”

- 할아버지 존재가 부담이었나.

“아버지(윤종·1929~1985)는 자유롭게 사시길 원했고, 할아버지(윤 의사) 때문에 짐짓 진중하게 행동하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세인들 입에 ‘윤 의사의 손녀가 저 모양이냐’는 소리를 안 들으려 주의하며 살았던 거 같다.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조금은 더 자유분방할 수 있었던 내 삶을 조절해주는 존재였다. 삶의 테두리이자 아름다운 구속이었지 멍에는 아니었다.”

- 이화여대 화학과를 입학한 건 할아버지처럼 폭탄 제조를 위한 연구에….


“그건 아니다(웃음). 우리 7남매(그는 1남6녀 중 장녀다)는 모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머니는 항상 팔베개를 해주며 퀴리 부인에 대해 얘기해주셨다. 나는 가운을 입고 일하는 멋진 모습을 상상했고. 그래서 화학과에 입학했는데 적성과는 잘 맞지 않더라(웃음). 그래서 졸업 후 광고회사에 다녔다. 어머니도 이화여대 약대를 다니다 결혼 후 학업을 중단하셨는데, 어느 날 졸업생 명부에 이름이 실린 걸 보고 한참 웃은 기억이 난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일제강점기 아버지는 ‘조선에서 제일 나쁜 놈의 아들’이라는 교사들의 비난과 함께 왕따를 당해야 했다. 교사들이 항상 비난을 하니 전학이 잦았고, 점차 말수도 줄었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성균관대 경제학과 1회 졸업생이 됐다. 이후 농림부에서 공직생활을 하시다가 내가 초등 6학년 때쯤 공직을 그만두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나쁜 사람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였다. 이런 아버지의 삶은 우리에게 최고의 유산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 이유는 뭔가. 생계가 어려웠겠다.

“사람들이 ‘인간 윤종’으로 보는 게 아니라 ‘윤봉길 의사의 아들’로 보는 게 힘드셨던 거 같다.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선생님께서 김포공항에 스낵코너를 마련해줘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보훈대상이어서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고….”

-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손녀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윤 의사) 얘기하는 걸 무척 조심스러워하셨다. 산 사람이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혹시라도 해를 입을까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당신이 겪었던 고초에 대해서도 얘기를 안 했다.”


강인한 증조할머니, 침묵한 할머니

- 일제 시기 ‘침묵’을 강요받았기 때문일까.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을 곱게 보지 않던 사람들이 광복 이후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침묵이 더 낫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나도 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갈등을 겪다 보니 ‘할머니의 침묵’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러나 증조할머니(윤 의사의 모친 김원상 여사)는 아주 강한 분이셨다고 들었다. 아들의 의거 이후 일본 순사들이 수시로 집을 뒤지면 ‘나부터 죽여라’고 항의하고, 울분으로 흙벽에 머리를 받으면 벽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인한 분이었다. 증조할머니는 집안의 기둥이었고, 증조할아버지(윤 의사의 부친 윤황)는 가족을 위해 묵묵히 농사를 지으며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셨다.” 

윤봉길 의사는 100년 전 3·1운동을 겪으면서 일제 교육(덕산보통공립학교 재학)을 거부하고 한학을 배웠고, 이후 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통해 신문물과 신사상을 접했다(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자료). 1926년 서당(오치서숙)을 졸업하고 야학을 열어 토론회와 강연회를 연 것도 이웃들의 무지를 깨우고 실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농촌계몽서인 ‘농민독본’ 3권을 집필했고, 농촌 진흥을 목표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가 부업 등 다양한 활동을 폈다. 

- 윤 의사가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농촌계몽운동을 펼친 것도 부모의 영항일까. 

“나는 그렇게 본다. 부모의 절묘한 조화, ‘윤 두더지’라고 불릴 정도로 억척같이 땅을 파며 현실을 일군 아버지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봐라’라며 이상을 알려준 어머니 사이에 아들 윤 의사가 걸어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현실을 딛고 이상을 이뤄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생전 할머니께 들어보니 당시 계몽운동을 펼칠 때 할아버지는 아침에 놋주발에 밥반찬을 싸 들고 나가면 한밤중이 다 돼 돌아올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하더라. 특히 할아버지가 결성한 월진회는 지금도 고향(충남 예산)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한 달에 5000원씩 내는 회원이 늘고 있고, 관할 교육청은 학생 인성교육 과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상해로 떠나기 전까지 다양한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 아는 분은 많지 않다.”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 암흑의 시기에 농촌계몽운동의 한계를 깨달았을까.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바쳐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독립을 하지 않으면 현실 극복은 어렵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1930년 중국 칭다오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거나,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맹한 투사가 되어라’(아들에게 보낸 유촉시 중),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같은 할아버지가 남긴 어록을 보면 단순한 비분강개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 할아버지가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나. 


“국민 저마다 다양하게 기억하겠지만, 나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일제 식민지배라는 거대한 흐름을 바꿔 후세가 살아가는 세계는 이상이 꽃피는 세상으로 움직이게 하려던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러한 뜻을 기리고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그의 말처럼 1932년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본 헌병대 신문 내용을 보면 당시 윤 의사의 국제정세 판단과 선견지명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해 독립함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도래해 강국 피폐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 조선은 물론 각 민족이 독립할 것이다…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 그 역할을 삼는다… 따라서 금회의 사건(윤 의사의 의거)이 당장 독립에 직접 효과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확히 알게 하는 데 있다…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차제에 조선이라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결코 헛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기자는 이즈음 정치권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와 독립기념관 이사를 지내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선거 새누리당 100%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과 이후 대통령직속 대통합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이 당시 국민의 통합을 이뤄냈듯이 산업화와 민주화, 지역과 세대를 통합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했다. 산업화의 땀과 민주화의 피의 가치를 존중하고, 조화로운 세상 만들기에 역할을 하고 싶었다.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탈북 학생들에게도 ‘여러분이 독립운동 역사를 잘 기억해 통일이 됐을 때 남북이 하나 되는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인 만큼 남북이 함께하는, 마음이 하나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피우진 ‘사퇴 종용’의 진실

- 1월 7일 자유한국당은 피우진 국가보훈처장과 A 국장(현 지방보훈청장)을 윤 관장 임기 만료 전에 사표를 종용한 혐의(직권남용)로 검찰에 고발했는데. 

“….” 

윤 전 관장은 말없이 한동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고, 그런 얘기(사퇴 종용)를 들은 자체가 솔직히 부끄럽다. 그래서 말하기 조심스러웠다. 퇴임 직전인 2017년 11월 국회 정무위원회 마지막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이 소회를 묻기에 ‘지난 3년간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자부심 갖고 일할 수 있어 행복했다. 더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공직에서 일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좋게 마무리했고, 정무위의 한 야당 의원실에서 사퇴 종용과 관련한 문의가 왔을 때에도 ‘보훈처 직원의 과욕으로 한 걸로 생각해주세요’라고 무마하고 넘어갔다. 한국당이 고발했다는 사실도 제부(弟夫)가 보내준 뉴스 영상을 보고 알았다.”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예우 문제

2017년 8월 25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의 사퇴를 종용했다’고 시인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록.

2017년 8월 25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의 사퇴를 종용했다’고 시인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록.

그가 다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임기 만료 2개월 전인 2017년 7월경 ‘사퇴 종용’을 받은 사실 자체가 그에게 큰 충격인 듯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예우해야 할 국가보훈처가 임기를 남겨둔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사퇴를 종용한 사실은 묻는 기자나 인터뷰이나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잠시 뒤, 그에게 국회 회의록에 나타난 피 처장의 발언에 대해 물었다. 2017년 8월 2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록에는 백승주 한국당 의원과 피우진 보훈처장 간 질의 응답이 담겼다. 

- 예결특위 회의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내게 피 처장이 직접 사퇴 종용을 한 건 아니다. 임기 만료를 두 달 앞둔 2017년 7월경 A국장이 찾아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표 낼지 안 낼지 지금 결정하고 사표는 일주일 내에 내달라’고 했다.” 

- 임면권자는 대통령인데 보훈처 국장이…. 

“‘BH(청와대) 뜻’이라고 했다.” 

- 뭐라고 답했나. 

“(후임 관장 임명을 위한)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후임 관장 인선 작업을 해도 내 임기(2017년 9월)는 다 끝나는데 왜 사표를 내라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별말 없다가 ‘빨리 (윤 관장의 거취를) 결정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 피 처장에게 확인했나. 

“당시 언론은 ‘공공기관장 임기가 3개월 이내이면 임기를 채우도록 한다’고 보도하던 시점이라 좀 의아했다. 확인해야겠다 싶어 피 처장에게 메모를 남겼더니 얼마 뒤 연락이 왔다.” 

- 뭐라고 했나. 

“‘(사표 종용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다른 곳(보훈처 산하 3개 공공기관)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 

윤 전 관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독립기념관장은 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맡는 상징성 때문에 정권이 바뀌어도 모두 임기를 채웠다. 독립운동은 명예로운 대한민국 역사이고, 관장은 국민과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를 공감하는 일을 하다가 명예롭게 퇴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관장이 정권 교체와 어떤 연관성이 있나. 사표를 내는 건 문제도 아니었지만, 관장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이건 후손들에 대한 예우도 아니고,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독립기념관 이사 시절 한 교수님이 ‘독립기념관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청와대의 뜻’

- 청와대의 ‘뜻’도 확인했나. 

“임면권자인 대통령 뜻이었다면 사표를 냈을 거다. 그래서 주변에 알아보니 ‘청와대가 독립기념관장 퇴직을 종용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직접 대통령에게 확인할 순 없었지만 ‘청와대는 그런 오더 내린 적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8·15 경축사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존경을 표했는데 이런 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8월 15일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습니다.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의 3대까지 예우하고 자녀와 손자녀 전원의 생활 안정을 지원해서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받는다는 인식을 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사표 종용은 언제까지 이어졌나. 

“일주일 사이에 정리됐다. 사퇴 종용 일주일 뒤 피 처장은 ‘관장님 (임기 보장을 요구하는) 전화가 너무 많이 오네. 관장님은 사표 내지 마’라고 하더라. ‘보훈처 개혁을 위해 우선 3개 산하기관을 개혁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사퇴 종용) 됐다’고 했다.” 

-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예우치고는…. 


“내가 (사표 종용에) 토 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정권이 바뀌면 통상적으로 이런 식으로 (기관장 교체가) 이뤄져서 그런 건지 의아했지만, 보훈처는 자신들이 뭘 해야 하는 곳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거 같다. 피 처장 해명을 들으면서 모든 부처가 이런 식으로 사표를 받는다면 문 대통령이 오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다행히 많은 분이 독립기념관장의 상징성에 대해 얘기를 해줘 임기를 채우고도 후임 관장 오기 전까지 2개월여 더 일했다.” 

- 보훈처는 임기를 채우고도 더 일했다고 강조한다. 

“정관에 따라 후임 관장이 올 때까지 일을 맡은 거다. 결과적으로 임기가 늘어났다고 해서 사퇴 종용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가. 제때 후임 관장 임명도 못하는데 왜 조기 사퇴를 종용했는지…. 나는 선열들이 꿈꾼 대한민국을 위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쓴 농민독본에 ‘세상 바꾸려거든 내 몸부터 움직여라’는 글귀가 가슴에 와닿았다.” 

기자는 여러 차례 당시 상황을 되물었지만 윤 전 관장의 답변은 일관됐다. 오 국장과 처음 만난 인연부터 피 처장의 말투까지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보훈처는 ‘신동아’에 보내온 답변서를 통해 “이 사안(윤 전 관장 사퇴 종용 고발 건)은 한국당 의원들의 고발에 따라 검찰에 계류 중”이라며 “수사 대상인 사건에 대해 보훈처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윤 전 관장 임기는 3년(2014년 9월 22일~2017년 9월 21일)이지만 독립기념관 정관에 따라 후임자가 임명될 때(2017년 12월 17일)까지 계속 직무를 수행했다”며 ‘참고하라’고 부연했다.




신동아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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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증언〉 윤봉길 의사 장손녀 “보훈처 국장이 ‘청와대 뜻’이라며 사퇴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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