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런웨이 위에서 ‘인생 제2막’…시니어들의 도전

“모델 활동하는 엄마, 표정 밝고 긍정적이라 좋다”

  • 이지은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janellelee@naver.com

    입력2021-08-16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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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야흐로 시니어 비즈니스 시대

    • 고령 인구 타깃 광고 모델 급부상

    • “활발하고 건강하게 나이 드는 방법”

    • 좌절된 꿈에 도전하는 ‘자아실현’

    • 고령층 지갑만 노린다는 비판도

    박영화(60) 씨가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니어 모델연기 과정의 포토포즈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지은 제공]

    박영화(60) 씨가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니어 모델연기 과정의 포토포즈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지은 제공]

    “몸 조금만 정면으로 돌려 보세요. 좋아요.”

    사진작가의 목소리와 함께 연신 플래시가 터졌다.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은 모델이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포즈를 취했다. 공간을 채운 다른 사람들의 모습 역시 범상치 않았다. 뾰족한 화이트 색상의 힐과 과감한 슬리브리스 드레스, 쨍한 레드 재킷, 비즈로 반짝이는 감색 모자 그리고 파격적인 보랏빛 수트가 눈을 사로잡았다. 개성 있는 디자인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 이들의 태도는 분명 ‘모델’이었다.

    “선생님, 그 상태로 살짝 웃어 보시겠어요?”

    이번에는 현장을 지켜보던 강사가 입을 열었다. 이에 모델이 “예” 대답하며 싱긋 입 꼬리를 올렸다. 그는 올해 예순을 맞은 ‘시니어 모델’ 박영화 씨다.

    사진 촬영이 한창인 이곳은 고려대 평생교육원이다. 박 씨는 2021년 1학기 교육원 시니어 모델연기 과정 2기의 회장을 맡았다. 올해 8월 정년을 앞두고 있는 박 씨는 36년 직장생활의 막바지에 홀가분함보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퇴직 후를 고민하던 어느 날 ‘당신은 몸이 받쳐주니까 모델을 한 번 도전해 보라’는 아내의 권유로 수업을 수강하게 됐다. 박 씨는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진행되는 수업과 관련해 “여기 나와서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앞으로의 계획까지는 고민한 바가 없지만, 그는 좋은 기회만 있다면 프로 모델에도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겉과 속의 아름다움 함께 가꾸다

    지난 5월 초 찾아간 서울 지하철 3호선 매봉역 인근의 또 다른 시니어 모델 교육 현장에서는 워킹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깔리자 모델들이 연습을 시작했다. 세 사람씩 정면을 향해 걸어가다 멈춰 포즈를 취하고, ‘턴’ 구호에 맞춰 자연스럽게 돌아서는 몸짓이 군무처럼 어우러진다.

    김정희(67) 씨가 이곳, 엘리트 모델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는 3개월이 됐다. 까만 스틸레토 힐에 꽃무늬가 두드러지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그 위로 남색 스카프를 둘렀다. 한양대 대학원 석사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는 “분주한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모델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는 수업을 들으며 뛰어난 자세교정 효과를 느꼈다. 걷는 것, 앉는 것처럼 일상적인 자세도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어깨와 무릎의 통증이 줄어 있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김정희 씨는 곧 아카데미 중급반에 들어간다. 물론 대학원 박사 과정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너무 재밌다. 하루하루 사는 게 정말 감사하고 즐겁다”고 말했다.

    시니어 비즈니스의 시대다. 저출산 및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시니어 세대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 국내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2019년 15.5%, 2020년 16.4%로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특히 50~60대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많고 구매력이 높은 시니어 층을 겨냥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급부상한 분야가 바로 시니어 모델이다. 유통업 등에서 고령 인구를 타깃 삼아 광고 모델로 시니어를 기용하려는 경향이 증가했다. 더불어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꿈꾸며 모델에 도전하는 시니어들 역시 눈에 띄게 늘었다. 이에 각종 모델 에이전시와 아카데미, 혹은 대학교 평생교육원 등에서 관련 교육 및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모델 지도사 교육원 UNY 컴퍼니의 이나영(40) 대표는 고려대 평생교육원에서 시니어 모델연기 과정을 지도하고 있다. 지난해 1기 25명과 시작해 올해 2년째 진행되는 모델연기 과정은 수강생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씨는 “내적 아름다움과 외적 아름다움의 공존”을 강조한다. 바른 자세를 배우고 워킹을 연습하는 일은 몸 상태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과 자신감이야말로 겉과 속의 아름다움을 함께 가꾸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EMA) 소속 모델들이 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맨 우측부터 정경숙(60), 박정빈(49), 김은정(53) 씨. [이지은 제공]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EMA) 소속 모델들이 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맨 우측부터 정경숙(60), 박정빈(49), 김은정(53) 씨. [이지은 제공]

    “엄마가 젊게 살았으면 한다”

    실제로 모델 활동은 시니어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올해 1학기 모델연기 과정을 수강하는 심부연(55) 씨는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기 위해 수업에 등록했다. 고려대에 재학 중인 아들의 반응 역시 긍정적이다. ‘엄마가 젊게 살았으면 한다’며 모델 수업을 적극 추천했던 아들은 “최근 엄마가 표정이 밝고 긍정적이라 좋다”고 말했다.

    옛날부터 모델이 하고 싶었던 유정윤(51) 씨에게 모델 수업은 자아실현 과정이다. 주변의 반대로 어릴 적에 꿈을 접었으나 지난해 출전한 모델 대회에서 결선까지 진출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 뒤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교육원을 찾았다. 유 씨는 모델 수업이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면서도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이것이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유 씨는 꾸준히 경험을 쌓아 모델 지도사 자격을 갖출 날을 꿈꾼다.

    단점도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시니어 모델 가운데 상당수는 수업 또는 활동에 있어 어려운 점으로 금전적 부담을 언급했다. 한 모델은 “시니어들은 ‘열린 지갑’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경제력을 지닌 고령 세대를 쉬운 돈벌이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풍조가 모델 업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EMA)의 대표이자 현재 모델로 활동 중인 알렉스 강(59) 씨 역시 “산업 내 병폐가 많다”고 언급했다. 과거 외국 기업에 종사하던 그는 2019년 모델 수업을 수강한 이후 본격적으로 모델 일에 뛰어들어 2020년 에이전시 업체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알렉스 강 씨는 직접 회사를 세우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시니어들의 돈만 보고 운영되는 모델 기관들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시니어 모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후죽순 생겨난 관련 사업들의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모델 교육’이란 명목 하에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높은 금액을 요구하는가 하면, 오히려 모델이 비용을 지불하고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거나 패션쇼 런웨이에 오르기도 하는 실정이다.

    이나영 UNY 컴퍼니 대표는 “프로들은 돈을 받고 일을 한다. 시니어 시장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값을 치르고 무대에 서는 경우가 90% 이상으로, 기본 30만 원에서 최대 3000만 원까지 돈을 내야 무대에 오를 수 있다. 이 대표는 “이력서 한 줄을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오늘도 ‘런웨이’ 위를 한 걸음 씩

    그럼에도 시니어 모델에 대한 전망은 밝은 편이다. 정경숙(60) 씨는 시니어 모델에 대해 “정말 젊고 건강해 보이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에이전시 소속의 2년차 모델인 그는 시니어 모델이 “활발하고 건강하게 나이 드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자녀들이 성인이 돼 독립한 뒤 노년기를 맞이하는 이들이 우울감과 무력감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모델 활동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델은 수많은 이들 앞에 노출되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어째서 많은 시니어들이 새롭게 뛰어드는 분야가 하필 ‘모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존재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그들이 지금껏 우리가 생각해 온 ‘노년’의 모습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는 까닭이다.

    한 자매가 올해 1학기 고려대 평생교육원에서 시니어 모델 수업을 함께 수강하고 있었다. “워킹을 시작하고 하루하루가 즐거워졌다”고 말하는 김민진(57) 씨의 얼굴이 봄처럼 화사했다. “지금까지는 자녀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희생했잖아요.”

    언니 미숙(60) 씨가 뒤따라 말했다. 그는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 수업에 왔다. “나도 같이 할래” 라며 따라왔던 여동생은 어느새 전업주부 타이틀을 벗고 프로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수업에 참석하기까지 왕복 네 시간의 이동 거리에도 김미숙 씨는 “그래도 오는 게 즐겁다”면서 생기 있게 말했다. 그는 오늘도 ‘런웨이’ 위를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시니어모델 #시니어비즈니스 #런웨이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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