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연습 또 연습…‘동네 당구계’ 평정하고 프로로
김규식 해설위원 “피아비의 강점은 간절함”
김가영·히다 오리에와 자주 맞붙고 싶다
상금으로 고국 어린이들 위한 구충제, 마스크 기부
예쁘고, 기부 많이 하는 김연아처럼 되고 싶다
이주민? 주눅 들지 마라, 사람은 평등하다
7월 1일 충북 청주 ’피아비큐당구장’에서 만난 스롱 피아비 선수(31)가 여자프로당구(LPBA) 우승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피아비 선수는 “팬이 많은 선수와 맞붙어 리그가 흥행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지호영 기자]
몇 달 만에 ‘동내 당구계’를 평정한 피아비는 2014년부터 전국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여자3쿠션 세계선수권대회 3위, 2019년에는 여자3쿠션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대한당구연맹(KBF) 여자 랭킹 1위, 세계캐롬연맹(UMB) 여자 랭킹 2위에 이름을 올린 피아비는 지난 2월 프로 전향을 선언했다. 캐롬은 포켓이 없는 당구대에서 이루어지는 당구 경기를 뜻한다. 프로 무대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첫 출전한 여자프로당구(LPBA) 대회에서는 32강에 그쳤지만 6월 20일 두 번째 출전한 LPBA 대회에서는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큐대를 잡은 지 10년 만에 프로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것. 이제 피아비는 자신의 이름을 딴 당구장에서 자신의 서명이 새겨진 맞춤 제작 큐대를 사용한다.
7월 1일 충북 청주 ‘피아비큐당구장’에서 만난 피아비는 긴장한 듯 다소 경직된 모습이었지만 이내 가벼운 농담을 하며 능수능란하게 ‘한국어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큐대를 잡는 순간 그의 표정은 매섭고 엄숙한 플레이어로 바뀌었다. “나도 가끔 TV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고 말하는 피아비와 마주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여전히 대회 나가면 손이 떨려요”
- 자신의 이름을 딴 당구장은 직접 차리신 건가요.“남편이 아이디어를 내 창업하게 됐어요. 팬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생겨서 좋은 것 같아요. 어제도 당구를 치지도 않는 팬이 저를 보겠다고 부산에서 왔어요. 주로 ‘삼촌팬’이 많이 오는데, 물적·심적으로 응원을 많이 해줘요.”
- 대회 준비로 바쁘다고 들었는데요.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예전에는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했는데, 요즘은 인터뷰나 행사 일정이 하루에도 서너 개씩 생기더라고요. 대회도 중요하지만 팬들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어요. 남는 시간에는 항상 당구장에 있죠.”
- 긴장감이 큰 대회에 임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나요.
“당구는 멘털 스포츠예요. 저는 우주에 저와 공만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저 혼자만의 싸움이 되는 거죠. 상대방은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해요. 당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무척 외로워 힘들었어요.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말 통하는 사람도 없었죠. 그때 외롭게 혼자 연습한 게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지금도 대회에 나갈 때 남편을 부르지 않아요. 혼자 가서 하는 게 편해요.”
- 대회에 나가면 떨리지는 않나요.
“떨리죠. 손이 부르르 떨리기도 해요. 하지만 경기하는 도중이나 경기가 끝나면 남들한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꼭 이겨야겠다’ ‘우승해야겠다’고 생각하죠. 인생은 한 번뿐인데 이름을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 무대 체질이군요.
“그런 것 같아요.”
- 대회 준비는 어떻게 하나요.
“대회에서는 경기가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어떤 상황이 닥쳐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한 거죠. 대회 때마다 느끼지만 항상 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요. 기본기 훈련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죠.”
그의 말처럼 피아비의 장점은 성실함과 간절함이다. 오랫동안 피아비를 지켜본 김규식 빌리어즈TV 해설위원은 “피아비의 강점은 간절함에서 나온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피아비 선수와 우연히 연이 닿아 아마추어 시절 몇 번 레슨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저는 서울에 살고 피아비 선수는 청주에 사니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만날 때마다 여러 개의 질문을 준비해 오더라고요. 질문 수준이 높아 놀라기도 했지만 이론을 알려주면 저보고 ‘옆방에 가 있으라’고 해요. 그러더니 당구대에서 샷을 성공할 때까지 연습하더라고요. 그러고는 더 가르쳐달라고 해요(웃음). 당구는 피아비 선수가 낯선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게 해줬고, 당구를 잘하면 한국 생활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당구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라요.”
3만 원 큐대로 당구를 시작한 스롱 피아비 선수는 이제 자신의 서명이 새겨진 맞춤 제작 큐대를 가지고 대회에 나선다. [지호영 기자]
“김연아 선수처럼 되고 싶어요”
-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지고 나면 기분이 어떤가요.“패배가 확정된 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집에 와도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춰 있는 기분이 들어요. 집에 오는 동안 나만 시간을 피해 온 느낌이랄까. 대회가 끝나면 산책도 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죠. 감정과 컨디션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 늦게 선수생활을 시작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아마추어 대회를 평정했어요. 프로로 전향하고 곧바로 우승했고요. 재능인가요, 노력인가요.
“압도적으로 노력이 중요해요. 저는 선수생활을 늦게 시작했지만 남들이 한 시간 연습하면 두 시간 세 시간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훈련했어요. 노력으로 실력 차이를 벌려나가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다음은 운에 맡겨야죠.”
- 노력과 운이 적절히 작용해야 하는군요.
“제가 당구선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 한국에 왔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한 사람이 잘될 것 같으면 주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밀어주는 문화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여러 사람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이번 대회도 그랬지만 매번 예선이 제일 힘들어요. 항상 겨우 통과하는데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해요. 물론 연습도 열심히 하지만요.”
피아비는 이번에 우승한 LPBA 챔피언십 개막전 예선에서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상위 라운드에 진출했다.
- 좀 더 일찍 당구를 시작했으면 더 잘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요.
“아니요. 저는 지금 너무 감사해요. 한국에 올 수 있어 감사하고 주변 환경에 감사해요.”
- 라이벌로 생각하는 선수가 있나요.
“프로로 전향하니 만만한 선수가 하나도 없어요. 프로선수는 팬들을 위해 존재하잖아요. 인기가 많은 선수와 맞붙어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가영 언니(김가영), 히다 언니(히다 오리에)랑 자주 맞붙고 싶어요.”
2019년 설립된 여자프로당구연맹(LPBA)은 막대한 상금을 내걸고 스타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여자 당구의 수준은 당구의 고향인 유럽 못지않을 정도다. 김규식 위원은 “현재 LPBA는 별들의 전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현재 LPBA에는 네 명의 선수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포켓볼 대회를 평정하고 3쿠션으로 전향한 김가영(37·신한금융투자), LPBA 최다 타이틀을 보유 중인 이미래(25·TS샴푸), 세계여자3쿠션선수권대회 4회 우승에 빛나는 히다 오리에(45·SK렌터카), 그리고 스롱 피아비다.
- 롤 모델이 있나요.
“(피겨여제) 김연아 선수처럼 되고 싶어요. 예쁘고, 기부도 많이 하고, 돈도 잘 벌고 여러모로 부러워요.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저는 알고 있어요. 보통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내지 못할 일을 이뤄냈다는 게 멋있어요. 다문화 행사에서 만난 인순이 선생님도 존경스러워요. 다문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까지 지으셨더라고요.”
- 조국 캄보디아에서는 이미 김연아 선수만큼 인기가 많다고 들었는데요.
“하하. 캄보디아는 한국처럼 프로스포츠가 활성화돼 있지 않아 스포츠 스타가 별로 없어요. 최근에는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일하러 오신 분들이 저한테 많은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분들은 3쿠션도 모르는데 사장님들이 제 얘기를 해서 저와 당구에 관심을 갖게 됐대요. 이분들이 캄보디아에 있는 가족들에게 제 영상을 공유하면서 인지도가 더 높아진 것 같아요.”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라고 말하고 싶다”
- 인터뷰를 할 때 캄보디아 얘기를 하면 유독 눈물을 많이 보이던데요.“캄보디아를 너무 사랑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커요. 힘든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거든요. 누구나 태어나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잖아요. 한국에서 좋은 걸 많이 접해서 캄보디아 생각을 하다 보면 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아요.”
피아비는 고국을 향한 선행으로도 이름이 높다. 201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구충제를 기부했고, 지난 3월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고국에 마스크 5만 장을 보냈다. 당구장 벽면에 걸린 캄보디아 어린이들 사진 밑에는 “나는 이들을 위해 살 것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 기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나 자신, 우리 가족 챙기기에도 벅차요. 그렇지만 캄보디아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캄보디아는 한국과 달리 국가에서 도와주는 게 별로 없어요. 혼자 살아남아야 해요. 그래서 기부를 했는데, 행복하더라고요. 저는 옷도 잘 안 사요. 한국에서 파는 옷 가격은 캄보디아에서 몇 달치 월급이랑 비슷해요. 돈을 더 많이 모아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에요.”
- 최근 한국으로 이주해 오는 분이 많아지면서 다문화가정이 많아졌어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랬지만 처음 한국에 오면 주눅 들 때가 많아요.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니까 항상 당당하게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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