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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연장만 고민하면 조선과 다를 게 없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㉓]

“젓가락질 잘하는 한국인이 반도체업에 맞는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정권연장만 고민하면 조선과 다를 게 없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㉓]

  • ● 21세기 대표하는 전략자산
    ● 단군 이래 한국 유일한 독점
    ● 경계 부순 혁신가의 마음
    ● 민족성에 대한 인류학적 통찰
    ● 자연·사회과학 결합 산업
반도체 생산 공정은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생산 공정은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과 반도체’ 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글의 취지와 방향을 두 가지 차원에서 언급하고 싶다. 우선 인류의 삶을 변화시킨 가장 큰 동력이 ‘기술’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비대면이 일상화한 요즘, 정보기술(IT)과 제약·바이오 기술의 획기적 발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감염병과의 전쟁을 더 힘겹게 치르고 있을지 모른다. 각종 정보기술 덕분에 먹을 것을 포함해 감염병이 초래한 일상의 어려움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빠른 백신의 개발로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닥친 대재앙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그래왔듯 우리는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할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술혁명이 도움이 됐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공유하고 싶다.
그 정점에 반도체가 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없었다. 단지 산업의 쌀 정도가 아니라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났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기술혁명의 원천이다.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의 모든 산업, 자율주행 자동차, AI(인공지능), AR·VR(가상 증강현실), 바이오, 커머셜, 휴대전화, TV 등 쓰이지 않는 데가 없다. 내연기관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300여 개지만 전기 자동차에는 2000여 개가 들어간다.

반도체는 21세기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이기도 하다. 스티브 블랭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21세기 반도체는 지난 세기의 석유와 같다.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제 군사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세계시장 점유율은 2021년 기준 70%를 넘어섰다. 단군 이래 대한민국에서 세계 시장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선도한 수출 품목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 막연하게 알고 있던 반도체 신화를 차근차근 풀어가려 한다.



21세기 석유라고 일컬어지는 반도체는 전략자산이기도 하다. 2021년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1차 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뉴시스]

21세기 석유라고 일컬어지는 반도체는 전략자산이기도 하다. 2021년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1차 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뉴시스]

삼성이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앞선 회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5공화국 정권의 통신혁명 이야기를 서두로 꺼낸 것과도 같은 취지다. 흔히 과학과 기술 이야기라고 하면 컴퓨터나 돈,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기술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이 기술을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파고들다 보면 결국 사람으로 귀결된다. 사람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기술발전을 이끈 동력과 결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무모하고 과감한 도전을 하며 경계를 부수었던 혁신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술 관련 서적은 기술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나 설비투자 혹은 생산성 향상 및 비용 절감 등 제조업의 앵글을 활용한다. 정보통신혁명은 제조업의 논리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바가 더 크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983년,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대외에 선언했던 호암 이병철 회장과 이를 이어받아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를 일군 이건희 회장은 한국 사회가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가야 한다고 앞서서 주창한 기업인들이다.

남의 것을 뒤에서 쫓는 추격자에서 벗어나 맨 앞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조직문화·교육방식·상상력을 모두 버려야 한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리스크가 큰 사업에 투자하다 삼성이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모든 사람이 주저하고 반대할 때 고독한 결단의 순간과 수없이 마주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사업을 밀고 나갔고 결국 해냈다.

그것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개발 기간이 얼마나 걸리고 예산은 얼마나 투입되며 손익분기점은 어느 수준인지 등의 문제보다 반도체가 만들 세상에 대한 비전·가치·철학에 집중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반도체는 양심 산업

이건희 회장이 설파한 ‘업(業)의 개념’에 따라 한 결정적 선택은 뭐니 뭐니 해도 반도체 산업이다. 이 회장은 반도체업의 본질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봤다.

우선 흥미로운 대목은 이 회장이 한민족의 특성에 천착해 반도체업을 택했다는 점이다. 고인(故人)의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 생활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며 이건희 회장이 한국인과 한국인의 생활습관에 대한 통찰을 반도체와 전자 사업에 연결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세계 유명 뇌 과학 연구자들이 한국인이 가진 비범한 손재주의 비결로 젓가락 문화를 꼽는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중국·일본·베트남 등 동양문화권 중 유독 한국만 쇠 젓가락을 쓰는데, 이는 뇌 발달과 관계가 깊다고 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손은 해부학적으로 인체에서 가장 정교한 부위다. 인체의 206개 뼈 중 좌우 27개씩 54개 뼈가 손에 몰려 있다. 대뇌피질 가운데서도 손을 관장하는 신경 부위가 가장 넓다고 한다. 젓가락질을 할 때는 손가락, 손바닥, 손목에 있는 30여 개 관절과 50여 개 근육을 이용해야 한다.

쇠 젓가락은 잘 미끄러지고 음식을 집기 까다로워 일반 나무젓가락보다 더 많은 관절과 근육을 써야 한다. 뉴스 검색창에 ‘한국인의 손재주’를 치면 과거 줄기세포를 연구한 황우석 박사의 실험실을 찾았던 외국 학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지름 100㎛(0.1㎜.1㎛는 100만분의 1m)의 난자를 탁구공 다루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한국인 연구원들의 손을 보고 ‘매직 핸드(마법의 손)’라고 찬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박사부터 오퍼레이터까지 한 몸 돼야

반도체 공정은 불량품을 얼마나 적게 내느냐 하는 수율(불량률의 반대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전 공정이 사람의 몸처럼 머리와 손발이 하나가 돼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고도의 지능이 동반되는 노동 집약산업’으로 꼽힌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내부.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공정은 불량품을 얼마나 적게 내느냐 하는 수율(불량률의 반대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전 공정이 사람의 몸처럼 머리와 손발이 하나가 돼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고도의 지능이 동반되는 노동 집약산업’으로 꼽힌다. 사진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클린룸 내부. [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이 젓가락 문화에 이어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생활 습관을 반도체업과 연결한 것은 그의 문화인류학적 통찰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젓가락과 신발 문화는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인데, 이 회장이 주목한 우리 문화만의 독특한 차별 포인트는 밥상을 함께 하는 식(食) 문화였다. 다시 고인의 글을 인용한다.

“젓가락 문화권은 사실 일본과 큰 차이가 없지만 내가 착안한 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식생활 문화였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숟가락을 사용한다. 찌개와 탕을 먹기 위해서다. 밥상 한가운데 찌개나 탕을 놓고 공동으로 식사한다는 것은 결국 팀워크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팀워크 면에서 일본보다 우리에게 강점이 있다고 보았다.”

생전의 이 회장이 전자업종 자체가 한민족의 특성과 잘 맞는다고 말했다는 것을 직접 들었다는 사람이 있다. 이 회장과 서울사대부중, 서울사대부고 동창으로 삼성전자에서 일하기도 했던 조태훈 건국대 명예교수다. 그는 이 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던 2018년 1월 고인을 추억하는 장문의 글과 사진을 온라인에 띄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여기에 그런 증언이 나온다. 조 교수의 글 중 일부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삼성이 생산물량 100%를 수출하는 조건으로 전자업종에 틈새를 비집고 진출한 초창기였다(1970년대 초반이었으니 이 회장이 20대 후반이던 시절이다-필자 주). 그때 벌써 건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민족성을 보면 뭐니 뭐니 해도 전자업종이 제일 잘 맞는 거야! 섬섬옥수 손재주와 섬세성에 있어서 우리 국민을 따라올 나라는 없어.’ 삼성이 전자에 올인해야 한다는 철학과 신념이 벌써 그때부터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 교수가 전하는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하다. 성공한 기업인이 새로 진출할 업종을 택할 때 우선적인 고민의 대상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여부다. 그런데 이 회장은 ‘사람들의 생활 습관’에 천착했다는 것이다. ‘첨단 미래 산업이란 확신이 든 반도체업을 하긴 해야겠는데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맞는 일인가’를 이 회장은 깊이 파고들었을 테고, 종국에는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민족성에까지 천착해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고인은 반도체업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개념화한다. 생전 고인의 말이다.

“반도체업은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부터 기능직 사원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종업원이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300여 개 공정(이하 스텝)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 직원들이 가족처럼 믿고 합심해 일하는 게 중요한 양심 산업이자 고(高)지능 노동집약사업이다. 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모두 결합된 최첨단+고 두뇌+자본집적 사업’이며 영업적 측면에서는 남보다 빨리 양산해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이밍 사업’이다.”

이 회장의 말을 전직 삼성맨들에게 전했더니 한마디 한마디가 함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기술소장을 역임한 이문용 전 부사장의 말이다.

“흔히 최첨단이라고 할 때는 그만큼 공정 작업이 복잡하다는 말입니다. 반도체 초기만 해도 거쳐야 할 스텝이 300여 개였지만 지금은 600여 개에 달합니다. 디자인 설계에서부터 시작해 실리콘 웨이퍼를 깎고 닦고 쌓아 올리고 사진을 찍고 하는 전 과정에서 박사들부터 마지막 오퍼레이션을 하는 기능직 사원까지 원 팀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회장님이 한국인들의 식생활 문화까지 관찰하면서 반도체 업이 맞겠다고 보셨다는 건 그야말로 가족처럼 원팀으로 일해야 하는 업의 공정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지요.

반도체는 먼지 한 톨이라도 들어가면 바로 불량이 돼버린다는 점에서 ‘Yes or No, OX 사업’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에어컨이나 TV는 에너지 효율이나 화질 레벨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책정해 팔 수 있지만 반도체는 먼지 한 톨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불량품을 얼마나 적게 내느냐 하는 수율(불량률의 반대개념)이 그래서 중요한 거지요. 전 공정이 사람의 몸처럼 머리와 손발이 하나가 돼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고도의 지능이 동반되는 노동 집약산업’이라는 회장님 표현은 반도체업의 본질을 꿰뚫은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청정이 생명인 業의 특성”

반도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8대 공정’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반도체가 완성되기까지 거치는 수백 번의 과정을 8개 공정으로 단순 구분한 내용이다. 웨이퍼 제조-산화-포토-식각-증착 및 이온주입-금속배선-EDS-패키징 공정이 그것이다.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전 부사장과의 문답으로 돌아간다.

양심 산업이라는 의미는 뭘까요.

“요즘은 기간이 많이 짧아졌지만 웨이퍼를 투입해 완제품이 나오려면 최소 50일 이상이 걸렸습니다. 더구나 반도체 공장은 1년 365일 스물 네 시간 돌아가야 합니다. 중간에 멈춰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쉬어야 하잖아요. 오퍼레이터 직원들의 근무조는 3교대로 바뀌는데 마지막에 불량이 나왔을 때 어느 공정의 누구 책임인지가 불분명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불량 분석을 해보면 불량이 나온 이유나 책임 소재가 가려질 수 있지만 비유하자면 축구장만한 잔디밭에 작은 조약돌 하나만 있어도 불량이 나버리는, 그야말로 청정이 생명인 업(業)의 특성상 어느 공정에서 어떤 문제가 왜 생겼는지 책임 소재를 가리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알고도 말하지 않으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문제점을 추적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에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고 잘못이 생기면 바로 바로 알리고 인정하는 문화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양심 산업’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한 말 같겠지만 앞서 경험한 사람들의 도움도 없이 맨 처음 첨단 공정에 도전해야 하는 입장에선 직원들에게 업의 의미와 가치, 공정을 개념화해 되새기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결합된 산업이라는 의미는 또 뭘까요.

“반도체 업은 물리학, 화학, 재료 공학 등 전 분야가 걸쳐 있습니다. 공학적 지식뿐 아니라 여러 자연과학적 지식이 망라됩니다. 여기에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결합돼야 한다는 건 소비자들의 마음, 한마디로 유저(User) 마인드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할까, 무엇을 좋아할까 하는 연구가 반도체 수요를 만드는 원천이니까요. 소비자들의 심리와 생활을 파악하는 이 분야는 당연히 사회과학을 하는 문과생들의 분야죠. 그런 점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결합된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이 곧 일본을 이길지 모른다

반도체 공장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와 관련해 삼성의 전직 임원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일본 반도체 회사 임원들이 삼성 기흥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공장을 유심히 둘러본 일본인들이 ‘어쩌면 삼성이 곧 일본을 이길지 모른다’고 부러워하며 걱정했던 일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무슨 엄살인가 싶어 저녁 자리에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네 회사 공장 근로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데 삼성은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다 여직원들까지 스물 네 시간 근무조에 포함돼 있는 게 놀랍다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일본 노동법에서는 여직원들은 심야근무를 못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밤에 여직원들은 다 퇴근을 시켜야 하니 업무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거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약간 곁가지로 새는 듯하지만 생전 고인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어 내친 김에 덧붙인다. 다시 그의 말이다.

“전용 비행기를 타고 회장을 수행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희들은 초긴장 상태 가 됩니다. 비행기 안에서 불쑥 무슨 질문을 던지실지 모르기 때문이었죠. 그러다보니 기내 인터넷 폰을 항시 들고 비상상황이 생기면 바로 서울 비서실로 전화해 회장의 질문에 답을 찾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조선이 1392년 개국하던 시점과 임진왜란을 겪을 시점인 1592년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각각 달러로 얼마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희가 알 턱이 있겠습니까. 바로 서울로 연락해 독촉했습니다. 그 결과 쌀 생산량을 기준으로 개국 때는 2달러, 임진왜란 때는 1달러였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나라가 갈수록 성(盛)한 게 아니라 200년 만에 생산력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을 수치로 확인한 계기였죠. 내용을 보고받은 회장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뭐라고 말씀했는데요.

“‘왕조 역사상 500년 넘게 간 경우는 역사상 흔치않은데 고려와 신라는 그래도 무역으로 아라비아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경제력이 커졌지만 조선은 생산성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드는 상태에서 일본에 먹혔으니 얼마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지 상상이 간다. 사회지도층이란 사람들이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정권 연장이나 재창출에만 고민하면 지금이라고 조선과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삼성 같은 대기업이 10개만 있으면 국민들 삶의 질이 바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도쿄에 내려서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었어요. 회장을 모시고 도쿄 시내를 지나는데 갑자기 ‘도쿄 시내에 까마귀가 몇 마리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도대체 어디 가서 알아볼 것인가 고민한 끝에 우에노 공원으로 가서 면적을 정한 뒤에 까마귀를 몇 마리 잡아 목에 전자 태그를 달아 풀어준 뒤 다시 돌아오는 걸 계산해 추정치로 낸 적이 있습니다. 약 5만 마리라는 추정치가 나왔습니다.”

왜 까마귀에 꽂혔을까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전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물 네 시간 돌아가야 하는 반도체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기 아닙니까. 끊기면 절대 안 되니까요. 그런데 도시의 까마귀는 전신주의 전선을 훼손할 수 있는 요인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새가 까마귀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크기 때문이죠. 커피나 계란도 먹고 심지어 골프장에서 돈을 물어갈 정도로 식성이 좋은 새입니다. 그런데 부리가 새들 중에서도 워낙 강해 전선을 쪼면 갑작스런 정전 사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회장은 도쿄의 까마귀들을 보고 반도체 공장을 생각한 거죠.

아무튼 회장의 돌발적인 질문에 저희들은 늘 초긴장 상태이긴 했지만 회장이 단지 개인적인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라거나 직원들을 일부러 피곤하게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모두 다 사업과 연결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많았습니다.”



신동아 2022년 3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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