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내겐 표창장이 재산 봉사는 피로회복제”

강도 잡는 택시기사 이필준의 ‘남 먼저’ 인생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5-01-20 15: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년째 ‘출근발이’ 포기하고 교통정리
    • 교통통신원, 자율방범대원, 명예소방관…
    • 절도범 등 13명 검거…표창장만 30개
    • 식칼 든 강도와 빗길 추격전
    “내겐 표창장이 재산 봉사는 피로회복제”
    지난해 12월 29일, 전날보다 수은주가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에 단단히 무장하고 집을 나섰다. 신대방삼거리 전철역에서 내린 시각이 오전 7시50분. 인파를 뚫고 출구 계단을 올라가는데 우렁찬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사방으로 뻗은 도로 위를 살폈지만 ‘호루라기 아저씨’ 모습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내버스와 출근 차량들이 뒤엉킨 도로 중앙에 파묻혀 사방팔방 ‘번개처럼’ 움직이다보니 170㎝가 채 되지 않는 ‘단구(短軀)’를 포착하기 쉽지 않았던 것. 검정 바지와 회색 점퍼 차림에 번쩍이는 검정 부츠를 신고, 등에 ‘모범’이라 적힌 연두색 야광조끼를 받쳐 입은 그는 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쉴 새 없이 차량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도로 한복판에 있는 그에게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러시아워인 만큼 방해가 될까 싶어 잠시 동안 멀찍이서 그를 지켜봤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출근 인파가 한꺼번에 도로로 내려섰다. 그때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전거는 횡단보도에서 내려 끌고 가셔야 해요. 사고 나면 보상도 못 받아요!”

    복잡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너는 젊은 남자를 그가 귀신같이 포착하고 소리친 것이다. 곧바로 그가 향한 곳은 정지선이 지워져 좌회전 ‘깜빡이’를 켠 채 어중간하게 도로 위에 멈춰 선 차였다. 그 운전자에게는 차를 앞으로 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0년째 출근길 교통정리



    30분쯤 지났을까. 대로변에 있는 건물에서 한 남자가 종이컵을 들고 나와 그에게 건넸다. 바쁜 수신호 중에도 그가 깍듯이 경례를 붙이는 차량이 있었다. 경찰 순찰차와 영업용 택시였다. 한 시간 남짓 지켜보는 동안 대형 버스와 자동차,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옆을 아슬아슬 스쳐 지났지만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꼿꼿했다.

    오전 9시 5분경, 마침내 교통정리를 마치고 인도로 올라선 그와 만났다. 어렵사리 얼굴을 마주한 주인공은 20여 년째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는 ‘모범운전자’ 이필준(55) 씨였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늦게 나왔다”는 그는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주머니에서 문구용 칼을 꺼내 들고는 인도에 세워진 철제난간 위로 올라가 현수막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선거 때는 물론이고 하루에도 수차례 새로운 불법 현수막이 내걸린다. 구청에서 일손이 모자라 제때 단속이 안 되니 누구라도 나서서 없애야 거리가 깨끗해지지 않겠나.”

    불법 현수막 철거는 교통정리 봉사와 함께 20년째 그의 매일 아침 일상이다. 택시기사에게는 하루 중 피크출근시간대에 영업을 포기하고 말이다. ‘출근발이(손님이 많아 수입이 좋은 출근시간대에 일하는 것을 일컫는 택시기사들의 언어)’는 잊은 지 오래다. 현수막 상습 부착 지점이 혼잡한 대로변이다보니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릴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현수막을 철거하고 사다리를 내려오는데 장승배기 방향에서 달려오던 차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회전하는 바람에 인도에 바짝 붙어서 돌았다. 그 순간 사다리와 나를 동시에 치면서 사고를 냈다. 통증이 심해 바로 병원에 갔더니 오른쪽 어깨 근육이 일부 파열된 ‘염좌’라고 했다.”

    그는 생업을 접고 10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에도 20일가량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현수막 철거 후 그가 들른 곳은 대로변 건물 3층의 ㈜세원이엔피디였다. 교통정리하는 그에게 종이컵을 건넨 남자를 궁금해하자 그가 안내한 곳이었다. 이 회사 이왕종 사장은 “이 기사님이 추운데 교통정리하며 고생하니까 우리 직원이 커피를 갖다준 것”이라며 웃었다.

    “신대방삼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사무실이 있다보니 10년 넘게 매일 아침 교통정리를 하는 이 기사님을 지켜봐왔다. 처음엔 ‘돈 생기는 일도 아닌데 언제까지 할까’ 싶었는데 한결같이 수고하시더라. ‘저런 분이 많이 나타나면 이 사회가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는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기분 좋은 것 아닌가. 그런 진정에서 우러나는 봉사를 하는 게 마음에 와 닿아서 나와 직원들이 추운 날이면 커피를 타다드린다. 외투도 없이 얇은 옷을 입고 두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면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커피 한 잔이 뭐 그리 도움이 되겠나.”

    충북 옥천이 고향인 이 사장은 9년째 매달 고향의 조손가정, 한부모가정 아이들 20여 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한다. 옆에서 잠자코 이 사장의 말을 듣고 있던 이씨는 “커피 한 잔이 내겐 너무 감사하다. 종종 창문 열고 고생한다고 손 흔들어주고 인사해주는 게 내게는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무보수 서울시 알리미

    이 사장과 헤어진 그는 택시영업에 나설 짬도 없이 서둘러 서울시청으로 향했다. 10시 50분경 신청사 10층 회의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40분 뒤에 열리는 ‘서울시 거리모니터요원 표창’ 수여식에서 상을 받는다고 했다. 이씨를 포함해 12명의 ‘우수 거리모니터요원’과 ‘우수 공무원’이 작년 한 해 동안 서울 시내 곳곳에서 보행에 지장을 주는 불편사항을 신고해 신속히 보수한 공로로 시장 표창을 받는다는 것. 주무 부서인 서울시 보도환경개선과 표창 담당 공무원은 “이 기사님은 작년 한 해 동안 신호등 고장, 파손된 보도블록 등에 대해 총 100여 건의 신고를 해왔다. 택시 운행을 하면서 무보수로 1년간 서울시의 ‘알리미’ 노릇을 한 것”이라고 했다. 표창장을 받은 이날도 그는 서울 영등포역에서 여의도 방면으로 향하는 교차로에서 파손된 보도블록을 발견하자 차를 세운 뒤 사진을 찍어 서울시 콜센터에 신고했다. 시상식장에 참석한 이씨의 큰딸 선은(32) 씨는 아버지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기뻐했다.

    “어릴 땐 가족을 돌보기보다 봉사에 빠진 아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학 진학, 결혼, 사업 등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풀리는 걸 보면서 그동안 아빠가 사람들을 도와준 은덕이 자식인 내게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시상식 모습을 보니 아빠의 봉사가 헛되지 않은 것 같아 자랑스럽다.”

    기자는 이씨를 이틀간 밀착 취재하면서 여러 지인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영업용 택시를 몰면서 봉사에 빠져 있으니 돈은 언제 버나?” 하고 걱정했다. 서울 동작구 주민인 그는 현재 동작구 모범운전자회 회원으로 교통정리 봉사를 하는 것 외에 동작구청 시민명예감사관 및 상도3동 자율방범대 홍보부장, 한국방송공사(KBS) TBN 교통통신원, 서울지방경찰청 치안행정모니터요원, 서울소방재난본부 명예소방관, 사단법인 한국청소년행동과학문화원(이사장 이탁규) 산하 청소년방송국 기획실장 등 수많은 직책을 갖고 있다.

    2012년 여름에는 방재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태풍이나 홍수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보다 체계적인 봉사활동을 펼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해 7월 중순 새벽 3시 30분쯤 성동구 응봉동의 한 도로를 지나다 도로 침수로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상황을 목격하고 택시 영업을 포기한 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우선 침수 차량을 물에 잠기지 않은 도로로 밀어내고, 배수로 출구를 찾기 위해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위험 상황에서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취수로를 확보했다. 그 결과 차량과 보행자가 무사히 통행할 수 있게 됐다.

    “나 하나 수고해서 많은 사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봉사는 피로회복제다.”

    교통정리 봉사로 ‘호루라기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은 이씨는 ‘강도 잡는 택시기사’로도 유명하다. 2013년 5월 27일, 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오후 4시 50분경 그는 차를 몰고 가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 용문시장 앞에서 술을 마신 40대 남성 한 명을 손님으로 태웠다. “근처 노래방으로 가달라”는 말에 가까운 원효로2가 교차로 부근 횡단보도에 차를 세우자 손님이 강도로 돌변했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투에서는 식칼이 나왔다. 강도는 식칼로 위협하며 운전석 앞 계기판에 놓아둔 현금다발을 내놓으라고 조용히 말했다. 차안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씨는 도로 한복판에 차를 급정차하고 재빨리 내렸다. 뒤따라 내린 범인이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이씨는 다행히 몸을 피했다. 범인은 돈을 꺼내기 위해 차 앞 엔진덮개 위로 올라가 칼로 수차례 앞 유리창을 찍었지만 유리창은 금만 가고 깨지지 않았다.

    “내겐 표창장이 재산 봉사는 피로회복제”

    지난해 12월 29일 ‘서울시 거리모니터요원 표창 수여식’에서 표창장을 받는 이필준 씨.



    ‘응급실 문은 열려 있다’

    당황한 범인이 근처에 있던 빈 택시를 잡아타고 도망가자 이씨가 곧바로 자신의 차로 택시를 뒤따랐다. 운전석 창문을 열고는 “차에 강도가 탔다”고 소리치자, 앞서 가던 택시가 섰고 강도는 차에서 내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빗길에 영화 같은 추격전이 벌어졌다. 이씨는 용산전자상가 사거리 부근에서 강도를 따라잡았고, 멱살과 허리춤을 붙잡고 엎어치기를 했다. 태권도 공인 3단인 이씨가 평소 몸에 익힌 기술이 빛을 발했다. 현장에 도착한 용산경찰서 형사들에게 범인을 넘기면서 강도 추격전은 막을 내렸다.

    “강도가 칼을 휘두를 때, 머릿속으로 중요 부위만 칼을 맞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병원 응급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거기 가서 지혈하고 꿰매면 된다’는 생각도 했다. 그랬더니 칼이 전혀 무섭지 않게 느껴지더라.”

    서대문경찰서 양찬호 경위는 “전국 어디 내놔도 이필준 기사만큼 하는 사람이 없다. 몸을 사리지 않을 뿐 아니라 봉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봉사관이 확고한 사람이다”고 극찬한다. 양 경위와 이씨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3·1절 자정을 막 넘긴 시각, 오토바이 500여 대가 여의도광장에 몰려들었다. 3·1절 기념을 빙자한 ‘폭주 행사’를 벌이기 위해서였다. 굉음을 내며 여의도에서 출발한 폭주족들은 서대문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들며 위험천만하게 내달렸다. 새벽 2시가 넘어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서 종로구 평창동 방향으로 향하던 이씨는 오토바이 50여 대와 마주쳤다. 그 순간 폭주족을 쫓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종로구 신영삼거리에서 폭주족을 단속하던 서대문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을 만난 이씨는 당시 교통과에 근무하던 신동일 경위를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함께 폭주족들을 추적했다. 경찰과 합동으로 단속에 나선 이씨가 폭주족 두 명을 붙잡아 서대문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그때 범인을 인계받은 사람이 당시 교통과에 근무하며 당직을 서던 양 경위. 양 경위는 이렇게 말한다.

    “각 경찰서는 모범운전자들을 모집, 심사하고 분기별로 교통과에서 점검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정에 밝다. 개인택시도 아니고 회사택시 영업을 하면서 하루 사납금을 채우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분이 생업을 팽개치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경찰을 돕는다. 그래서 표창장이나 감사장을 상신하려고 이필준 씨에 대해 조회하다 깜짝 놀랐다. 뺑소니범 검거, 인명구조 등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었다. 우리 관내 모범운전자로 영입하려고 여러 차례 권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동작구를 지켜야 한다’며 거절하더라. 가끔 만날 때마다 ‘봉사도 좋지만 가정과 건강 좀 챙겨라’고 하는데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웃음).” 이씨는 전북 김제군 진봉면에서 빈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들 공부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이리공고 전기과 야간을 다니면서 낮에 공장에서 일해 번 돈으로 학업을 마쳤다. 자전거를 타고 아침 8시 회사에 도착해 오후 4시까지 일한 뒤 곧바로 집에 돌아와 씻고 등교하면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졸음이 쏟아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2학년 2학기를 마칠 때쯤 적금 부은 돈으로 일을 그만두고 주간에 편입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아버지가 노름으로 다 날렸다. 집 앞에 있던 금싸라기 논밭과 산을 다 날리고도 빚이 남아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소나무 가지를 꺾으러 다녔다. 그걸 잘라 다발로 묶어 팔아서 남은 노름빚을 마저 갚았다.”

    ‘월세살이’ 봉사대장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철강회사에 입사한 그는 24세에 군에 입대해 육군병장으로 제대했다. 20대 후반에 다시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 입사했다. 택시와 인연을 맺은 건 한 대학병원에서 앰뷸런스를 운전하면서. 이씨는 “그때는 시간이 많아 부업으로 짬짬이 택시를 몰았다. 군 입대 전 몇 백만 원이던 퇴직금을 동생 학비로 주고 결혼할 때 손에 쥔 돈이 30만 원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는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힘드니까 부업을 했다”고 말했다.

    슬하에 3녀를 둔 그는 지금 15평 남짓한 월세 집에서 두 딸, 아내와 함께 산다. 회사택시를 운행하면서 월급을 받지만, 한 달 150만 원도 집에 가져가기 힘들다. 매일 회사에 입금해야 하는 사납금이 15만7000원이고, 회사에서 지급하는 기본 가스비용 외에 추가로 드는 가스비용까지 포함하면 적자를 면하기 쉽지 않다. 이씨는 “아내가 봉제기술이 있어 맞벌이를 해왔다. 아이들 뒷바라지는 아내가 다한 셈이다. 집에선 봉사활동을 탐탁지 않아 한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11월 초 사납금 100만 원을 빚져 회사에 택시를 압수당했을 때에도 그는 ‘운전 봉사’를 했다. 평소 잘 아는 교회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12인승 승합차를 빌렸다. 5년째 수능일이 되면 수험생을 고사장까지 태워 날라온 일을 멈출 수 없었던 것. 그의 아내로서는 ‘복장 터질’ 일이다. 사납금이 밀린 이유는 동작구청의 하수관 공사 현장에 17일 동안 투입돼서 택시 영업을 못했기 때문.

    사납금 못 내 택시 압수

    “내겐 표창장이 재산 봉사는 피로회복제”

    서울 상도3동 주민으로 구성된 자율방범대원과 관내 순찰에 나선 이필준 씨(맨 앞).

    “구청에서 구민을 위해 하는 공사니까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나. 공사 현장이 장승배기역 부근의 복잡한 도로였다. 교통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교통정리를 했다. 일이 다 끝난 뒤에 돈이 나왔지만 사납금은 매일 채워야 하니까 밀린 것이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녔다. 사채업자는 ‘개인택시는 담보로 빌려주지만 회사택시는 안 된다’고 하더라. 금융기관을 찾아 ‘회사 월급통장을 개설할 테니까 그걸 담보로 100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내 앞으로 된 재산이 전혀 없고 월세 계약서는 아내 명의로 돼 있어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회사에 찾아가 사정사정했지만 결국 택시를 빼앗겼다. 기가 막혔다. 처음으로 ‘살아서 뭐하나’ 싶었다. 좋은 사람도 많지만 각박한 세상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는 이때 동네 약수터에서 목을 맬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씨가 택시를 되찾은 건 한 달 전. 이씨의 한참 선배인 민중호 씨가 선뜻 100만 원을 내줬던 것. 그는 과거 동작경찰서 산하 민간단체인 한국청소년선도위원회 상도3동 분회 회장으로 이씨를 모범운전자이자 ‘20년 외길 봉사’로 이끈 사람이다. 민 전 회장을 따라 선도위원 자격으로 동작구 일대 교통정리 봉사에 나선 이씨는 2002년 모범운전자가 되자마자 민 전 회장의 봉사 구역이던 신대방삼거리를 물려받았다. 이씨가 봉사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뭘까.

    “천성 때문이다. 내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눈물 많고 정 많고 열정이 넘쳐 남의 일이라도 발 벗고 나선다. 나 하나로 아침마다 많은 사람이 빨리 가고 편안하다면 보람을 느낀다. 사람들이 가끔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땐 고맙다.”

    그를 누구보다 오래 옆에서 지켜본 이가 서초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서기종 경위다. 이씨와 같은 고향 출신에 중·고교를 함께 다닌 서 경위는 7년 전 교통과에 근무했다. 당시 모범운전자를 담당했던 그는 “어느 날 보니 내 친구가 모범운전자로 일하고 있더라. 서울 올라와서 한동안 못 만났기 때문에 그때 처음 봉사활동 하는 걸 알았다. 학교 다닐 때도 활달하고 남보다 앞장서는 걸 좋아했다. 그런 성격이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봉사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씨가 경찰서 부근을 지날 때 가끔 들러 두사람이 함께 식사하곤 한다. 서울시청에서 표창을 받자마자 이씨가 서둘러 ‘갈 곳이 있다’며 향한 곳도 서초경찰서였다.

    “교통정리 신호봉이 망가지자 서 경위가 새로 챙겨줬다. 지금 교통정리 할 때 쓰는 모자도 이 친구가 교통과에 근무할 때 쓰던 걸 경찰마크를 떼고 준 거다. 두툼한 하얀 가죽장갑도 사줬는데 아끼느라 함부로 안 낀다. 오늘 표창 받는다니 일찌감치 축전과 꽃다발도 보내줬다.”

    서 경위는 “공무원 월급이 박하다보니 경제적 도움도 못 주고 특별히 챙겨준 것도 없는데 작은 것에도 친구가 너무 고마워하니까 오히려 미안하다”며 이씨의 손을 꼭 쥐었다.

    이틀에 걸쳐 이씨와 동행하며 밀착취재에 나서게 된 건 한 통의 제보 전화 때문이었다. 지난해 11월 초 애견을 잃어버렸다가 이씨의 도움으로 찾았다는 김지영 씨는 “식별표가 달린 목줄을 풀어놓았는데 잠깐 사이 강아지가 사라졌다. 골목을 다 뒤져도 안 보이기에 평소 산책길을 따라 장승배기역까지 갔다. 그곳 한 동물병원에서 웬 아저씨가 우리 애를 안고 있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저씨 덕분에 찾았다. 사례비를 드리려고 했더니 끝까지 안 받았다”고 전했다. 이씨가 강아지를 발견한 건 하수관 공사 현장에서 교통정리를 할 때였다.

    특수강도 등 13명 붙잡아

    새해를 앞둔 2014년 12월 30일 오후 9시 30분경, 이씨는 과일가게 사장, 중국음식점 사장, 의류봉제공장 사장, 택시기사 등 동작구 상도3동 주민으로 구성된 자율방범대원과 함께 관내 순찰에 나섰다. 이씨는 “우리 관내는 오래된 주택가와 재래시장, 유흥가, 학교와 공원이 밀집해 밤이면 인적이 드물고 으슥한 곳이 많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방범대 순찰차를 따라 10분 남짓 달리자 가파르고 좁은 언덕길로 다가구주택이 이어졌고 인적은 드물었다. 그곳에서 10대 남학생 두 명이 황급히 손을 뒤로 가져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순찰차 경광등 불빛이 보이자 담배를 피우다 급히 숨긴 것. 이씨는 매주 2~3회 자율방범대원으로 활약한다. 자율방범대 활동을 마치고 밤 11시 반경 기자 일행과 헤어진 이씨는 곧바로 택시 영업에 나섰다.

    “아침에 교통정리하러 가야 할 때 손님이 인천공항이나 의정부, 분당처럼 먼 곳을 가자고 하면 태울 수가 없다. 교통정리 시간에 늦기 때문이다. 그럴 땐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떤 땐 아침밥을 못 먹고 나올 때도 있다.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다가 인도 한편에 놓아두고 틈틈이 먹는다.”

    모범운전자로 택시영업을 하며 지금까지 이씨가 잡은 범인은 뺑소니범, 특수강도범, 절도범 등 13명에 달한다.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청장, 서울지방경찰청장, 용산경찰서장 등으로부터 받은 표창장만 헤아려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그뿐 아니라 교통안전 공로로 받은 국무총리 표창, 인명구조와 재난구호 등으로 받은 감사패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받은 표창장과 감사패가 줄잡아 30여 개에 달한다.

    “한 푼 가진 건 없지만 나한테는 표창장이 재산이고 돈”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 앞으로도 봉사의 열정이 식지 않으리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