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을 겪고 베트남에서 구정공세를 당하면서 미국의 반전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존슨 대통령은 결국 재출마를 포기했고, 아시아에서 철수를 공언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정말로 아시아에서 손을 뗄 것인가. 그것은 남과 북 모두에 지대한 관심사였다. 군사력은 북한이 한국보다 우세하다. 그러니 미군의 철수는 곧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 그리 간단하게 포기할 대상이 아니었다. 한반도가 공산화하면 일본의 안보도 위협을 받게 되면서 미국의 태평양 전략은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어느 한 국가가 공산화하면 아시아 대륙 전체가 공산화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이 불변의 철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미국은 ‘벼랑 끝 전술’로 재미를 본 북한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낼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1969년 3월 포커스레티나 훈련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포커스레티나 훈련은 완전무장한 공정대원 2500여 명이 미 본토에서 C141 대형 수송기로 31시간 만에 한반도로 긴급 공수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공수훈련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미 본토에서 1일 작전권에 들어 있음을 과시함으로써 북한에 섣부른 오판을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 것이다. 미국은 지상군이 일부 철수하더라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철저하게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오산 미 공군기지 주기장에 F106A 델타다트 전투기 편대가 특유의 삼각형 날개를 번쩍이며 줄지어 서 있었다. 미 본토에서 오산기지로 긴급 이동한 제318요격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들이다. 그리고 활주로 건너편에는 오키나와 나하기지에서 날아온 82요격전투비행단 소속 F102A 델타대거 전투기들이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양쪽 다 지난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이후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긴급 전진배치된 전투기들.
공중도발 타깃은 서해 5도?
이즈음 한국군과 주한미군 수뇌부들은 한시도 경계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은 포커스레티나 훈련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1969년)는 북한 김일성 수상의 회갑이다. 군부에서 위대하신 수령 동지에게 뭔가를 선사하려들 지 모른다. 도발을 한다면 이번에는 공중일 것이다. 군 수뇌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북한은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를 통해서 지상과 해상 도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공중 도발을 감행한다면 타깃은 어딜까. 서울은 휴전선에서 불과 40㎞밖에 떨어지지 않아 전투기가 발진 수분 만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서울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서울 공습은 곧 전면전인데 북한이 전면전에 대비하고 있는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북한 공군은 어디를 노릴까.
정보당국은 백령도를 포함한 서해 5도를 유력한 후보지로 꼽고 있었다. 백령도는 북한의 옹진반도가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으로, 북한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 고립될 위험이 있다. 북한이 백령도를 기습 점령해버리면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원치 않는 워싱턴 당국은 확전 대신에 북한의 서해 5도 점령을 현실로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미군은 아시아 전쟁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국이 발을 뺄 것이란 소문이 퍼지면 동요가 걷잡지 못할 정도로 극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북한이 노리는 바다. 기습침공에 취약한 서해 5도와 흔들리는 미국. 그야말로 국지전의 효과를 극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군 정보당국이 백령도를 꼽은 데는 중국의 금문도 침공도 큰 참고가 됐다. 금문도는 중국 푸젠(福建)이 코앞에 건너다보이는 대만의 영토로 여러모로 한국의 백령도와 비견되는 섬이다.
중국은 금문도와 그 옆의 마조도를 기습점령하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이에 대응해 대만 공군이 요격에 나서면서 1958년 8월23일에 금문도 상공에서 대대적인 공중전이 벌어졌다. 중국은 미그15와 미그17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대만 공군은 F86F 세이버 전투기로 대항했는데 공중전 결과는 29대 0. 중국의 미그기가 29대나 격추되는 동안에 대만 공군기는 단 1대도 피격되지 않았다. 대만 공군은 공대공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겨냥하고 발사하는 기관포와 적기 꽁무니의 열을 감지해서 추적하는 미사일 간의 싸움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