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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밀착취재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포용과 융합의 용광로인가, 서울로 향하는 임시정거장인가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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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마다 전체 인구 10% 이상이 들고나는 도시
  • 실향민 애환 서린 만석동, 용현동
  • 50년대 피란민, 60년대 충청인, 70년대 전라인 삶의 터전, 수도국산
  • ‘이동성’ 높아 지역 문제에 무관심
  • ‘인천사람 의식’ 눈뜨는 이주민 2, 3세들
  • 19세기 근대화 관문에서 21세기 동북아 중심도시로
  • ‘배꼽 떨어진 용’이 여의주 물고 하늘 오르는 풍수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문학산에서 내려다 본 인천 전경. 1900년대 초 제물포 모습(작은 사진).

인천(仁川)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구한말엔 외세 침략의 관문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과 대륙침략의 최전선이었다. 광복 후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고향을 등진 실향민들의 집결장이었다. 자연히 도시는 이방인들로 가득 찼다. 지금도 인천은 해마다 15만명이 유입되고 15만명이 떠난다.

역사에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기록된 것은 1413년, 조선 태종13년이다. 하지만 이미 1400년 전부터 이곳의 역사는 시작됐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첫째부인 예씨에게서 낳은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둘째부인 소서노가 자신이 낳은 두 아들(비류와 온조)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온조는 지금의 서울 풍납동 일대에 백제를 세웠고, 큰아들 비류는 더 좋은 곳을 찾겠다며 서해 바닷가로 가서 터를 잡고 미추홀이라 이름지었다. 하지만 그곳은 바다와 너무 가까워 물이 짜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비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며 자결한 것으로 ‘삼국유사’는 전한다. 비류가 처음 나라를 세운 미추홀이 지금 인천시 남구 문학동 일대다.

인천은 백제 초기 중국과의 해상교역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송도 옥바위 능허대가 그곳이다. 하지만 고구려에 점령당한 뒤부터는 줄곧 변방의 작은 어촌으로 머물렀다.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의 역대 왕조는 모두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했다. 굳이 험한 뱃길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박이는 실향민으로



오늘날의 인천을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개항지 제물포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아 경인선을 타고 제물포역에서 내렸지만 포구는 보이지 않는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중구청 쪽이 옛 제물포라고 일러줬다.

1883년 조선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며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을 한다. 당초 정부에서는 인천이 ‘도성(서울)의 인후(목구멍)’라 하여 반대했지만 1884년 1월1일 일본이 강요해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인천은 도시라 하기엔 초라했다. 인구래야 겨우 7000명 정도였고, 더욱이 제물포는 인구 70여 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제물포는 국제항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세창양행, 이화양행 같은 외국 무역회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항구라 화물작업이나 도로공사, 건설공사 등 일거리가 넘쳐났다. 박해를 피하려는 천주교인들, 동학교도들, 탐관오리의 수탈에 못이긴 빈농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내 충청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생기더니 제주도 골목, 경상도 마을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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