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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 5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 김준하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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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인 민주당 신파의 노장파와 소장파가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쿠데타 첫날부터 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한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이나 장면정권 초기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던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에게 면죄부를 안긴 처사는 비극적 운명을 자초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정치장교들에 의해 쿠데타 모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장면정권 내부에서는 노장파와 소장파 사이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소위 ‘중석사건(重石事件)’으로 알려진 부패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소장파 리더인 이철승 의원이 중심이 된 ‘신풍회’ 소속 함종빈 의원이 중석사건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나섰다. 부정부패와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됐던 4·19혁명을 겪은 지 수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민들의 충격은 컸고 그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함의원이 폭로한 중석사건의 내용은 첫째, 중석 수출계약을 위한 입찰에 부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오이영 무임소장관과 문창준 중석사장 사이에 모종의 추문이 있다는 것이고, 셋째, 입찰 부정에는 100만달러의 ‘커미션’이 있었을 뿐 아니라 계약을 해준 대가로 통조림공장과 냉동공장 설치를 약속받았다는 등등 전형적인 정치자금 스캔들의 농도가 짙은 내용이었다.

항간의 풍설에 따르면 소장파 그룹인 신풍회가 노장파인 오이영 장관을 표적으로 삼아 폭로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내 중석사건은 국회로 비화돼 ‘중석사건 진상조사단’이 구성됐고, 김영삼 의원(후에 대통령)과 이상돈 의원이 중심이 돼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게 됐다.

국회조사단이 밝힌 내용 가운데 이목을 끈 것은 일본의 용공(容共)계 회사로 알려진 ‘동경식품’과 불리한 조건으로 중석수출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장면정권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사건의 발설이 집권당 내분의 원인이 된 만큼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의 중간역할이 주효해 민주당 신·구파의 연립내각이 성립돼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던 만큼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파란곡절 끝에 성립된 연립내각은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961년 1월에 끝장이 나고 또다시 약체의 장면내각이 출현하게 됨으로써 정국의 불안은 더욱 가중돼갔다.



나는 ‘중석사건’이 정계의 태풍으로 등장했을 때 장면정권 앞날에 대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 자유당정권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 자유당정권이 몰락한 직접적인 동기는 3·15 부정선거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 직전 자유당 정권이 보여준 작태는 그들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징후를 나타냈던 것이다. 첫째가 집권당이 강경파·온건파로 갈라져 서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약점을 극비리에 폭로해 자파의 당내 위치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연계자금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당 강경파들은 이재학, 김성곤 의원 등 온건파를 타도(?)하기 위해 연계자금 사건을 터뜨렸다. 연계자금 사건이라는 것은 은행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특혜융자를 받게 한 다음 그 대가로 리베이트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이용한 사건이다. 온건파도 즉각 반격을 가했다.

박정희의 포섭공작

그들은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철호, 장경근 등 강경파에게 상처를 안겨주기 위해서 세칭 ‘양담배사건’을 폭로했다. ‘양담배사건’은 자유당 중앙당이 일선 장병 위문용으로 전매청으로부터 공급받은 양담배를 시장에 팔아 착복한 사건이다. 더욱이 전매청이 보관하던 양담배는 길거리에서 어려운 서민들이 생계를 위해 팔던 양담배를 압수했던 것이어서 강경파 체면에 먹칠을 한 사건이기도 했다. 장면내각에서 벌어지는 소장파와 노장파의 싸움을 바라보면서 청와대는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장면정권이 발족한 지 한 달도 안된 1960년 9월10일 장면정권의 초대 국방부장관인 현석호씨가 정치장교들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자 정치군인들은 충무장에 모여 군의 정군운동을 포기하고 아예 새로 발족한 민주당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무력혁명을 계획한 사실을 이미 기술한 바 있으나 그때 이미 그들은 거사를 위해 담당부서까지 결정했다는 것이다. 총무에 김종필, 정보에 김현욱·정문순, 인사에 오치성, 경제에 김동환, 사법에 길재호, 작전에 옥창호·신윤창 등 5·16 쿠데타 이후 쟁쟁했던 최고회의 구성원이었다.

운명의 장난은 항상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동반하는가 보다. ‘충무장 모임’이 있기 하루 전날 장면정부는 구파에서 5부 장관을 영입해 그토록 바라던 연립내각을 수립했다. 현장관이 정치군인들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것은 자신의 퇴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쿠데타 그룹의 오치성 중령은 6군단 포병단과 육군대학 등에 혁명조직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 소장의 행적은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기도 하다. 민주당 신파 내 소장파에 의해 과거 행적에 대해 면죄부를 받은 박정희 소장 등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오직 쿠데타를 위해 그들의 조직을 강화해 나갔다. 박소장은 쿠데타 2년 전인 1959년 11월 중순부터 장형순 준장(후에 국회부의장)과 한웅진 준장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고 그들을 군의 핵심 요직인 CIC대장이나 9사단장에 취임시키기 위해 소위 ‘취직운동’까지 벌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집권당인 민주당의 사설기관인 ‘시국정화 운동본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집권당 소속의 민의원을 통해 극비리에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장면정권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던 박정희 소장 등 정치군인들에게 완전히 문호를 개방하고 있던 꼴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5·16 쿠데타 한 달 전인 1961년 4월10일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을 직접 찾아가 대담하게 쿠데타의 필요성과 계획의 개요까지 설명하고 참모총장의 협조를 구한 것으로 그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장도영 중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장군이 잘해 보시오”라는 말로 쿠데타에 대한 확답을 피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당시 청와대는 박정희 소장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물론 박소장이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된 사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도영 중장에 대한 육군참모총장 임명건에 대해서도 장면 총리와 같은 이북 출신이고 그들의 고향이 같다는 점이 참모장 임명에 영향을 준 정도로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또다시 ‘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의 기록을 빌리면 박정희 소장은 1961년 3월경 제2훈련소 최홍희 소장으로 하여금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방문케 하고 ‘구체적으로 혁명후의 정부형태와 정책 등을 메모까지 써가며 설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박정희 소장 등 쿠데타 음모집단이 어떠한 방법으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추진했나 하는 데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도, 그리고 관심도 없다. 다만 그들의 쿠데타 계획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도 수월하게 추진될 수 있었나 하는 데 관심이 있다.

몰락을 목전에 두었던 장면정권의 아이러니컬한 숙명적 행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박정희 소장이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원만하게 처리하도록 배후에서 건의하고, 김종필 중령 등 정치장교들의 하극상 사건을 무마시킨 것이 집권당인 민주당 소장파의 공(?)이라고 한다면, 박정희 소장 등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인지했으면서도 이를 끝까지 묵인해줬던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밀어붙인 민주당 노장파의 공로(?)는 다같이 본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5·16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몰락을 자초하는 데도 기여했다는 점이다. 운명이라면 너무나 잔인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 계획, 장도영에 통보

장면내각의 노장·소장파가 5·16 쿠데타 드라마의 조연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야당인 신민당으로 분가해 나온 민주당 구파 역시 쿠데타를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야당인 신민당도 처음부터 김도연계와 유진산계 두 파벌로 나뉘어 분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으로 떨어져 나온 것은 장면내각을 결정적으로 약체 내각으로 전락시켰을 뿐 아니라 장내각이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일부 무소속과 제휴하는 과정에 불미스러운 사태를 빚게 만들었다.

김도연계는 장총리가 5:5:2의 비율로 연립내각을 조직하자고 제의했을 때 이를 반대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장내각에 비협조적이었다. 반대로 유진산계는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장면정권에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장면 총리는 신민당의 분열을 적절히 이용하려 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장총리는 유진산 의원을 극비리에 반도호텔(현재의 롯데호텔)에 초청하고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곽상훈 민의원의장으로 하여금 유진산 의원을 국회부의장에 앉히도록 고도의 전략을 쓰기도 했다. 물론 유진산 의원은 이 제안들을 모두 사절했으나 장면정권과 유진산 의원의 밀착(?)설을 둘러싸고 야당 내부에서는 적지않은 불신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솔직히 4·19혁명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공민권의 제한’ ‘부정축재의 처리’ ‘부정선거 관련자의 처리’ ‘특별재판부 및 검찰부의 설치’ 등에 관한 혁명입법 처리가 지연된 이면에는 야당인 신민당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만은 없다.

야당인 신민당은 장면내각과 구 자유당 정권 관계자들의 유착관계, 그리고 부정축재자들과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폭로하고 맹렬히 공격을 가했지만 일부 언론은 도리어 야당인 신민당과 구 자유당 온건파 사이의 오래된 밀착관계를 지적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장면정권이 노장과 소장으로 갈라져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면 원내 제1 야당인 신민당은 김도연계와 유진산계로 갈라져 불신관계를 조성해갔다. 그러기에 정국은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야당인 신민당이 쿠데타 책임을 전적으로 장면정권에만 지울 수 없는 것은 1960년 9월9일 자파 소속 5명을 장정권에 파견해 연립내각을 성립시켰고, 5개 부처 장관 가운데 국방부장관 자리를 자기 당 소속의 권중돈 의원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 고위 장군 인사권은 장면 총리가 직접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9개월의 짧은 집권기간 중 1961년 1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야당인 신민당에서 국방부장관 자리를 차지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아닌가? 이미 기술한 바 있지만, 그 기간에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장교들이 요정에서 혹은 자택에서 그리고 군사령관실에서 반공개적으로 쿠데타를 모의했을 뿐 아니라 거리낌없이 군사전화를 통해 모든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이상 군의 총책임자인 국방부장관이 쿠데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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