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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실체와 환상 사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우연의 실체와 환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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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실체와 환상 사이

보이지 않는<br>폴 오스터 지음, 열린책들, 333쪽. 1만800원

나는 파리에 도착할 때면 잠시 체류했던 청춘시절 이래 여장(旅裝)을 풀기도 전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달려가곤 한다. 1000년 가까이 창공을 향해 고딕식 쌍 탑을 우뚝 세우고 있는 견고한 석조 예술품 앞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파리에 왔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뉴욕에 가면 여장을 풀면서 하루하루 그곳에 도달할 기회를 엿보곤 하는데, 허드슨강과 이스트강이 어우러지는 맨해튼 섬 동쪽 하단에서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 교(橋)가 그것이다.

나는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브루클린을 추천했고, 그래서 바로 이튿날 아침에 나는 그 지역을 한바퀴 둘러볼 셈으로 웨체스터에서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섰다. 지난 56년 동안 거기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탓에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세 살 때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이사를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전에 우리가 살던 곳 근처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마치 상처 입은 개가 그러하듯 태어난 본거지로 기어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현대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The Brooklyn Folies, 2005)의 첫 대목이다. 첫 문장부터 주인공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명제가 ‘죽는 일’임을 밝히고 있는 이 소설은 내가 뉴욕에 갈 때면 그의 또 다른 소설 ‘뉴욕 삼부작’(The New York Trilogy, 1985~86)과 함께 챙겨가는 필수품인데, 이는 나만의 여행법과 관계가 깊다. 곧 뉴욕에 갈 때에는, 더욱이 브루클린에 갈 때에는 폴 오스터의 소설과 함께할 것! 혹자는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는 일’이 주인공의 중요한 화두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장소로 지목된 브루클린이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나는, 어쩌면 청춘시절이 도래하기도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왔는데, 요체는 살고 싶은 곳과 마찬가지로 죽고 싶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래서인지 소설가가 막 되었던 20대 중반에 이런 문장을 당돌하게 소설에 부려놓기까지 했다.

언젠가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지요.(중략) 우리 집 그분이 저 벌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답니다, (중략) 죽을 때는 꼭 예 와서 죽고 싶으이, 그 한마디였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자기가 죽을 자리를 찾아 평생을 떠도는 것이 아닐까, 이사 온 첫날 밤 그분과 나란히 누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쓰는 순간에는 분명 찰나적이면서도 오롯이 잡히는 성찰 속에 한 문장 한 문장 공들여 빚어낸 문장이지만,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쓴 글(소설)을 읽을 때면, 치기(稚氣)로 뭉쳐진 열정의 산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젊은 날에는, 죽을힘을 다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폴 오스터처럼,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으면서도,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해나가며 닥치는 대로 글쓰기에 자신을 내맡겨야 함을, 그것은 신인시절에만 허용되는 특권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중략) 작가가 되는 것은 (중략)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자전적 에세이집을 출간할 당시 폴 오스터의 나이 쉰. 명문 컬럼비아 대학 출신이 세속적인 어떤 직업도 마다한 채 글쓰기의 골방에 처박힌 이야기. 이 산문집의 원제(原題)는 ‘Hand to mouth’. ‘그날 벌어 그날 먹기’라는 뜻인데, 번역 출간 과정에서 ‘빵 굽는 타자기’라는 기발한 제목으로 태어났다. 작가로서의 절정기에 오른 쉰 살의 폴 오스터는 하루살이처럼 그날 글을 써서 벌어 그날 먹어야 했던 작가 지망생 시절의 초심을 이 책을 통해 치열하게 되새긴 셈이다. 힘든 시기를 거쳐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입지를 부여한 작품은 ‘뉴욕 3부작’과 ‘고독의 발명’(The In-vention of solitude, 1982). 어느 날 한 통의 잘못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되는 ‘뉴욕 3부작’은 폴 오스터 소설의 특질인 우연의 미학과 추리 기법의 정석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다. 그보다 3년 먼저 발표한 ‘고독의 발명’은 ‘보이지 않는 남자의 초상화’와 ‘기억의 서(書)’로 이뤄져 폴 오스터 식 소설 법칙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초기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소설 배면에 스며 있는 한 남자, 곧 유대인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형성된 작가적 자의식을 반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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