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는 중편 소설로 작년과 올해 두 출판사에서 두 가지 형태로 출간됐다. 하나는 지난해 1월 창비 세계문학시리즈 중 미국 단편선에 수록돼 표제작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올해 4월 문학동네에서 하비에르 사발라라는 스페인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과 함께 단행본으로 선보였다. 두 가지 형태가 각각 의미가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아니 작가의 관점에서 제일 먼저 찾아본 대목은 바로 위에서 화자인 변호사, 그러니까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일을 시키면서 겪은 황당한 일, 그 상황에서 바틀비가 한 대답의 한국어 번역이다. 제목으로 등장한 만큼, 바틀비의 독특한 성격과 존재 방식이 잘 형상화되었는지에 소설의 성패가 달려 있는데, 바로 이 대답,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철학자들, 곧 자본주의의 분열증을 1000쪽에 걸쳐 묘파한 ‘천 개의 고원’의 저자 들뢰즈나 ‘인간은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호모 사케르의 계시자 조르지오 아감벤, 그리고 이 시대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수동적 저항’의 극단을 제시한 슬라보예 지젝을 사로잡은 요체야말로 바로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문장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vs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문학동네판)와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창비판)는 생각의 각도와 인식의 깊이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안고 있다. 허먼 멜빌은 이 문장을 ‘I would prefer not to’로 썼는데, ‘안 하고 싶습니다’로 번역할 경우 영어의 독특한 화법인 ‘부정(否定)의 선택’, 곧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함의가 지워져버린다. 바틀비가 나, 그러니까 나를 대표로 한 세상에 응대한 말의 총합은 소설에서 열 손 가락 안에 든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또는 ‘떠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등등.
어찌된 일인지, 나는 최근에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 나도 모르게 ‘택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 필경사와의 접촉이 이미 내 정신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로 인해 더욱 심한 다른 비정상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 내 사무실에 있는 이상한 인물에 관해 아연해하는 수군거림이 내가 직업상 아는 사람들 사이에 떠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친구들은 내게 끊임없이 잔인한 소견을 들이댔다. … 나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이 견딜 수 없는 악령을 영원히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의 난처한 변호사는 어떻게 했나? 또한 우리의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바틀비는 어떻게 되었나? 소설을 읽는 일은 새로운 인간을 만나 겪는 갈등과 고통, 슬픔과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문제를 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 독자는 작가의 시선과 태도를 관찰하며 작가의 진정성에 따라 감동의 깊이와 무게가 달라진다.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일관하다가 거대한 월 스트리트의 벽 아래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죽어간 바틀비의 독특한 존재 방식이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한편, 이 바틀비라는 인물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도록 ‘나’를 추동시킨 작가 허먼 멜빌의 인류사적 고뇌와 인간애가 스며 있는 문장들은 ‘수동적 저항으로 죽어간 잊을 수 없는 인간, 바틀비’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작가란 무엇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몸은 이상하게 벽 밑에 웅크리고 무릎은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차가운 돌에 머리를 대고 있는 쇠약한 바틀비가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을 굽혀 보니 그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무언가가 그를 건드리도록 나를 부추겼다. 나는 그의 손을 만졌다. 그 순간 찌릿한 전율이 내 팔을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발로 내려갔다. … 절망하며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구제 없는 재난에 질식해 죽은 자들에게 희소식을 …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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