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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대 전문기자의 중국 미래권력 심층해부 ④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리위안차오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 보시라이 충칭시 당 서기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빛바랜 ‘사대천왕’의 꿈 … 두 남자는 그래도 칼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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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뭐길래…

보시라이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자신의 나이다. 1949년 7월생인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우방궈(吳邦國), 원자바오와 함께 현 지도부, 즉 제4세대 지도부에 진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진입에 실패했고 홍콩의 정치 분석가들은 그가 2012년 가을 이후 구성될 제5세대 지도부에서 주요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후진타오 지도부 출범 후 그가 미처 예상 못한 일이 발생했다. 당과 국가의 지도부 연경화(年輕化) 정책에 따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위원은 70세, 부장(장관)급은 65세, 부부장(차관)급은 60세로 나이가 제한됐다. 게다가 2007년 10월 제17차 당 대회 때는 중앙정치국 위원의 제한연령이 만 68세까지 내려왔다. 당 대회 개최시점을 기준으로 만 68세가 넘으면 장·차관급 이상의 직책에 임용될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에 당선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17기 중앙위원 선출과정에서 적용된 연령제한은 이보다 더 엄격했다. 당 대회 개최시점에 만 68세가 넘은 사람은 물론, 당 대회 개최 당해연도의 1월1일을 기준으로 만 67세가 넘은 사람은 모두 중앙위원으로 선출될 수 없도록 한 것. 이에 따라 제17차 당 대회가 열린 2007년의 새해 첫날 현재 만 67세를 넘은 1940년 1월1일 이전 출생자는 모두 중앙위원에서 탈락했다.

제17차 당 대회의 인사를 주도한 쩡칭훙(曾慶紅)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은 1939년 7월생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설정한 연령제한을 어길 수 없다면서 후진타오의 거듭된 유임 요청에도 퇴진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발휘할 능력은 모두 발휘했다. 내가 질 책임도 모두 졌다. 이제 나는 중앙 지도부의 어떤 자리에도 있을 이유가 더는 없다”며 끝내 물러났다. 대신 그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자신의 계파인 왕강(王剛), 시진핑, 보시라이, 왕치산, 멍젠주(孟建柱), 저우샤오촨(周小川), 차오쭝화이(喬宗淮), 류위안(劉源) 등을 여기저기 깔아놓았다. 퇴진하더라도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보시라이는 쩡칭훙보다 꼭 열 살 아래다. 따라서 201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2007년에 쩡칭훙이 물러났듯 2017년 열릴 제19차 당 대회 이후엔 중국 지도부 자리에 머물 수 없다. 10년간 최고지도부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은 권력서열 1~4위의 핵심 요직은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장쩌민 전 총서기가 최고권좌에 오른 이후 당 총서기 및 국가주석,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총리, 전국 정협 주석 등 핵심 요직은 10년마다 주기적으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1950년 11월생인 리위안차오는 비록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상승세를 타고 있다. 우선 201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가능성이 100%에 가깝다. 그리고 일단 진입하면 2022년, 즉 72세가 될 때까지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

▼ 리·위·안·차·오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780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지난해 말 현재) 중국 공산당원 중 간부 640만명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당내 최고의 핵심 요직이다. 특히 각 성의 당 서기와 성장 등 4100여 개 요직은 모두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의 손을 거쳐 결정된다.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제17차 당 대회 이전엔 장쩌민과 쩡칭훙의 측근인 허궈창(賀國强) 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맡고 있었다. 2002년 말 당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후진타오 총서기는 집권 전반기(2002년 가을~2007년 가을) 당의 인사를 주무르는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지 못한 것이다. 집권 제2기에 들어선 후 주석이 리위안차오를 중앙조직부장에 앉혔다는 것은 리 부장이 그만큼 후 주석의 신임이 두터운 퇀파이의 핵심 멤버임을 뜻한다.

리 부장은 후 주석이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하던 1983년 12월부터 1985년 11월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끝으로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로 옮길 때까지 약 2년간 후 주석과 함께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일했다. 후 주석은 1982년 12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돼 1984년 12월 제1서기로 승진했다. 이 시기에 같이 일한 사람들이 바로 리 부장을 비롯해 리커창 상무위원과 류옌둥(劉延東) 정치국 위원이다. 이들 3인은 현재 퇀파이의 핵심이자 후 주석의 측근이다.

리 부장은 당시만 해도 서기처 서열에서 처음엔 후보위원에 불과했던 리커창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후 주석 후임으로 쑹더푸(宋德福)가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선출됐을 때 리위안차오는 9명의 중앙서기처 서기 중 류옌둥 다음의 차석이었다. 반면 리커창은 서열 6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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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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