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조선의 아버지들

아들과 서로 공경 대 이은 禮學의 사표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 김장생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6-08-18 17: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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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조선 사회에 예학(禮學)의 새바람을 불러온 김장생·김집 부자는 서로에게 공경의 예를 다했다. 두 사람의 위패는 성균관 문묘에 나란히 배향됐다.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쳐 자신의 학문을 후세에 전한 경우는 드물다. 자식을 직접 가르치다 보면 부자의 정(情)이 엷어지기 쉽다. 아들 사도세자의 교육에 지나치게 열중하다가 현왕(賢王) 영조는 부자간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다. 현대에도 지나친 ‘치맛바람’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일이 잦다. 일찍이 맹자는 그 점을 경고했다. ‘부자간에는 사랑이 으뜸이라. 좋은 일을 권하는 책선(責善)도 서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17세기 조선 사회에 예학(禮學)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과 김집(愼獨齋 金集·1574~1656) 부자의 경우가 그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세상에 다시없는 친구였다. 그들 부자는 서로에게 공경의 예(禮)를 극진히 다함으로써 신기하고 오묘한 조화경(造化境)을 이뤘다. 상호 존중의 극치였다.



    ‘小學’ 그대로의 삶

    그들 부자는 충청도 연산의 향리에 묻혀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김장생은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해, 그의 거처는 이름난 ‘연산서당(連山書堂)’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선비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선비들의 눈엔 아버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아들 김집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1606년(선조 39) 전라도 고부 출신의 권극중이란 선비가 두 달간 연산서당에 머물며 김장생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스승 부자의 조화로운 삶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핀 바를 글로 정리해 후세에 남겼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학(小學)’에 기술된 것과 일치했다고 한다. 권극중의 붓끝을 따라 연산서당의 정경을 그려보면, 김장생 부자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다가온다. 아들 김집의 효성은 지극했다.



    침실이나 서재에 훼손된 곳이 있으면, 신독재 선생(김집)이 손수 살펴보고 수리했는데 흙손질도 직접 했다. (…) 선생(김장생)께서는 준치[眞魚], 식혜, 메밀국수를 즐기셨다. (김집은) 식혜를 끼니마다 챙겨 그릇에 가득 담아 올리고, 국수는 사흘마다 한 번 올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당시 선생의 집이 매우 가난했다. 그러나 신독재가 음식 모두를 미리미리 준비해 부족하지 않게 했다. 만일 상에 올릴 고기가 없으면 (김집은) 몸소 그물을 들고 서당 앞 시냇가로 가서 물고기를 낚아왔다.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이며 요역(徭役)을 바치는 일 등 집안의 모든 일을 (김집이) 손수 다 맡아서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타시는 말도 살찌게 잘 보살폈고, 안장과 굴레 등도 항상 빈틈없이 손질했다. 다니시는 길까지도 항상 깨끗이 쓸었다. 울타리 밑까지도 항상 손을 봤다. 이처럼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온갖 일을 묵묵히 차분하게 다 하면서도 (김집은)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권극중, ‘유사(遺事)’, ‘신독재전서’, 제20권



    克己復禮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 김장생의 성품은 어떠했을까. 권극중의 글을 따라가면 답이 보인다. “유심히 살펴보니, 사계 선생(김장생)은 덕성이 얼굴에 넘치고, 기상이 온화하고 단아하셨다. 가까이 모시고 있노라면,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온화하고 관대하며 참을성이 많은 인물이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사적 욕망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김장생과 김집 부자가 함께하는 공간은 화기애애했다. 그들 부자의 고제(高弟)였던 송시열의 회고담이 참고가 된다.



    선생(김집)이 서제(庶弟)와 함께 노선생(김장생)을 모시고 계셨다. 마침 서제는 참봉 윤재(尹材)에게 답장을 쓰고 있었는데, 상대를 ‘존형(尊兄)’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선생은 “세상 풍속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서제가 고쳐 쓸 때까지 (선생은) 온화한 말로 거듭 타이르셨다. 노선생께서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송시열, ‘어록(語錄)’, ‘신독재전서’, 제18권



    이 일화에서 확인되듯, 아버지 김장생은 매사에 개입을 자제했다. 그는 두 아들이 어떻게 하는지 미소를 지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김장생은 서자를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는 9명의 아들을 뒀는데, 적서(嫡庶)에 관계없이 모든 이름을 ‘목(木)’자가 들어간 외자로 지었다. 또한 모든 아들의 자(字)엔 한결같이 ‘사(士)’자를 넣었다. 17세기 조선에선 그처럼 적자와 서자를 동등하게 대하는 아버지가 드물었다.

    아버지의 그런 뜻에 부합하는 아들이 김집이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아버지를 시봉하며 크고 작은 예법을 철저히 배웠다. 윗방의 아버지와 밥상을 따로 했지만, 아랫방의 김집은 윗방에서 젓가락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기 전엔 결코 밥상을 물리지 않았다.

    예를 다하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질문이 있으면, 아버지는 병상에 누웠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대답했다. 부자간은 지극히 가까운 사이지만, 그래도 예를 잃으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신념이었다.


    실천의 禮學

    조정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장생은 그해 8월 8일 운명했다. 향년 84세. 사람들은 김장생을 성덕군자(成德君子)라 불렀고, 학자들은 사계선생(沙溪先生)이라며 우러렀다(김집, ‘죽은 아우 참판(參判) 반(槃)의 묘표’, ‘신독재전서’, 제8권).

    김장생은 17세기 예학의 우뚝한 사표(師表)였다. “(그는)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해 뜻을 찾아내고 참작해 분명하게 해석했다. 그리하여 변례(變禮), 곧 예법의 특수 사례에 직면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했다.”(‘인조실록’, 권 25, 인조 9년 8월 9일) 역사가들의 평가가 그러했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배운 이는 많았다. 후세의 학자들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그러나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한 이로는 아들 김집이 손꼽힌다.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그는) 선생(김장생)의 뒤를 이은 유종(儒宗)이 됐다.”(김집, ‘연보’, ‘신독재전서’)

    하필 왜 예학이었을까.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시로 고무되어, 예로 일어난다(興於詩 立於禮).” 또한 그는 인(仁)이란 개념을 ‘극기복례’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인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이 예란 뜻이다.

    김장생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당대 정치·사회문제의 해법을 예에서 찾았다. 그는 사적 이익에 눈이 먼 정상배들이 날뛰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그의 눈에 비친 대다수 선비는 겉으로만 성현의 가르침을 따랐지, 일상의 기본 예절조차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그런 주제에 이기론(理氣論) 등 형이상학에 매달려 민생을 외면했다. 이런 현실에 김장생은 분노했다. 게다가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고조됐다. 크고 작은 범죄가 만연하는 가운데 유교 본연의 가르침이 존립의 위기에 빠졌다. 김장생이 예의 이해와 실천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까닭이다.

    도탄에 빠진 조선 사회를 구하기 위해 그는 실천학문으로서 예학에 주목했다.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 김장생의 이런 뜻에 공감하는 선비가 늘어났다. 17세기 후반, 예학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급속히 성장했다. 김장생이 지은 예학 서적은 필독서가 됐다.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비롯해 ‘가례집람(家禮輯覽)’ ‘의례문해(疑禮問解)’ 및 ‘전례문답(典禮問答)’도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찍부터 김집은 아버지를 도와 예학 서적을 편찬했다. ‘의례문해’ 편찬엔 그의 헌신이 결정적이었다. ‘상례비요’ 역시 미진한 부분이 많아 김집의 손질이 요구됐다. 예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가 김장생이라면, 그 완성도를 높인 이는 김집이었다.

    예학이라면 형식에 얽매인 케케묵은 학문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김장생의 예학은 실천의 학문이었다. 그의 예학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예는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통찰이다. 상황에 따라 예가 달라질 수 있다는 그의 견해는 새로웠다. 둘째, 형식으로서 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문묘 배향된 유일한 父子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초 김장생 부자의 실천적 예학은 곧 퇴락했다. 몇 차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겪고 나서 예학은 정쟁의 날카로운 도구로 변질됐다. 민간에서도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악습이 생겨났다. 이래저래 예학은 김장생 부자의 본의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

    후세는 김장생과 김집의 위패를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했다. 그들 부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오직 보편적인 예법을 추구하는 ‘천하동례(天下同禮)’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유교적 이상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문묘에 모셔진 ‘동국 18현(東國十八賢)’ 중 부자가 배향된 경우는 그들이 유일하다. 도덕도 윤리도 실종된 채 탐욕의 도가니에 빠진 현대 한국에서 김장생 부자가 탐구한 예학의 의미를 되살릴 순 없을까.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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