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욱 지음, 동아일보사, 454쪽, 2만4000원
“심강(고재욱)의 이력은 단 한 줄로 족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어느 해 어느 날 입사, 어느 해 어느 날 몰(歿)’이라 기록하면 그것으로 할 말을 다 한다.”(‘인물론, 심강 고재욱’, 신문과 방송, 1977)
나절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위원, 논설실장(1956~1966)으로 재직하면서 고재욱을 지근에서 살펴봤다. 하지만 ‘20세기 한국 언론계의 큰 별’ 고재욱의 경력을 이처럼 단순화해 서술할 수는 없다. 겉으로 드러난 면만 평가하는 ‘수박 겉핥기’가 되기 때문이다.
고재욱 일생의 직장과 직업의 중심축은 동아일보였기에 직업인으로서의 그는 ‘동아일보의 고재욱’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언론사는 부침이 심했다. 평생을 한 신문사에서 보낸 인물은 고재욱 이전에 찾기 어렵다. 기자로 입사해 최고경영자 지위까지 올라간 인물은 더욱 드물다. 요즘은 일선 기자로 출발해 사장까지 지내는 언론인이 적지 않지만 ‘고재욱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재욱은 193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일제의 강압으로 동아가 폐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편집국장이 바로 그다. 광복 후 복간하면서 다시 편집국장에 복귀해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신문 제작과 논조를 총괄하는 주필을 맡았다. 그 역할이 막중했음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6·25전쟁과 1950년대의 반독재 투쟁, 4·19혁명, 5·16군사정변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고재욱은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신문사의 편집국장과 주필 자리를 지켰다. 그는 현대사의 목격자이자 증인이었다. 경력 표면에만 기초해 그의 일생을 연대기식으로 살펴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1968년 4월 17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신문재단 총회 폐회식에서 고재욱 당시 동아일보 사장(오른쪽)이 감사패를 받고 있다. [동아DB]
고재욱과 이력이 닮은 저자
고재욱은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생을 마친 1974년까지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 부사장, 사장, 회장,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고재욱이 기자로 출발한 해에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언론탄압의 고삐를 조였다. 점점 통제를 강화하다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0년 8월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하고 말았다.고재욱이 기자로 뛴 기간은 짧다. 일본 명문 교토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입사 2년 만에 부장, 8년 만에 편집국장으로 승진했다. 직접 기사를 쓴 시간이 길지 않아 언론인 경력에 비하면 남긴 글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신문은 원래 여러 기자와 필진이 집단적·유기적으로 작업한 결과를 지면으로 제작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상품이다. 취재와 제작 단계에서 데스크로 부르는 부장, 국장, 주필의 피라미드 꼴 조직이 참여하므로 편집국과 논설실 최고 책임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는 언론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는 초보적인 상식이다.
‘고재욱 평전’ 저자 남시욱은 이 책을 집필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조건과 자격을 갖춘 인물이다. 1959년 동아일보 수습 1기로 언론계에 입문해 같은 신문에서 편집국장을 지내고, 문화일보 사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이다. 고재욱과 비슷한 사내 경력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과 회장(1989~1996)을 지낸 이력까지 닮았다.
남시욱의 활동 분야와 범위는 동아일보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언론학자이면서 한국 정치계 보수와 진보세력, 6·25전쟁 등 무게 있는 주제의 책을 쓴 저술가다. 이런 경력의 언론인이자 교수, 저술가인 남시욱이 고재욱 평전을 썼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무게감을 지닌다. 평전을 집필하고자 저자는 관련 문헌을 섭렵하고 젊은 기자처럼 발로 뛰는 취재도 수행했다. 고재욱의 고향 전남 담양군 고택을 답사해 당시 모습이 어떻게 보존되거나 변했는지 돌아봤다. 또 친척을 만나 증언을 듣는 등 일선 기자의 현장 취재 방식으로 책을 썼다. 고재욱의 일본 유학 시절을 추적해 그가 졸업한 교토대 성적표까지 입수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이 책이 출간된 것이다.
경제기자 거쳐 편집국장으로
1952년 6월 정부의 야당 탄압을 사설로 비판했다가 구속된 고재욱 당시 동아일보 편집인이 이승만 대통령 특명으로 석방됐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1952년 6월 5일자 기사. [동아DB]
“왕년 동아일보의 경제부장으로 있을 때에 딱딱한 경제면을 나긋나긋하게 만들어 독자의 흥미를 사회면의 그것처럼 돋우는 기량을 발휘했다. 단아한 학자풍격이면서도 차고 매운 듯한 것이 고재욱 씨의 첫인상이다.”(‘신문인 백인 촌평’, 신천지, 1948)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고재욱은 편집국장에 복귀했다. 하지만 한 달 만인 12월 31일 당시 사장 송진우가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다. 고재욱은 1946년 4월 주필을 맡았다가 이듬해 7월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됐다. 신문의 핵심적인 직책 두 개를 동시에 수행한 것이다.
외부 활동도 병행했다. 그해 8월 10일 결성된 조선신문기자협회 위원장을 맡았다. 좌파 계열 선전지 구실을 하는 신문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다. 신문사 습격, 테러, 언론인 구속이 빈번하던 혼란기이기도 했다. 1946년 9월부터 1947년 8월까지 1년 사이에 테러단 습격으로 파괴된 신문사가 11개사에 달했다. 피습 언론인이 55명, 검거된 언론인은 150여 명에 달했다. 기자단이 미군정 당국에 언론인 신변보호를 여러 차례 요구했을 정도로 험악한 시대였다.
동아일보는 광복 이후 좌우익이 대립하던 혼란기와 1950년대에 반공-반독재(反獨裁) 투쟁의 선두에 섰다. 고재욱은 이 시기 동아일보 주필이었다. 정치 깡패가 폭력적으로 야당 집회를 방해하고,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환표(換票) 방식의 부정선거까지 이뤄지던 ‘무법천지’에 신문은 국민의 소중한 권리를 지켜줬다. 동아일보는 고재욱이 재직한 기간 한국 언론을 대표하던 신문이다.
‘고재욱 평전’ 저자 남시욱은 당대 동아일보의 위상과 고재욱의 활동을 살펴보며 자연스럽게 우리 현대사를 풀어나간다. 언론계 거목의 행적이 현대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규명한 것이다.
고재욱은 동아일보를 이끈 두 주역 김성수, 송진우와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학벌도 좋았기 때문에 입사 이후 순탄한 언론인의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경쟁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수난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고재욱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김구 선생이 암살되기 한 달여 전인 1949년 5월 동아일보는 이승만과 김구가 덕수궁에서 화기애애하게 만나는 장면을 몽타주한 사진을 실었다. 고재욱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편집국 고문으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피란 수도 부산에서 다시 주필 겸 편집국장직을 맡았다. 동아일보가 시련과 격동을 맞을 때마다 편집과 논설을 지휘한 그는 1961년 7월 주필 겸 부사장이 될 때까지 편집국장 7번, 주필 10번이라는 기록을 지니게 됐다.
고재욱은 1955년 4월 18일, 이른바 ‘괴뢰 오식사건’으로 동아일보가 1개월 간 무기 정간당했을 때 그 책임을 지고 편집고문으로 물러앉은 일도 있다. 당시 ‘한미섬유협정’ 기사 제목에 ‘괴뢰’라는 단어가 잘못 삽입됐다. 자유당 정권은 그것을 빌미로 정간 처분을 내렸다. 조판공의 단순한 실수가 낳은 사건의 불똥이 제작 책임자 고재욱에게 날아든 셈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였지만, 정권이 비판적인 신문에 극단적인 행정처분을 내린 것도 맞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네 차례 정간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같은 수난을 겪었다.
군사정변 이후 언론자유 투쟁의 선봉
1976년 6월 22일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고재욱 전 동아일보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모습. [동아DB]
동아일보는 1962년 7월 28일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논설을 실었다가 주필 고재욱과 논설위원 황산덕(黃山德)이 구속되는 일을 맞았다. 1961년 5월 군사정변 이후 1963년 12월의 민정 이양까지 약 2년 반 동아 동아일보는 7건의 필화 사건을 겪었다고 남시욱은 이 책에 쓰고 있다. 모두 고재욱이 주필이던 시절 일이다.
저자는 고재욱의 언론자유 투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박정희 정권이 강행하려 한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좌절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1964년 8월 1일 공화당은 이 법안을 국회에 상정해 8월 2일 밤중에 통과시켰다. 언론계가 이 법 시행을 반대하면서 이른바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이 시작됐다. 당시 한국신문편집인협회장 고재욱은 법안 철폐 투쟁의 중심 인물이었고, 법안 시행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고재욱은 1965년까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으로 언론계를 대표했고, 1962년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 창설과 동시에 이사장에 취임했다. 오늘의 프레스센터-한국언론진흥재단으로 성장한 기구의 전신이다. 그는 1965년 7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국제신문협회(IPI) 한국위원장직도 겸했다. 1966년에는 한국신문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고재욱이라는 언론계 큰 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언론과 현대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흩어진 퍼즐을 맞추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인간도 그가 살았던 시대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노를 저었거나 조타수 역할을 한 사람은 그가 산 시대를 더 넓은 시야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고재욱은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사실을 전달하고 비판하면서 자기 몸으로 부딪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평전은 의미가 깊다. 고재욱을 현대사의 맥락에서 되살려낸 저자 남시욱의 탁월한 서술 방법도 돋보이는 역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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