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호

깐부 할아버지 오영수가 묻는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황승경의 Into the Arte] 연극 ‘라스트 세션’ &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2-02-25 1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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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징어 게임’의 ‘깐부 할아버지’로 골든 글로브 TV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오영수는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인간 세상엔 악이 넘쳐나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부와 권력을 위해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남편을 죽이는 욕망의 세상에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배우 오영수. [파크컴퍼니]

    배우 오영수. [파크컴퍼니]

    2020년 영화 ‘기생충’, 지난해 ‘미나리’가 세계에 일으킨 돌풍을 이을 한국 영화가 올해엔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영화는 아니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다행히 그 여세를 이어가고 있다. 1월 10일 배우 오영수(78)는 ‘오징어 게임’으로 제79회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TV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59년 연기 인생이 꽃피운 순간이자 한국인 최초 골든 글로브 수상이라는 쾌거였다. 시상식은 우아한 정장과 레드카펫, 수상자로 호명되는 짜릿함, 눈물겨운 소감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시상식 자체가 없었다. 골든 글로브 홈페이지와 SNS에 수상자와 수상작만 덩그러니 공지됐다. 대외적으로는 오미크론 확산 때문이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다.

    올해로 79회를 맞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세계 각국 신문 및 잡지 기자로 구성된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Hollywood Foreign Press Association) 회원 투표로 수상이 결정된다. 해를 거듭할수록 골든 글로브의 위상은 아카데미상에 견줄 만큼 급상승했다. 회원 90여 명의 영향력은 막강했지만 불투명한 재정 문제가 늘 구설에 올랐다. 설상가상 인종차별 문제가 연달아 터지자 할리우드 대형 제작사와 톰 크루즈 등 배우들의 보이콧이 이어졌다. 매년 시상식을 생중계한 NBC마저 이에 동참해 수상 후보 발표가 유튜브로 중계됐을 만큼 올해 시상식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럼에도 수상자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 세계인은 수상자와 수상작을 주목하고 우레와 같은 찬사를 쏟아낸다.

    대체 불가 老배우

    연극 ‘라스트세션’ 포스터. [파크컴퍼니]

    연극 ‘라스트세션’ 포스터. [파크컴퍼니]

    수상 당일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인터뷰를 모두 마다하고 오영수가 향한 곳은 대학로의 한 극장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연극 ‘라스트 세션’ 무대에 섰다. 400석이 채 안 되는 작은 극장이지만 그의 존재감은 관객을 압도했다. 무대 위엔 ‘오징어 게임’의 ‘깐부 할아버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혈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1856~1939) 박사만 선명히 드러난다. 등장인물은 단 2명. 그의 상대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1898~1963) 역을 맡은 배우 이상윤이다. 루이스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가르쳤다. 프로이트 못잖은 영국의 대표적 석학이다. ‘박사’와 ‘교수’라는 직함만 보면 케케묵은 현학적 이론으로 관객에게 수면제를 선사할 것 같지만 막상 막이 오르면 객석엔 금방 웃음꽃이 핀다. 이는 오로지 배우의 힘이다.

    ‘라스트 세션’은 철학 서적을 재해석한 연극이다. 미국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은 실제론 만난 적 없는 루이스와 프로이트를 무대 위에 불러내 신과 종교에 대한 도발적 토론을 벌이도록 했다. 극의 원작 ‘루이스 vs 프로이트(원제-신의 문제, The Question Of God)’를 쓴 아멘드 니콜라이(94)는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의 정신과 임상 교수였다. 그는 수년에 걸쳐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수많은 저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루이스 vs 프로이트’는 그가 2002년 현역에서 은퇴하며 25년간의 연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니콜라이는 주장과 반론을 주고받는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마치 한 공간에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실감 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라스트 세션’은 2009년 초연 이후 2년간 총 775회 공연되며 미국 전역은 물론 영국, 스웨덴, 호주, 일본 등 전 세계를 매혹했다. 한국에선 2020년 처음 선보였는데, 당시에도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수작으로 손꼽혔다.

    오영수(오른쪽)는 연극 라스트세션에서 프로이트 역할을 맡았다. [파크컴퍼니]

    오영수(오른쪽)는 연극 라스트세션에서 프로이트 역할을 맡았다. [파크컴퍼니]

    신이 있는데 세상엔 왜 악이 넘치는가

    ‘라스트 세션’은 1939년 9월 3일 영국 런던 프로이트의 서재가 무대다. 이틀 전 독일이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한 터라 몹시 뒤숭숭한 분위기다. 1년 전인 1938년 9월,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와 평화를 약속하며 뮌헨조약을 체결하는 오판을 저질렀다. 영국이 치세를 이뤘다고 자신하던 영국인들은 그야말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서둘러 프랑스와 연합해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당시 런던에 피신해 있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위협을 느껴 고향 빈을 겨우겨우 빠져나온 것. 그는 구강암 말기로 병색이 완연하지만 총기는 또렷하다. 루이스는 깐깐한 프로이트의 초대를 받고 그를 찾는다. 루이스는 당시 영국 학계의 대표적 유신론자다.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며 그의 학문은 모두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일전에 프로이트의 무신론을 맹렬하게 비판한 전적도 있다. 이를 따지려 자신을 불렀으리라고 여긴 루이스는 심드렁했는데, 프로이트는 호의적 태도를 보이며 루이스의 주장에 관심을 보인다. 루이스도 점차 마음을 연다. 이렇게 시작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엔 왜 인간의 악과 고통이 넘쳐나는가’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들을 덮쳐오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종교와 인간, 고통과 삶의 의미를 넘어 유머와 사랑에까지 지칠 줄 모르는 논쟁만이 이어질 뿐이다. 무대를 꽉 채운 두 배우의 에너지에 관객은 숨죽여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인간의 악과 고통 ‘하우스 오브 구찌’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구치 창업주 일가의 치부를 다뤘다. [Universal Pictures]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구치 창업주 일가의 치부를 다뤘다. [Universal Pictures]

    이번 골든 글로브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은 경쟁이 치열해 수상자를 가늠할 수 없었다. 특히 전남편을 청부 살인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의 잔혹사를 파헤친 ‘하우스 오브 구찌’의 레이디 가가, 비운의 다이애나비를 그린 ‘스펜서’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전설적인 코미디언 루실 볼의 이야기를 다룬 ‘비잉 더 리카르도스’의 니콜 키드먼이 각축을 벌였다.

    이 중 ‘인간의 넘쳐나는 악과 고통’에 대한 문제작을 꼽으라면 ‘하우스 오브 구찌’가 있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전 세계 내로라하는 시상식 35개 부문에서 후보작에 오르며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뉴욕 비평가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가십을 몰고 다니는 팝스타 레이디 가가를 비롯해 알 파치노, 제러미 아이언스, 애덤 드라이버 등 쟁쟁한 배우의 열연이 눈에 띄지만 호불호는 극명히 갈린다. 백전노장 리들리 스콧(85) 감독의 최고 수작이라는 호평과 소문난 잔치 먹을 게 없다는 악평이 공존한다.

    영화는 구찌 창업주 일가의 화려한 가면 속 추악한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다. 구찌도 브랜드명을 창업주의 성(姓)에서 따왔다. 창업주 구초 구치(Guccio Gucci·1881~1953)는 이탈리아 중북부 피렌체 지방에서 모자를 만들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밀짚모자로는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16세 나이로 혈혈단신 런던으로 건너가 허드렛일하는 심부름꾼으로 사보이 호텔에 취업한다. 정문에서 손님들의 가방을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는 벨보이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는 전 세계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으로 자금이 몰려드는 시기였는데, 사보이 호텔은 대영제국에서도 최고 갑부들이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이었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포스터.  
[Universal Pictures]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포스터. [Universal Pictures]

    구치는 사보이 호텔의 로비를 오가며 부유층의 취향과 성향을 눈여겨보았다. 5년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가죽공장에 취업한 후 20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자신만의 브랜드를 창업한다. 그의 계획은 적중해 피렌체에 관광을 온 유럽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한다. 로마, 밀라노에 지점을 내고 멀리 뉴욕까지 구찌의 지점이 늘어난다. 구찌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경제력을 마음껏 과시하고 싶은 대중의 심리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대(對)이탈리아 경제교류 재개와 맞물려 구찌를 비롯한 이탈리아 명품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구치의 아들들도 함께 일했다. 장남 알도는 동분서주 소처럼 가업에 헌신한 반면 배우로 일하던 셋째 아들 로돌프는 영화 작업에 집중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영화계에 불어닥친 네오리얼리즘 열풍에 염증을 느낀 후에야 사업에 합류했다. 구초 구치 사후 그의 지분은 알도와 로돌포에게 반반씩 돌아간다. 열여섯 살이던 구찌 창립 첫날부터 아버지 가게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한 알도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가족 기업에서 경영권 다툼이 빈번히 일어나곤 하지만 구찌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큰 아들 알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로돌프는 아내가 일찍 사망해 외아들 마우리치오뿐이었다. 로돌프가 사망하자 로돌프의 주식은 외아들 마우리치오에게 모두 돌아가 마우리치오가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여기에 알도의 둘째 아들 파올로는 ‘파올로 구찌’라는 중저가 브랜드를 만들어 장인정신을 고수하던 구찌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만다. 아버지 알도가 노발대발하자 파올로는 도리어 사촌 마우리치오와 영합해 아버지의 등 뒤에 비수를 꽂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의 고발로 81세의 알도는 분식회계, 세금 탈루 죄명으로 철창 신세를 진다. 이는 구찌 가문 비극사의 서막에 불과하다.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인 실화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스틸컷.  [Universal Pictures]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스틸컷. [Universal Pictures]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마우리치오(애덤 드라이버)와 그의 부인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로돌프(제러미 아이언스)는 일찍이 상처(喪妻)하고 하나뿐인 아들 마우리치오만 보고 살았다. 로돌프는 금지옥엽 키운 마우리치오가 데리고 온 파트리치아가 전혀 탐탁지 않았다. 파트리치아는 미혼모의 딸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12세 때 양아버지 호적에 입적된다. 중견기업의 회장인 양아버지 덕에 파트리치아는 상류층이 됐고, 빼어난 미모와 친화력으로 마우리치오를 사로잡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마우리치오는 기어이 파트리치아와 결혼한다.

    마우리치오는 회사 경영에 별 관심이 없었다. 로돌프의 건강이 심상치 않자 그제야 아버지를 대신해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CEO에 오른다. 두 딸을 키우며 집안 살림만 하던 평범한 가정주부 파트리치아는 이때부터 야심을 드러내며 권력에 집착한다. 파트리치아는 어린 시절 경험한 가난으로 돈이 없는 삶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에겐 마우리치오가 없는 것보다 궁핍이 더 큰 공포였다. 파트리치아가 ‘구찌’에 집착하는 이유다.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를 조종해 사촌 파올로(자레드 레토)를 이용하고 큰아버지 알도(알파치노)를 몰아낸다. 탐욕스러운 파트리치아에게 염증을 느낀 마우리치오는 갑자기 집을 나가 외도를 일삼는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집에 들어오지 않자 파트리치아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떤다.

    지루한 위자료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5년 만에 합의점을 찾은 두 사람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샤넬에 버금가던 구찌는 경영 경험과 마인드가 전무한 마우리치오로 인해 급속도로 추락한다. 결국 1993년 바레인 소재 투자 펀드인 인베스트코프에 매각되고 만다. 마우리치오의 혈육인 두 딸이 구찌를 승계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파트리치아는 증오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아내가 남편을 죽인 비극

    1995년 3월 27일 재혼을 앞둔 마우리치오는 출근하던 중 괴한이 쏜 총에 목숨을 잃는다. 다음 날 모든 조간신문은 조직적인 마피아의 소행부터 단순 강도까지 다양한 추리를 해가며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파트리치아는 통곡하는 두 딸을 위로하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2년 후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 살인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된다. 유례없는 재벌 막장 드라마로 구치가(家)는 또다시 세간의 중심이 된다. 1심에서 파트리치아는 29년형을 선고받고 이후 항소심에서 26년으로 감형됐다. 18년이 지나 모범수로 석방된 그는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

    구치 가문의 흉측한 비극은 사라 게이 포든의 동명 소설로 2001년 출간됐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2011년부터 이를 영화화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암초를 만나다가 기어코 촬영을 마쳤다. 마우리치오가 피살된 날인 3월 27일 열릴 예정인 2022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하우스 오브 구찌’가 과연 트로피를 들어 올릴지 관심이 모인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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