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 글: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편역: 김유경

    입력2005-04-22 16:3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사진 왼쪽)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6과 #7이 앨런 코벨의 글). 비록 20여 년 전 씌어진 글이지만 오늘날 일본의 행보를 정확하게 내다봤을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제3국 학자의 냉철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①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의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br>② 백제 근초고왕 때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7개 곁가지가 있는 칼 ‘칠지도’.

    [#1]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자민당 내 헌법조사위원회는 현행 헌법에 대한 다양한 개정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을 서슴지 않고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이 삭제된다는 것은, 1920년대 전후에 그러했듯이 군부 세력의 득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현행 일본헌법 제4조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준다. 현행 일본헌법 4조는 ‘천황은 국가적 문제에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日王’의 부활?

    1920~30년대에 ‘신성 천황’ 개념은 일본 군부가 녹슨 칼 휘두르듯 내세우던 구호였다. 천황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던 군부는 ‘만세일계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이름으로 각종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금(1982년) 그런 것처럼, 교과서 내용을 왜곡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국신화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청동기 문화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화내용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일본보다 더 일찍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석기시대 일본으로 이주해 가면서 우수한 무기와 건국신화도 따라서 이동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현상으로, 앞선 문화와 앞선 기술의 무기를 가진 민족은 늘 그보다 못한 민족을 정복했다.

    역사왜곡 또한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보다 정직한 미술사를 선호한다. 중국 역사가들이 남긴 전형에서 보듯, 새 왕조를 연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전 왕조를 비난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를 아예 사상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는데, 옛 소련이나 북한이 책을 정직하게 기술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에 비해 일본과 서독은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민주국가라는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이나 난징 대학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독일이 히틀러를 영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왕에게 아무 권력도 없던 중세에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팽창정책에 천황이 이용되면서, 일본의 교과서는 선전도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자민당은 일왕을 상징적 존재 이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 그 실현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본인들은 이를 ‘국내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다. 불행하게도, 수백만명이 그것이 일본 내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임을 알고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한때 아시아 8개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여타 국가에도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세계의 문제’였다.

    악명 떨치던 일본 경찰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곤국가이던 1920년대에도 군국주의의 대두는 그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세계 제2의 부국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는 백배 더 가공할 사태를 불러올 것이다. 한때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경찰을 두려워했다. 한낱 동네 경찰이라 해도 일본에서조차 1930년대의 양식 있는 시민에게는 막강한 군부세력의 말단조직원으로 진정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여행길에 배의 상갑판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천황의 초상화를 싣고 가는 배의 상갑판에 올라간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억지로 내려서야 했다. 또 말이 날뛰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일왕비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남자는 ‘신성한’ 왕비의 비단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일본은 정말 ‘신성’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히로히토 천황이 취미인 물고기 표본에 심취하는 팔순의 멋진 노인으로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란다.

    [#2]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교토의 선사찰 대덕사 진주암의 선정원.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잇달아 2년간 한국식 솔직함과 일본식 편의(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거짓말하는 것)의 차이를 경험할 기회가 왔다. 하와이대에서 1975년 여름에는 일본 후류(風流) 연구여행을, 1976년에는 한국의 풍류 연구여행을 지원한 것이다. ‘후류’와 ‘풍류’ 모두 한자로 ‘風流’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풍류’라는 말을 격하시켰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해도 지식인층에서 맥이 이어졌다.

    미학적이며 심리적인 이 단어의 첫 글자는 ‘바람’이라는 뜻이고, 다음 글자는 ‘흐른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후류를 연구하는 동안 중국 시인 왕웨이(王維), 타오위안밍(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시를 읽었다. 그 시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떠나 매화나 달의 아름다움을 찾는 선승의 검박한 생활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속물적인 도락이었다.

    또한 후류 연구를 위해 일본에서 가장 섬세하다는 음식점 몇 군데를 소개받았다. 모두 후류의 자부심을 뽐내는 곳이었는데, 아름다운 솔밭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가에 앉아 조그만 히바치(화로) 위에 끓여낸, 한입거리도 안 되게 적은 세 숟갈의 생선요리를 먹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눈으로 즐기기 딱 좋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너무도 적은 양이었다. 그들은 그것은 ‘대단한 후류’라고 설명했다.

    다음해인 1976년 여름에 접한 한국의 풍류는 보다 명확해 보였다. 풍류는 엘리트를 위한 절묘한 음식맛이 아니라 시인 김삿갓이나 기생 황진이가 그런 것처럼 솔직하고 매인 데 없이 사물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에는 ‘인생은 흘러가는 것, 머잖아 죽음이 올 테니 우리는 살아가야지’ 하는 실존적 느낌의 움직임이 가득했다.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작의성(Contrivance) 또는 호벤, 솔직함이 없고 자연스러움도 없는 이 기질은 일본인의 성격에 배어난다. 그러니 일본 교육부가 나서서 (교과서 왜곡을 두고) 사죄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떻게 해야 일본인들이 솔직해질까. 1300여 년에 이르는 한일관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어떻게 해야 그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솔직해질 것인가.

    교과서 왜곡과 전쟁 징후

    나는 일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신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사이러스 피크 교수는 원자폭탄의 끔찍한 경험이 겨우 일본헌법의 전쟁금지 조항을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썼다. 이후 신세대가 성장했고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는 데 힘입어 일본의 1인당 소득수준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이제(1982년 현재) 세계인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파워가 서서히 고개 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이 일반 일본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 또한 일생을 이중적 얼굴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한국인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사회규범은 엄격하기 짝이 없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자민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신군국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 뻔하다. 그것도 점점 더 대담하게 말이다.

    아무도 고등학교 교과서 쓰인 몇 줄 글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곧 군인 적령기가 된다. 노골적으로 군을 미화하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일본 당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나설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3] 조지 샘슨에게 배운 일본사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곡옥,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1920~30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내가 샘슨 경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로 불리던 일왕 중에도 15세기에는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씨를 써서 팔아 연명하던 사람도 있다.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14세기에는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적통 장자의 후손은 지금(1982년 현재)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그렇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712년에 씌어진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9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4] “일본을 좋아하나 신뢰하진 않는다”

    “매켄지. 그도 한때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그가 쓴 장문의 글이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고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사하는 사설이 실린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일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황색 저널리스트’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랜슬럿 로슨의 ‘극동의 제국들’ 중에서)

    “매켄지는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 중 유일하게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짓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E. J 해리슨)

    매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글을 남겼던가. 그야말로 일본이 새로 내놓은 역사책이 거짓투성이임을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도우려고’ 저지른 한일강제합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본 교과서 논쟁이 한참인 오늘날(1982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여기 인용해 본다.

    “일본은 한국인을 억누르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식민정치를 시작했다. 민(民)과 융합하지 않고는 훌륭한 행정을 도모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통치하고 모욕을 주는데 융화는 불가능하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국가적 이상을 파괴하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과 양식을 뿌리뽑으며, 얼마든지 거저 부려먹을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한국인을 과소평가했다. 외교와 사회분야에서 일본은 전세계를 마치 어린애인 양 취급했다. 일본인은 한껏 미화하고 한국인은 무능력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본 문명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한국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저 노동력 착취 대상인 열등인간으로 대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을 전시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건축물을 공들여 세우고 철도를 부설해 국가 경제력은 무시한 채 시설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것들로, 오직 일본인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을 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잊었다. 미성년자들은 때리고, 성인들은 감옥에 보내고 엄벌을 내려 몰아세움으로써 황국신민이 되라고 충성을 강요했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이 반역자들을 키워왔음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에 한국문화를 깡그리 섬멸하고 일본어를 선뜻 배우려들지 않는 한국인들을 족쳤다.”

    매켄지는 일본 순사가 어떤 집이든 멋대로 수색하고 누구든 재판 없이도 벌주는 데 대해 썼다. 그들은 사람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물리적 고통의 한계가 ‘하루에 태형 30대(대나무 두 개를 묶어서)씩 사흘 연속 90대’이고 그 이상은 고통이 극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계산을 해냈다. 1916년의 공식 보고서에는 8만2121명이 그런 체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후에는 이런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3만2830명이 감옥에 갇혔다.

    불온사상, 코끼리 이야기

    일본이 이른바 ‘불온사상’이라고 간주한 사례 중에는 영국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한 키플링의 유명한 코끼리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는 두 번째 주인을 따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이것을 한국의 아이들에게 두 번째 주인인 천황을 받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은 한국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도구였다. 조선은행은 모든 종류의 통화를 관장하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을 마련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땅을 파는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은 자들에게 이전 가격의 20%밖에 안 되는 헐값에 땅을 넘겼다. 이렇게 땅의 원 경작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일본은 ‘농업을 개량’했다.

    난징 대학살도 일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일본은 후손에게 일본인들이 갸륵한 이타심을 발휘해 황인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사회 저변을 발전시킬 소명을 떠안았던 것이라고 가르치려나 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극동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 점이다.

    나는 1930년부터 일본어와 그 문화, 역사를 연구해왔기에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나는 1930년 이래 일본예술사를 진작시킨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쓰공이 주는 메달과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시코쿠섬이 해군기지인 것을 모르고 카메라를 갖고 그곳에 갔다가 가택연금되면서 동전의 다른 면도 잘 알게 됐다.

    나는 시코쿠섬을 멀리 떨어진 연인들의 소풍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 섬에 발 디딘 나를 그들이 매우 수상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 헌병은 내가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감시하고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따라왔다(프라이버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인을 아주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쓴 일본은 그들의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5] 1930년대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가

    1930년대에 나는 일본에 살면서 과거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어와 일본 예술, 문화를 더 공부했다. 일본사회에 나 자신을 투영해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학의 대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느라 기모노를 입고 다비와 조리를 신었다. 서양식으로 발달한 내 신체에 이런 차림으로 도쿄 요코하마간 급행열차를 타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던 시절은 악몽 같다.

    일본에 있는 동안 두 분의 스승을 알게 됐다. 나보다 갑절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지만 모두 영어가 유창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문기자였는데 천조대신 신사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 해서 불경죄로 심한 처벌을 받고는 기자직을 버리고 ‘안전한 직업’인 사업가가 됐다. 그는 지금 다이마루백화점의 사장이 되어 이를 서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다른 스승 후쿠이 리키시로 교수는 1920년대에 ‘15세기 일본의 유명한 수묵화가 중 몇 사람은 사실 한국인이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나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예술사에 박학한 그는 도쿄대학의 최고 교수직을 맡고 있었지만 그 발표 이후 이단으로 몰려 북동부 센다이의 도호쿠대학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의 연구발표는 일본학계에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때 그의 문하생 중 보수파 한 사람은 도쿄박물관장이 됐고, 서양인 문하생인 나는 그의 진보적 가르침을 좇는 미술사가가 되어 지금 서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1983년 2월 한국을 찾은 나카소네 총리(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자 일본 태생의 한국인 학생 하나는 내 강의를 ‘아집’으로 간주했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1930년대 일본에서 살았고 당시의 지배적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그때와 똑같은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군국주의, 또는 네오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은 같은 것이니까. 선량한 일본사람들은 1930년대의 그러한 군국주의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 밤, 나는 일본공보관에서 다몬 마에다 관장과 얘기를 나눴다. 미국 FBI 관계자가 1시간 전쯤 그곳에 와 있다가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관장은 책상 유리판 위에서 무슨 서류를 태우고 있었다. 관장은 한마디로 충성스런 일본인이었다. 그는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패전 후 유일하게 그가 도쿄시장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관장과 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았다.

    “이건 무서운 실수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군부가 저 잘났다고 그러는 거요. 시민은 그 사람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20~40년대의 정신을 되풀이하려는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과연 군부의 도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극동문제의 중심축은 한국

    처음에 나는 이번(1982년) 교과서 왜곡파동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리라고 봤지만, 자세히 검토하면서 의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을 없애기 위해 홍보해왔다. 현행 일본헌법은 그 골자를 사이러스 피크 교수가 작성한 것으로 서구적 이념의 소산이다. 피크 교수는 자신이 전쟁금지 조항을 삽입하도록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레이건은 할리우드 배우였을 뿐 아시아 문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레이건은 막강한 세계적 파워를 지닌 대통령으로, 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년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냐 마냐의 문제는 나이든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거리다.

    정직이 통하지 않고 계속 핍박당한다면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단순히 교과서 왜곡이나 전쟁금지조항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패전 이후 집권한 일본 자민당은 개헌위원회를 만들어 일본 천황이 상징적 존재가 아닌 국가기관이 될 것을 제의해놓은 상태다.

    이는 바로 과거의 전쟁 주동자들이 했던 짓이다. 그들은 천황을 국가기관으로 이용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천황이 국가문제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군부 인물들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 일왕이 권력주체로 나온다면 일본에 1930년대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내겐 ‘천황폐하’가 교토시내를 지나간다는 이유로 방문과 대문을 모두 걸어 잠가야 했던 기억이 있다. 1971년 자유시대에는 도쿄역 호텔에서 천황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일본은 어째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 일본은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덕분에 이제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세계 제2의 부국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인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고통을 들쑤시는가. 일본은 또다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는가.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 전쟁을 금지한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군부를 그 옛날처럼 파괴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법안에 서명하는 것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일본은 자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이 있어야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6]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이다.

    [#7]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계?

    1983년 2월 신문은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사진을 실어 보여주기 바빴다. 나는 수년간 한일 양국에서 생활하며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해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사진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카소네 총리의 얼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다케오 후쿠다 전 일본총리는 대중 앞에서 그의 조상이 15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 혈통임을 공표했다고 들었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가계 또한 후쿠다 전 총리처럼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이민 온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문화사를 공부하는 내가 들은 나카소네의 만찬 연설 중 핵심은 “6, 7세기 일본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과 문화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제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진 빚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들이(한국에) 진 문화적·기술적 빚이 6, 7세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이전인 5세기 전체, 부여족의 혈통으로 일본 천황자리가 채워졌던 시대까지 걸쳐 있다고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우호적인 말들이 새로 씌어질 일본 교과서에 반영됐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나카소네 총리의 조상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궁금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