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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 분석

美 한반도 정책 ‘숨은 손’, 보수기독주의 그룹

‘대북압박’ 로비하는 미국 최대 정치단체, 부시 넘어 브라운백으로

  • 김윤재 미국변호사, 미국정치 컨설턴트 younjae.kim@cox.net

美 한반도 정책 ‘숨은 손’, 보수기독주의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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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창립해 3000만명의 회원과 4만5000개의 소속교회, 50개의 회원교파를 자랑하는 전국연합의 정치적 파워는 워싱턴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법안을 반대하는 세력이 어떤 정치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이들과 대립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해에 선거를 치러야 했던 케리나 대쉴은 하루라도 빨리 이 법안의 통과를 원했다. 당의 대선후보와 원내대표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어느 민주당 의원이 나서서 법안을 저지하겠는가. 더구나 공식적으로 이 법안은 ‘악의 축’인 북한의 인권 문제를 개선하자는 것 아닌가. 한반도 문제에 21세기 미국정치의 새로운 강자가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1960년대와 ‘남부전략’

미합중국 헌법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미국 정치가 종교에 민감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해받던 청교도가 이민 와 세운 국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국사회에서 개신교는 암묵적으로 국교(國敎)와 같다. 대통령이 취임식장에서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이 그 상징이다.

개신교도가 아닌 천주교도가 미국의 대선후보가 된 것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 대통령이 된 비개신교도는 존 F. 케네디가 처음이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나의 종교적 믿음은 국정운영에 전혀 개입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두 가지가 충돌할 경우 종교를 버리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개신교의 힘이 막강한 워싱턴의 환경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면적인 정치활동은 이들의 로비로 만들어진 금주법(Prohibition)이 실패한 1920년대부터 위축되기도 했다. 대공황에 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민주당의 새로운 선거연합을 만들었다. 대다수 복음주의자가 자신들의 내면의 가치관(value)보다는 경제적 이해나 계층적 이해에 따라 투표했다. 정치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들이 다시 정치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은 40년이 지난 뒤였다. 반전, 저항문화, 민권. 남부의 백인 근로계층은 이러한 시대적 담론이 미국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법원의 결정과 연방정부의 정책으로 강행되는 인종융합이나 민권정책을 ‘수용할 수 없는 자치권 침해’로 간주했다.

공화당의 젊은 전략가 케빈 필립스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았다. 그는 사회·문화적인 이슈의 정치화가 30년 넘게 지속해온 남부지역의 ‘경제적’ 투표행태를 ‘가치관’에 따른 투표행태로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공화당이 그 가치를 실현할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보고서는 1968년 리처드 닉슨 진영에 의해 채택됐고, 닉슨은 대선에서 두 차례 승리하며 공화당이 앞으로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훌륭한 정치구도를 선사한다. 아직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른바 ‘남부전략(Southern Strategy)’이다.

이어 1973년 대법원이 여성에게 낙태를 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자, 공화당의 남부전략 속에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보수기독주의자들은 이를 저지할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결성된 단체들 가운데 주목을 받은 것이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다. 1979년 근본주의 목회자인 제리 팔웰과 보수세력의 전략가인 폴 웨이리치가 설립한 이 단체는 20세기 후반 기독우파가 중심이 된 최초의 정치단체로 기록된다.

이 무렵 근본주의자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기독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은 공화당 내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68년 이후 여섯 번의 대선에서 이룬 다섯 번의 공화당 승리는 이들의 입지를 계속 강화해주었다. 그나마 한 번의 패배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였고, 당시 민주당 후보는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복음주의자라 할 수 있는 지미 카터였다. 조지아주 출신인 카터는 남북전쟁 후 ‘원조(元祖)’ 남부에서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종교관이 민주당 후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텃밭이 되어가던 남부 11개주 중 7개를 차지하는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팻 로버트슨의 교훈

1980년 카터의 재선(再選) 실패를 복음주의자의 이탈 탓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제상황 악화와 지도력 한계는 전국민적인 실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 유권자의 눈에, 복음주의자인 카터가 세속적으로 행동한 것에 반해 세속주의자에 가까운 로널드 레이건이 복음주의자의 가치관을 대변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낙태와 동성애 반대는 물론 ‘악의 제국’ 소련과 치열한 냉전을 벌인 레이건은, 넓게는 보수주의자들의 대통령이자 좁게는 기독우파의 대통령이었다. 1984년 레이건은 재선에서 복음주의자의 70%가 넘는 지지를 받으면서 압승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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