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호

한여름 밤, 황홀한 도서관 환상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07-20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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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밤, 황홀한 도서관 환상

    ‘도둑맞은 편지’<br>에드거 앨런 포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김상훈 옮김, 바다출판사, 142쪽, 8000원

    한여름 밤, 늦도록 바닷가 모래밭을 배회하다 서재로 돌아와 책상앞에 앉는다. 걸음걸음 밀려왔다 밀려가던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 둘씩 셋씩, 그 이상 무리지어 뛰고, 걷고, 앉아 있던 이방인들의 말소리가 여전히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소라처럼 두 손을 모아 귀에 대고 눈을 감는다. 이방인들 속에 끼어 있다 보면 ‘먼 곳’의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야릇한 감정으로 숨 쉬기가 곤란해진다. 그들 중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당신도 떠나라, 여기가 아닌 그 어디라도 떠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책상 스탠드를 켜고, 보들레르의 시집 ‘파리의 우울’을 펼쳐 든다.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재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군중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다. … 군중과 고독, 이 둘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적극적인 시인에게는 서로 교환 가능한 어휘들이다. 자신의 고독을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또한 군중 속에서도 홀로 존재할 줄 모른다.

    -샤를 보들레르 詩 ‘군중’의 일부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고 난 뒤에 보들레르의 시를 찾듯이, 보들레르의 시를 읽다보면 필연적으로 생각나는 작가가 있다. 어휘면 어휘, 제목이면 제목, 무드면 무드(mood·작품에 흐르는 전체적인 분위기), 둘은 마치 영혼의 쌍생아처럼, 아니 쌍벽처럼,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며 의미를 심화시키고 여운을 증폭시킨다. 이처럼 보들레르 시로부터 두 겹의 독서 체험을 안겨주는 작가가 바로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다. 보들레르의 시 ‘군중’을 읽을 때면, 포의 단편 ‘군중 속의 사람’이 필요하고, 그 역(逆) 역시 완벽하게 일치한다.

    땅거미가 지나 혼잡은 한층 더 심해졌고, 등불이 켜질 무렵에는 밀집된 군중이 끊임없이 두 흐름을 이루어 가게 앞을 서둘러 지나갔다. 이 특정한 시각에 이런 상황은 난생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통이 소란스러운 해류처럼 출렁이는 신기한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보들레르의 ‘군중’으로 글을 열었으나, ‘현대’라는 속성과 ‘현대 예술’ 개념의 출발점인 보들레르의 미학은 모두 에드거 앨런 포로부터 왔다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포의 열렬한 숭배자로, 그의 작품들을 프랑스에 번역 소개한 이가 보들레르다. 포라는 거울을 통해 보들레르는 ‘군중’을 봤고, 군중의 일부이자 군중 속을 지나가는 ‘개인’을 주목했으며,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고독’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현대’를 ‘일시적인 것’인 동시에 ‘지나가는 것’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통행인 대다수가 만족스러운 듯한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고, 군중 사이를 누비고 빨리 가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자주 흘끔거렸고, 다른 통행인이 밀쳐도 결코 짜증을 내지는 않고, 단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보들레르로부터 비롯된 ‘일시적이고’ ‘스쳐 지나가는’ 속성의 ‘현대’ 미학(또는 문학)은 20세기 남미의 보르헤스에 의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데, ‘환상’의 창조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보들레르의 ‘현대’와는 달리 보르헤스의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21세기가 그에게 기꺼이 부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지금, 우리에게 ‘현대란 무엇인가?’ 보르헤스에게 해답의 요체가 있다. 혼종성(混種性)으로서의 환상. 일찍이 보들레르가 간파한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에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와 악몽과도 같은 ‘공포’가 재배열된다. 포의 ‘군중 속의 사람’은 공포보다는 도시인의 고독에 집중하고 있는데, 군중 속 인간의 양상을 스케치하듯 빠르면서도 적확한 묘사로 신비감을 자아낸다. 상상력(신비감)이란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생성될 때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군중의 얼굴을 음미하던 중에 갑자기 어떤 얼굴이 눈에 띄었다. 65세에서 70세쯤 되어 보이는 노쇠한 노인이었는데, … 일찍이 내가 목격한 그 어떤 표정과도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 내가 받은 인상을 분석하려고 애쓰던 중에, 마음속에 엄청난 정신력과 경계심, 급박함, 탐욕, 냉담함, 악의, 잔학성, 승리감, 환희, 과도한 공포,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절망감 등의 감정이 복잡하고 역설적으로 솟구침을 자각했다. 나는 강렬한 흥분을 느꼈고, 경탄했고, 매료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처절한 역사가 저 사내의 가슴속에 쓰여 있는 것일까!”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문학과 환상

    이번에 새롭게 번역 출간된 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보르헤스의 특별한 안내에 따른 것이다. 도서관 서기에서 출발해 국립도서관장 자리에 오른, 환상 소설의 대가를 흠모한 이탈리아의 한 편집자가 아르헨티나로 보르헤스를 찾아가 그가 평생 읽어온 소설 중에서 그를 행복하게 해준 작품들을 엄선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총서를 내놓았다. 바벨은 성서의 바벨탑 신화를 근거로 해, 인류의 모든 혼돈의 기원을 의미하며,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세계 또는 우주와 동의어다. 곧 바벨의 도서관이란 ‘혼돈으로서의 세계’라는 뜻으로 보르헤스의 소설적 주제인 ‘우주, 영원, 무한,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암호’를 상징한다.

    보르헤스는 총 29권의 소설책으로 총서를 구성했으며, 이들을 통해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보르헤스는 이 총서의 첫 번째 자리에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올려놓았는데, 표제작인 ‘도둑맞은 편지’를 비롯해 ‘병 속의 수기’ ‘밸더머 사례의 진상’ ‘군중 속의 사람’ 그리고 ‘함정과 진자’다. 보르헤스가 이들 작품을 선별한 기준은 ‘신비’와 ‘공포’, 그러니까 이 둘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내는 ‘환상’이다. 이 작품들 중 보르헤스가 백미로 꼽는 작품은 마지막, 종교 재판에서 사형에 처한 한 사내가 겪는 환각적 공포를 한 단계 한 단계 최고조로 끌어올린 ‘함정과 진자’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길고 끈질긴 고통 탓에 나는 초주검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내 포박을 풀고 앉도록 허락했을 때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선고, 그 소름끼치는 사형선고는 내 귀에 뚜렷하게 들려온 마지막 목소리였다. … 마치 물방아 바퀴가 웅웅 회전하는 소리를 연상시킨 탓인지 내 마음속 혁명이라는 개념이 전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이 소리는 그쳤다. 그러나 잠시 동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끔찍할 정도로 과장된 광경을.

    -에드거 앨런 포 ‘함정과 진자’ 중에서

    21세기 소설, 나아가 문학, 나아가 문화를 읽는 방법은 환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상(幻想·fantasy)이란, 사전적으로는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을 의미한다. 영국의 작가이자 소설이론가인 E.M.포스터는 환상이란 초현실적인, 마술적인 현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원전(原典)을 엄청난 압축술로 재구성하거나 번안(패러디)한 상태, 그리고 인물의 극심한 성격 파탄이라고 봤다. 또한 보르헤스와 더불어 20세기 환상 문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이탈로 칼비노는 환상을 두 가지 범주, 심리적인 것(보이지 않는 것, 마음의 공포)과 표면적인 것(보이는 것, 괴기스러운 것)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보르헤스는 환상을 ‘관념적 세계의 구상화’로 간주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그는 미로와 추리적인 구조, 압축과 반전, 가상 텍스트(가짜작품)와 그것에 대한 가상 각주(가짜각주), 가상 참고문헌 등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문학(소설)론’을 펼치는가 하면, 자아·죽음·시간·영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바벨의 도서관’의 제1권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 되는 이유를 이로써 짐작할 수 있다.

    현실이 아니라고! - 숨을 들이쉰 순간 불에 달군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 막힐 듯한 악취가 감방을 가득 채웠다! … 공포로 전율하는 이성 위에 불타는 소인(燒印)을 남겼다. 아아! 뭐라고 해야 할까! 아아! 이렇게 참혹할데가! … 낮게 우르릉거리는, 마치 신음 같은 소음이 들리며 무시무시하게 변하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방 모양은 순식간에 마름모꼴이 되었다. 그러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시뻘겋게 달아오른 벽을 영원한 안식의 옷삼아 껴안을 수도 있었다. “죽는 건 상관없어.” 나는 말했다. “저 함정에만 떨어지지 않으면 죽어도 좋아!”

    -에드거 앨런 포 ‘함정과 진자’ 중에서

    보들레르와 보르헤스를 통한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산책은 두 갈래다. 군중 속의 남자를 관찰하는 보들레르적인 시선을 따를 것인가, 무한 공포를 향해 가는 고도의 보르헤스적인 환각을 체험할 것인가. 한여름 밤, 어느 길을 선택하든 후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필자의 취향을 사족처럼 붙이자면, 보르헤스가 ‘함정과 진자’를 몇 번이고 읽은 것처럼, ‘군중 속의 사람’을 읽고 또 읽는다.

    “저 노인은,”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심원한 죄악의 전형이자 본질이었어. 혼자 있기를 거부해. 그는 군중 속 인간이니까 말이야. 더 이상 쫓아가 봐도 소용없어. 그래 보았자 그나 그의 행동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마음은 ‘영혼의 동산’ 이상으로 속악한 책이고, 이것을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의 가장 큰 은총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에드거 앨런 포 ‘군중 속의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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