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정수장학회 사건 이면의 또 다른 진실

  • 이정훈 기자│hoon@donga.com

    입력2013-02-18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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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김지태 씨 사후 유족들이 조작한 김 씨의 유서. 유족들은 스스로 이 유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작은 사진은 기업을 경영해 일가를 이뤘던 김지태 씨.

    지난해 제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수장학회 ‘장물(贓物)’ 논쟁이 벌어졌다. 5·16군사정변 직후 부산에서 조선견직, 한국생사라는 실크 제조업체와 신발 제조사인 삼화, 그리고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등 여러 회사를 경영하던 김지태 씨가 1년 사이에 두 번 구속됐고, 그가 내놓은 부일장학회와 언론 3사의 주식을 기반으로 5·16재단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정수장학회가 됐으니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정권이 빼앗은 장물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정수장학회는 지금도 부산일보 주식 100%와 문화방송 주식의 30%를 갖고 있다. 총자산은 238억 원. 정수장학회의 명칭 ‘정수’는 박정희의 ‘정’에 육영수의 ‘수’를 합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은 1994~2005년 이 장학회의 8대 이사장을 지냈다.

    정수장학회가 김지태 씨의 재산을 강탈해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검증은 여러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와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다. 그러나 박 정권이 강탈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산헌납으로 처벌을 면하고, 김지태 씨가 계속 기업을 운영하게 됐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법처리를 받게 된 대기업 회장들이 수천억 원을 사회에 헌납하고 풀려난 것과 비슷한 경우라는 것이다.

    김지태 死後 등장한 유서

    ‘정수장학회는 장물’이라는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 주장을 거듭한 유족의 도덕성도 검증해봐야 한다. 김 씨의 유족은 수차례에 걸쳐 소송을 벌였는데, 그중에는 유족들끼리 제소한 것도 많았다. 대부분 재산 다툼 때문이었다. 이 소송에서 김지태 씨 사후(死後) 나온 김 씨의 유서는 가짜라는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을 거쳐 확정 판결한 것이니 유서 조작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김 씨 유족들은 스스로 그의 유서가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그것을 추인한 것뿐이다. 유족들은 왜 유서 조작 사실을 까발렸는가. 그 내막은 김 씨 유족들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유족들이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정수장학회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김지태 씨의 가족관계는 좀 복잡하다. 유족이 제기한 송사(訟事)의 판결문을 종합하면 그는 7남5녀 모두 12남매를 낳았다. 사별한 첫 부인의 사이에 9남매, 둘째 부인에게서 3남매를 낳은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그 시절 ‘소실(小室)’로 불린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의 아이를 낳은 소실은 두 명인데, 첫 번째 소실이 낳은 남매는 첫 부인, 두 번째 소실이 낳은 자식은 후처 앞으로 입적돼 있다. 봉건적 제도가 남아 있던 광복 전후엔 유력 정치인과 사업가들 중 소실을 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김 씨도 그런 시기에 사업가로 활동했으니, 지금 관점에서만 보고 소실 둔 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혁명자금 지원 요청 없었다

    김 씨는 1982년 4월, 74세로 타계했다. 그가 유력한 사업가였던 만큼 동부산세무서는 유족에게 상당한 금액의 상속세를 부과하려고 했다. 2011년 5월에 나온 서울고법 민사9부 판결문에 따르면 1984년 2월 동부산세무서는 상속세 94억 원, 방위세 22억 원 등 116억 원을 부과했다. 당시로선 거금이다. 고심하던 유족들은 유서 조작과 소송을 통해 상속세 부과를 피해 갔다.

    먼저 국세심판소에 심판 청구를 했다가 기각되자 대구고법에 상속세 부과 취소 소송을 내 승소하고, 대법원에서도 이겨 상속세 등을 내지 않게 됐다. 그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들이 조작한 김지태 씨의 유서(정식 명칭은 ‘유언증서’)였다. 당시 법원은 뒤늦게 등장한 이 유서를 진짜로 인정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2011년 대법원과 서울고법은 이 유서가 허위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허위로 보고 다시 판단하라며 파기 환송하자, 서울고법 민사 9부가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가짜라고 최종 판결했다.

    시점을 반세기 전으로 돌려보자. 김지태 씨는 ‘서울의 이병철, 부산의 김지태’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저명한 기업인이었다. 당시는 6·25전쟁 직후라 군인들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전쟁 직전 선출한 2대와,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바 있고 국회 국방위원을 지냈기에 유력 군인을 여럿 알고 있었다.

    1959년 박정희 소장이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김 씨가 사주로 있는 부산일보의 황용주 주필이 박 소장과 대구사범 동기라, 김 사장은 박 소장과 안면을 텄다. 1960년 4·19 후 박 소장은 부산을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5·16군사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1970년 11월 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김지태 씨(오른쪽).

    김지태 씨 유족들은 박정희가 5·16 전 ‘혁명거사자금’ 500만 환을 요청했으나 김 씨가 거절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씨는 1976년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을 냈는데, 여기엔 박정희나 그 세력이 혁명거사자금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없다. 진실화해위와 국정원의 과거사위도 찾아내지 못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변 직후 부정축재자를 골라 재산 환수 통보를 했다. 김 씨는 5456만3000환의 환수금을 내야 했다. 1962년 3월 박 정권은 김 씨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그의 부인(후처)은 외환관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1961년 해외에 나갔던 부인이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갖고 들어온 것이 밀수에 해당된다’고 해서 부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기업인이 언론을 한 것은 외도”

    그해 5월 군 검찰이 김 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하자, 그는 언론 3사의 재산 환원을 결심했다. 그는 ‘나의 이력서’에 ‘나는 소내(교도소 내)에서 측근 모씨로부터 내 기업체 중 문화사업체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들었다.…신문사나 방송국은 공영사업이므로 누가 경영하든 이 나라 매스컴 발전에 이바지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협상에 응할 심산이 섰다. … (나는) 석방된 연후에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버티었으나 막무가내로 어느 날 작성해온 각종 양도서에 강제로 날인이 이루어진 것이다’고 적어놓았다.

    언론 3사를 정부에 헌납한 후 그는 바로 석방됐다. ‘나의 이력서’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남고등군재는 피고인들은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뜻이 농후하다는 이유를 들어 나를 비롯한 전원에 대하여 공소 취하를 선고했다. … 애지중지 가꾸어놓은 부산일보와…막대한 사재를 들여 궤도에 올려놓은 한국문화방송과 부산문화방송은 1962년 5월 25일 5·16재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기본 재산을 토대로 하여 5·16 장학회는 1962년 7월 14일에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 헌납이 ‘정수장학회=장물’이란 논리의 근거다. 그는 정수장학회 헌납에 대해 평생 원한을 품었을까. 그는 ‘나의 이력서’ 후반부에 ‘1962년 5월 그로부터 오늘까지 (근 15년간) 5·16장학회에서 부산일보를 비롯하여 서울·부산의 양대 문화방송을 확장하여 잘 운영함으로써 내가 소망한 대로 문화사업이 이룩되어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한 바 큰 것을 알고 나는 항상 장학회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리고 ‘신문을 하자니 바른 논설을 펴지 않을 수 없고, 정치를 하자니 정의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을 신문답게 하려 하고, 정치를 제대로 하려는 마당에서는 신문과 사업, 정치와 기업을 다 같이 굳굳하게 세워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기업인으로서 신문을 경영한 것도, 정치에 뛰어든 것도 모두들 외도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밝혀놓았다.

    ‘구제금융’ 받은 세 아들

    언론 3사를 내놓았지만 그는 사업가로 실패하지 않았다. 삼두마차인 조선견직 등 세 회사를 내세워 고속질주했다. 그 시기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어떤 관계였을까. 1965년 그의 한 딸이 리틀 미스 유니버스로 선발됐다. 그의 자서전에는 박 대통령이 아들 지만 군과 함께 이 딸을 안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1968년 5월 박 대통령이 ‘위김지태사장(爲金智泰社長-김지태 사장에게 드림)’이라는 글귀를 달아서 써준 휘호 ‘성업백세(盛業百世)’의 사진도 실려 있다.

    박 대통령과 사이가 나빴다면 이 사진을 자서전에 싣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서슬이 시퍼런 유신 시절에 자서전을 냈으니 박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실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렵 박 정권이 그의 뒤를 봐줬다는 풍문도 있었다. 김 씨는 사업을 확장해야 하고, 박정희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으니 각자의 필요에 따라 조심스럽게 관계를 유지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였을 확률이 높다.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다. 가공무역으로 경제를 키우려고 한 것이다. 한국 무역사에서 1971년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해 처음으로 10억 달러 수출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1970년엔 7억 달러를 수출했다. 1970년 11월 30일,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듬해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하자고 다짐하는 자리였다.

    이날 박 대통령은 20여 명의 기업인에게 산업훈장을 수여했는데, 김지태 씨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진그룹 전신인 한진상사의 조중훈 대표가 최고상, LG그룹 전신인 반도상사의 구자경 사장이 동탑, 대우그룹 창설자인 대우실업의 김우중 사장이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 씨 자서전에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는 그의 사진이 실려 있다. 6년 뒤인 1977년 박정희 정부는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김 씨는 1억5000만 달러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 씨는 1972년부터 아들을 각 회사 대표로 임명했다. 장남에겐 조선견직, 차남에겐 한국생사, 삼남에겐 삼화를 맡겼다. 그가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기업 사정이 나빠졌다. 삼화는 신발 수출이 활기를 띤 덕분에 잘나가 1977년 종합무역상사가 됐으나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해 1979년 은행관리를 받게 됐다. 다른 두 회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김 씨는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 세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이 돈의 성격에 대해 유족들은 그들끼리의 소송에서 ‘구제금융’이라고 밝혔다.

    3사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한 1982년 4월 김 씨가 타계해 유족들은 상속을 받게 됐다. 상속은 재산뿐만 아니라 채무도 함께 물려받는다. 그들은 김 씨가 은행에 담보 설정한 부동산도 상속받아야 한다. 그런데 세 기업이 은행 돈을 갚지 못하면, 거액의 상속세를 내고 상속받은 그 부동산을 은행에 넘겨야 한다. 기업들이 은행 빚을 갚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속세만 날리게 된 것이다.

    기업 遺贈의 비밀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김지태 씨 유서는 가짜라고 최종판결한 서울고법 판결문. 유서 조작 경위가 상세히 설명돼 있다. 개인적인 정보는 지웠다.

    고민하던 유족들은, 김 씨가 담보로 내놓은 부동산을 세 기업에 증여한다는 유언을 해놓았다면, 이 부동산을 상속받은 기업은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법인인 기업에 ‘유증(遺贈·유언으로 증여)’된 부동산에는 상속세가 붙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이 경영을 잘해 빚을 갚는다면 기업을 경영하는 유족은 회사 명의로 그 부동산을 계속 보유하거나 회사 차원에서 현금화해 사용할 수도 있다.

    김 씨 사망 1년이 지난 1983년 7월 7일 유족들은 동부산세무서에 상속세를 신고하면서, 이 부동산을 세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증여한다고 쓰여 있는 김 씨의 유서를 제출했다. 유서는 사망 7개월 전인 1981년 9월 15일 작성한 것으로 돼 있었다. 유서가 나오면 증여는, 김 씨가 사망하면서 바로 이뤄진 것으로 본다. 김씨의 사망과 동시에 기업으로 토지가 유증됐으니 유족들은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김 씨의 자필 유언서가 나왔다고 하자 세무서 측은 필적이 다른 것 같다며 김 씨의 필적을 알 수 있는 문서 제출을 요구했다. 유족들은 생전에 김씨가 쓴 편지를 내놓았다. 필적이 달랐다. 그리하여 유서를 놓고 진위 논쟁이 일자 유족들은 모종의 시도를 했다.

    서울고법 민사9부 판결문에 따르면 김 씨의 고문변호사 A씨는 김 씨 장남의 친구였는데, 김 씨는 밤중에 그를 집으로 부를 정도로 가까이 대했다. 유족들은 A변호사를 통해 1982년 8월 부산지법에 ‘이 유서를 자필 유언증서로 검인해달라’고 신청해, 검인을 받아냈다. 이 검인은 유족들이 망인(亡人)의 자필 유언서라고 주장하는 유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지, 이 유서가 진짜라고 판정해준 것은 아니다. 이 유서가 진짜가 되려면 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1983년 7월 김 씨의 5남(첫째 부인 소생)이 부산지법에, 이 유서를 근거로 부동산이 세 기업에 유증된 것은 잘못이라며 유서의 효력을 다투는 소를 냈다. 유족들이 ‘5남 대 비(非)5남’으로 갈려, 유서의 진위를 놓고 소송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때 3남이 아버지를 모셨던 계모(김 씨의 후처)를 찾아가 “거액의 상속세를 피해 집안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니 협조해달라. 시키는 대로 증언해달라”고 부탁했다. 1984년 1월 계모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1981년 9월 자택에서 김지태 씨가 장남, 차남, 3남, 그리고 전처의 남동생(김 씨의 처남)에게 그의 부동산을 세 회사에 유증한다고 하는 말을, 왔다갔다 하면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짜고 친 고스톱’

    그때 부산지법은 이 유서를 쓴 사람이 3남이라는 것을 확인해놓고 있었다. 대필 유서는 효력이 없다. 하지만 ‘김지태 씨가 그러한 유언을 한 적이 있다’고 후처가 증언했기에, 1984년 3월 ‘유서의 효력이 없어도 세 회사로 부동산이 이전된 것은 김지태 씨의 생전 증여 의사와 일치한다’며 5남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민사재판에서 진 쪽은 대개 항소하지만 5남은 항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산지법의 1심 판결이 확정됐다. 김 씨의 유서가 진짜로 확정된 셈이다. 이것은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었을까. 2011년 서울고법 민사9부는 5남이 소송을 냈던 것에 대해 ‘유서에 의한 유증을 확인받아 상속세를 감면받기 위해 장남 차남 3남이 5남을 시켜 소(訴)를 제기하게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부산지법 판결이 나오기 직전인 1984년 2월 동부산세무서는 김 씨의 유서를 인정하지 않고 상속세 116억 원을 부과했다. 그 후 부산지법에서 승소한 유족들은 A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해 국세심판소에 심판 청구를 했다. 이 청구가 기각되자 그해 12월 유족 전원의 이름으로 대구고법에 상속세 부과 취소 소송을 냈다. 그 직전 세 기업을 상대로 김지태 씨 유서 무효 소송을 냈다가 패소한 후 항소하지 않았던 5남도 이 소송에는 원고로 참여했다.

    유족들은 이 유서가 진짜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1982년 8월 부산지법에서 받은 검인 심판서, 5남이 패소함으로써 김 씨의 유서임을 확정해준 부산지법의 판결문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자 1986년 3월 대구고법은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동부산세무서는 불복해 상고했으나 1986년 12월 대법원이 기각해 유족들은 최종 승소를 확정지었다. 상속세 부과를 취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세 기업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92년 도하 언론들은 한국생사 그룹의 부도를 보도했다.

    6남 “유서는 가짜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과거 정권의 비(非)인륜적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2005년 5월 국회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약칭 과거사법)을 만들게 하고, 그해 연말 4년 한시(限時)기구로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가정보원은 따로 ‘과거사위’를 만들었다. 유족들의 청구에 따라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지태 씨 재산 헌납 과정에 대해 조사했으나 유족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과거사위는 ‘황용주 씨가(김지태 씨에게) “부일장학회는 재산 내놓고 이사장 맡으면 공익사업 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 그러니 생사(生絲) 부문은 살아야 하고, 언론부문은 내놔야 안 되겠나”라며 언론 관련 재산 포기를 종용했다’고 정리했다. 정권이 빼앗아간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러던 2006년 6남이 서울중앙지법에 장남, 차남, 3남 등을 상대로 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6남은 김지태 씨 첫 부인의 소생인데 계모, 계모가 낳은 자녀, 김 씨의 두 소실이 낳은 자녀 등 이복형제들과 함께 친형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내면서 “유서는 가짜였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1심은 ‘무효행위 추인’과 ‘신의칙(信義則)에 반(反)한다’ ‘구상권 채권은 이미 소멸했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무효행위 추인은 무효 행위가 있었음을 알았는데도 추인한 것을 말한다. 원고들은 유서가 위조된 것을 알았고, 가짜 유서로 어떠한 결과를 보게 될지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으니 이는 무효행위를 추인했다고 본 것이다.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

    김지태 씨 자서전에 실린 1970년대의 가족사진.

    신의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을 신의에 따라 성실히 하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들이 20여 년 동안 위서가 진짜라고 주장하다 뒤늦게 말을 바꾼 것을 신의칙 위반으로 보았다. 김 씨 부동산은 여러 차례 매각되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구상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이유로 들었다. 2심도 유사한 이유를 들어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그러나 2010년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환송했다. 2011년 5월 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9부는 앞에서 정리한 대로 김 씨의 유서가 가짜인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유서를 근거로 세 회사에 김지태 씨 부동산을 증여한 것은 유효한 증여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서울고법 민사9부는 6남이 중심이 된 소송이 있기 전 이미 다른 재판에서 유족들이 유서는 가짜라고 주장했던 것을 사실로 인용했다. 법원은 2002년 5월에 있었던 재판에서 ‘A 변호사가 김지태 씨의 유서는 유족들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안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낸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국생사가 장남·차남·3남과 김 씨 명의의 부동산을 놓고 소유권 다툼을 했을 때, 장남·차남·3남이 ‘김지태 씨는 유언을 한 사실이 없다’는 답변서를 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고 적시했다.

    여러 유족이 다른 소송에서 유서가 가짜라고 주장했는데 법원은 무효행위 추인 등을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6남 소송에서 눈여겨볼 것은 계모가 6남 편에 선 점이다. 계모는 1984년 부산지법 재판 때 ‘집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김 씨가 유서와 같은 유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는 결정적인 증언을 해, 유서의 효력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게 했다. 그런데 이번엔 유서가 가짜라는 소송을 내는 데 참여했으니, 이전 재판에서 위증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법정에서 위증한 것은 중대한 범죄다. 유족들이 재산 때문에 김씨 유서를 조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정수장학회를 빼앗겼다며 돌려달라는 것도 진정성이 의심받게 된다. 그리고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거액의 상속세를 추징당할 수도 있다.

    모든 시효가 만료

    그러나 유족들은 이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형사소송법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일 경우에만 위증죄 시효를 25년으로 해놓고 나머지 범죄에 대해서는 15년 이하로 한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유서를 조작한 시점은 1981년이니 2006년 이후 모든 시효가 만료됐다. 유서 위조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므로 계모의 위증죄 시효는 15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효는 1996년에 만료되었다.

    상속세 추징도 마찬가지다. 세법은 사기나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상속세를 피한 경우에만 15년, 기타 경우는 10년으로 시효를 정해놓았다. 유족들은 유서 조작 사실을 공개해도 시효 만료로 상속세를 추징당하지 않는다.

    유족들은 어떤 이들이기에 유서를 위조했다가, 위조 사실을 공개하며 서로 싸우는 것일까. 어렵게 통화한 유족 중 한 명(첫 부인 소생)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유족들은 재산 다툼을 하고 있다. 6남은 우리와 동복(同腹)이지만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 이복형제들과 같은 입장에 선 것 같다. 아버지는 생전에 유서에 있는 내용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써놓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 우리가 썼다. 그때는 상속세 문제가 있어 모든 가족의 의견이 일치했는데, 지금 와서는 의견이 갈라졌다. 한국생사가 아버지의 유서가 없다는 의견서를 낸 것은 잘못 낸 것이라, 그다음에 다른 의견서를 냈다. 아버지의 유서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뜻은 분명 그러했다.

    계모의 위증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생각이 없다. 시간(시효)도 다 지났다. 5·16장학회 건은 우리가 아닌 아버지가 하신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재산을 강탈당했다고 본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전에 부일장학회를 하고 계셨으니, 강탈당한 재산을 되찾더라도 그대로 장학회 재산으로 둘 생각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김지태 씨는 일가를 이룬 기업인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자녀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자녀들은 그가 이룬 기업을 이어받아 전부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의 명의로 있던 부동산 등을 놓고 다툼을 하고 있다.

    그런 유족들이 정수장학회 반환을 요구했다. ‘정수장학회와 다이아몬드’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김지태 씨와 정수장학회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한 김영 전 부산MBC 사장은 “유서를 조작하고 재산다툼을 위해 조작 사실을 폭로한 유족들의 행태를 보면 정수장학회를 강탈당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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