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나는 히딩크에게 야망을 배웠다”

2002한일월드컵 축구국가대표팀 박항서 코치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입력2004-09-01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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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0여 일 동안 명장 히딩크 감독을 보좌해온 박항서(44) 코치는 선수들의 운동 스케줄, 트레이닝, 잔일까지 빈틈없이 챙기는 ‘선임하사’ 역할을 해왔다. “4강 신화를 이어가려면 지금부터 다시 멀리 보고 준비해야 한다”는 박코치의 축구와 삶 이야기.
    지난 6월4일 부산에서 열린 2002한일월드컵 예선 D조 첫 경기 한국 대 폴란드전. 황선홍이 감각 넘치는 슈팅으로 가볍게 첫 골을 터뜨린 뒤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벤치 쪽으로 달려가 키 작은 대머리의 사내를 끌어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바로 박항서 코치였다. 얼싸안고 환호하며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의 등을 히딩크 감독이 두드리며 격려했다. 눈썰미가 좋은 팬이라면 한번쯤 가져봤을 의문. 왜 히딩크 감독이 아닌 박코치였을까. 대회 첫 골을 터뜨린 선수라면, 그것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황선홍이라면 마땅히 감독의 품에 뛰어들어야 옳지 않았을까.

    “엉겁결에 뛰어나갔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주체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결국 그게 제 실수였습니다. 코치란 언제 어디서든 뒷전에 물러서 있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망각한 셈이 됐어요. 그래서 그 순간이 지나자 머쓱해지더군요. 그 순간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호사가들은 또 무슨 입방아를 찧을까 생각하니 절로 반성이 되더군요. 결국 저의 수양 부족 탓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기쁨과 영광에도 언제나 순서가 있는 법. 코치가 맨 앞에 나서서는 안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고 박항서 코치는 말한다.

    “사실 경기 전날 감독님 지시로 호텔 숙소에서 긴장하고 있는 선수들을 하나하나 만나 격려해줬죠. 그 중 나이가 많은 황선홍 선수에게는 ‘네가 골을 넣으면 첫번째는 아내에게 골 세리머니 사인을 보내고, 나한테도 한번 멋지게 해달라’고 했지요. 반은 농담이었지만 ‘네가 뭔가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하고 싶었거든요.

    그러자 황선수가 ‘아내에게는 집에 가서 해줄 수 있으니까 박코치님한테 먼저 하죠’라고 받더군요. 그런데 경기장에서 그게 딱 현실로 다가오잖아요. 저도 모르게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던 거였죠. 황선수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그는 한순간이나마 코치로서의 직분을 망각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누가 나서서 탓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 서운함을 표시했을 리도 만무하지만, 그게 코치의 숙명이라는 게 박코치의 ‘코치 철학’인 셈이다. 그가 유난히 오랫동안 대표팀 코치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그 덕분일까.

    “당신은 훌륭한 지도자 될 것”

    박코치와의 인터뷰 약속은 어렵게 이루어졌다. 월드컵 대회기간에는 언론 접촉이 완전히 차단됐고, 대회를 마치고 나서는 여러가지 행사 참여 문제로 사정이 허락지 않았다. 아직 히딩크 감독이 출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속이 미뤄지거나 시간과 장소가 바뀌기도 수 차례. 마침내 히딩크 감독이 고국 네덜란드를 향해 떠난 7월7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올림픽도로 주변 숲속의 대우아파트. 박항서 코치의 30여 평 자택은 평범한 생활인의 가정 그대로다. 아내 최상아(42)씨, 외아들 찬성(16·고교 1년)군 세 식구가 단출하게 살고 있는 그의 집 거실은, 오래된 유화 한 폭이 텔레비전 수상기 옆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 특별한 치장이나 장식이 없어 소박하다. 오디오 탁자 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철 지난 비디오 테이프들도 편안한 분위기를 준다.

    - 오늘 낮에 히딩크 감독이 출국했는데 공항에 다녀오셨습니까.

    “네. 기내까지 통역과 함께 들어갔다 왔습니다.”

    - 긴 시간을 함께하셨는데 마지막 인사는 어떻게 나누셨나요.

    “공항에서는 별로 얘기가 없었습니다. 환송객도 많고, 지인들과도 인사를 나누어야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기내에서 헤어지려고 하자 눈물이 나려고 하더군요. 감독님이 저를 포옹하면서 ‘당신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다. 그리고 나와는 결코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년 8개월 동안의 동고동락. 물론 통역을 맡고 있는 축구협회 전한진 과장이 24시간 곁에 있었지만, 히딩크 감독과는 어느새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

    “히딩크 감독님은 같은 말을 늘 반복하고, 또 가능한 한 쉬운 용어를 선택해서 말합니다. 축구 용어는 100% 알아듣죠. 그런 점에서 별로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감독님이 한국말을 차츰 많이 익히기도 했고요.”

    - 출국 때 연인인 엘리자베스 여사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다정해보이던가요.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장난스러운 질문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사는 같은 네덜란드 국적이고 다정한 관계니 함께 떠나는 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감독님의 여자 친구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입니다.”

    단호하다. 두 번 물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그의 못질 때문에 남아메리카 수리남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했다는 이 여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도 붙일 수 없었다.

    박코치는 히딩크를 ‘히딩크 감독님’이나 ‘감독님’으로 호칭했다. 그에 대한 존경이 신념이 된 듯, 이름만을 부르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이미 떠난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편하게 호칭할 수 없느냐”고 농담을 던져보았지만 “그럴 수 있습니까”라며 눈을 부릅뜬다.

    “감독님이 처음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전체 식사 자리에서 ‘어떻게 호칭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미스터’라고 부르라고 하시더군요. 외국에서는 그게 경칭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지시는 지시니까 한동안 그렇게도 불렀는데, 영 어색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말로 감독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했죠. ‘님’자는 존경심을 담는 존칭어라는 설명도 했고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계속 우리말로 불렀습니다.”

    - 히딩크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데, 그만큼 존경할 만한 분입니까. 요즘 한마디로 ‘히딩크 난리판’인데. 이러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자’가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비아냥거리기 위한 수사법이 아니다. 신문과 방송에 하루에 몇 번이나 히딩크라는 이름이 나오는지 세어보면, 아마 건국 이래 고유명사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물론 지도자로서 장단점이 있지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허점이 있게 마련이고요. 그러나 저는 축구지도자라는 면에서 히딩크 감독님을 ‘완벽하다’고 평가합니다. 그저 관성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답습하는 식으로 안이하게 일하곤 했던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됐고요. 그분에게서 좋은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 최악의 조건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수완, 목표를 달성해가는 야망과 집념 같은 것은 정말 본받을 만했어요.”

    - 히딩크 감독의 관리 능력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선수단은 선수 23명, 스태프 25명 등 50명에 가깝습니다. 선수에 비해 스태프가 더 많죠. 스태프에는 한국인 코치 3명과 외국인 코치 1명, 체력코치 1명, 국내외 의료진 5명, 언론담당 외국인과 내국인 1명, 행정 2명, 장비 2명, 외국인 비디오분석관 등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다국적군이었지요. 이들을 지휘 감독하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지요.”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늘 자율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책임과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특히 규칙을 어기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집으로 돌려보낸다. 스태프들에게도 이러한 원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자질구레한 간섭은 없는 대신 각자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한다.

    정신적 실수 용납 못해

    - 대표팀에서 코치가 맡는 역할은 어떤 겁니까.

    “선수단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코치는 선수보다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같이 뛰고 같이 넘어져야 하지요. 물론 인간이니 만큼 앞에 나서고도 싶고, 대표팀에서 내보내고 싶은 선수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감독님께 보고한 적도 있지만 들어주지는 않았지요.

    그러고 나서 잊어버리려고 애썼는데, 아무래도 제가 문제삼은 선수를 더 많이 관찰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잘못 봤구나’ 하고 반성도 했습니다.”

    선수를 보는 눈이야말로 박코치가 히딩크 감독에게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부분인 듯했다.

    “감독님은 늘 세 가지 실수에 대해 말씀하시곤 합니다. 기술적 실수, 전술적 실수, 정신적 실수. 기술적 실수는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패스를 잘못해 역습 골을 허용했다든지, 볼 트래핑 기술을 시도하다 상대 수비진에게 걸리고 말았다든지 하는 것은 기분은 나쁘지만 문제삼지 않습니다. 또 전술적 실수도 대범하게 넘어갑니다. 전술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실수를 하는 선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몸싸움에서 밀리거나, 한 골 넣었다고 느슨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센터링이 날아오는데도 집중하지 못해 포지션에서 밀리는 것은 절대 봐주지 않습니다. 축구는 도전인데, 그 마인드를 잃어버렸다면 선수로서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주저앉는 선수가 감독님이 가장 엉터리라고 평가하는 선수였습니다.”

    -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처음 했다는 평가, 즉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선진축구에 손색이 없는데 체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뚝심의 한국축구’를 믿는 이들에게는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었는데….

    “저도 사실은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우리 선수들 중 오른발 왼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선수가 많다며 놀라더군요. 유럽에도 그런 선수는 별로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전반전만 뛰고 나면 선수들이 헉헉댄다는 겁니다. 우리는 마늘을 먹은 배달민족이라 뚝심을 자랑으로 알았는데 전혀 아니라는 거였죠. 체격 조건이야 도리가 없다 해도 체력마저 밀리면 안된다는 게 히딩크 감독님의 지론이었어요. 문제는 힘이라는 거였습니다. 하드 트레이닝, 웨이트 트레이닝을 집중적으로 채택한 것도 그런 판단에서 비롯된 겁니다.

    지적 사항이 또 있어요. 한국에 수비수 자원이 많은 줄 알았는데 너무나 빈약하다는 거였습니다. 대신 공격수는 많다는 겁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이 많은 선수들이 대거 수비수로 기용됐던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 선수들이 덤비고 흥분하길 잘한다는 지적도 했어요.”

    팀워크에 관해서도 얘기가 나왔다. 한국선수들은 개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의외로 의연한 반면 팀을 건드리면 선수들이 발칵 뒤집어지더라는 것. 물론 히딩크의 발견이다.

    “우리 선수들이 프라이버시에 다소 둔감해 보이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동양적 미덕과 유교적 풍습의 영향이라고 설명해드렸죠. 그 위에서 선후배 관계라든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된 것이라고도 말씀드렸고요.”

    그러나 히딩크의 진단은 냉정했다. 그같은 미덕은 조직에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것. 팀을 욕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개인을 욕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유럽 선수들의 자세가 오히려 발전에는 긍정적이라는 게 히딩크의 생각이었다고 박코치는 말한다. 형식적 위계질서라는 것이 조직의 건강성에 얼마나 해로운가에 대한 히딩크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경기장에서 개인적 연고관계 때문에 후배가 선배에게 좋은 볼만 배급해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팀워크가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볼을 잘못 주면 선배에게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선수는 경기장에서 위축되거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상황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연습중에 숙소에서 자는 선배가 있으면 아무리 후배라도 가서 단호히 ‘Wake up!’하고 소리를 지르라는 거예요. 승리를 목표로 삼은 이상 선배가 늦잠을 자도 넘어간다는 식의 적당주의는 용서할 수 없다는 거지요.”

    - 학연 등 연고를 배격한 것도 그런 일환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반드시 그것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학연을 따지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겠죠. 대표선수 선발을 위해 1, 2, 3차 평가작업을 거쳐 코치들이 의견을 발표하고, 비디오를 통해 점검하고, 그러는 동시에 새로운 선수를 찾아 평가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됐어요. 감독님도 누가 어느 대학, 어느 지역 출신이란 점을 모르지는 않았어요. 한국 코치들이 정보를 주니까요. 그러나 감독님에게는 그다지 의미 있는 데이터가 아니었던 거죠. 그러니까 자유로울 수 있는 거였고요. 한국 사정에 밝지 못한 만큼 사심 없이 선수를 선발할 수 있었다고 봐야죠.”

    - 박코치가 추천한 선수들이 많이 발탁되었나요.

    “이미 선발된 선수보다 나은 선수가 있을 때 추천하라는 게 감독님의 원칙이었어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추천한 사람이 우습게 되죠. 혼선이 빚어진다는 거예요. 또 설령 추천을 통해 선발된 선수라 해도 다른 코치가 다음 경기를 보고 평가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크로스 체킹을 하는 거죠. 우리는 그동안 선수를 너무 쉽게 추천하고 선발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그 과정에서 고종수 이동국 김용대 김도훈 선수 등이 탈락한 거군요?

    “고종수 선수는 부상 때문에 훨씬 전에 탈락했지만, 이동국이나 김용대, 김도훈 선수는 최종 단계에서 제외됐죠. 이들은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해 탈락했다고 봐야죠.”

    선수들이 적응하지 못한 감독의 스타일이 무엇이냐고 대놓고 물었다. 그러나 자칫 히딩크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일까. 박코치는 직답을 피하고 다시 에피소드 한 토막을 꺼냈다.

    “지난해 9월이 대표팀에게는 어려운 시기였어요. 네덜란드 전지훈련 때 가진 체코와의 경기에서 0대5로 무너진 때였죠.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비판받았고, 한때 위기설까지 나돌았어요. 귀국하고 나서 어느날 저와 감독님이 부산에 갔어요.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잔 하던 감독님이 문득 ‘한국선수는 너무 자기 포지션의 역할을 모른다’고 말하더군요. 포지션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수비수는 당연히 공격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 공격수는 아예 수비 라인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팀이 위기인데도 공격 라인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거죠.

    잉글랜드의 베컴은 공격수지만 수비에 가담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겁니다. 자기 임무란 일단 자기 위치를 완벽하게 숙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까운 동료를 유기적으로 돕거나 팀이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선수들은 위치를 벗어나면 야단을 맞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였죠.”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들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 이유에 대한 우회적인 설명이었다.

    대표팀 탈락 통보는 차마 못할 짓

    - 대표팀 탈락 통보를 박코치가 직접 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선수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어제까지 같이 뛰던 선수에게 나가라고 해야 하니까…. 하지만 제 역할은 감독의 메시지를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동국 선수의 경우 ‘공격수가 너무 많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하니 좌절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죠. 어찌 됐건 탈락은 탈락이니까 선수들로서는 낙망할 수밖에 없었겠죠.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씁쓰레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고종수의 경우는 부상 때문이었지만 본인 입장에선 반발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겠지요.

    특히 김도훈 선수가 탈락했을 때 가슴 아팠습니다. 스페인 전지훈련 때였죠. 연령상으로 대표선수 생활이 마지막인데다 누구보다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는 선수이다 보니 본인보다도 제가 더 가슴이 아프더군요. 김용대나 심재원이 탈락한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 선수들이 속썩인 경우는 없었습니까.

    “지난 1월 미국에서 골드컵이 열리던 때의 일입니다. 시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파워 트레이닝을 강행했죠. 장기간 외국생활에 강한 훈련이 겹치니 선수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쳤어요. 당시 주장인 김태영 선수가 코치실에 찾아와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고 항의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죠. 16강이 목표인데 이 정도를 못 참으면 앞으로 남은 기간을 어떻게 견뎌내겠냐고 말입니다.”

    - 그래도 한국인 코치이기 때문에 가깝게 느끼고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죠. 아무래도 외국인 코치들보다는 정신적으로 가깝게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다른 코치와 다르게 그들을 싸고돌면 조직이 알게 모르게 갈라집니다.”

    그러나 박코치는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뛰어들어 해결해주는 맏형 같은 자상함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화중 습관처럼 얼굴을 찡그리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지만 숙소에서 며칠만 함께 보내면 자연스레 선수들이 따르는 스타일이라는 것.

    “그렇다고 인기 위주로 나 혼자만 잘해줘서는 안됩니다. 우선 철저히 감독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팀워크를 위한 인화나 협력 위에서 잔정을 쏟아야죠.”

    - 선수 관리문제를 둘러싸고 감독과 의견 충돌이나 마찰은 없었습니까. 아무래도 외국인인 히딩크 감독과는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었을 텐데요.

    “코치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제 의견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것저것 말하다 보면 스스로 혼란이 와요. 그래서 감독의 지시만 충실히 따랐습니다.

    제가 맡은 임무가 바로 선수 관리였는데, 감독님은 ‘선수의 실수에 관해서는 꾸짖지 말라’고 지시하시더군요.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반면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는 주의를 주되 다른 동료 선수들 앞에서는 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공연한 반감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선수들끼리 싸운 경우는 없습니까.

    “사람 사는 동네인데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에서 이뤄진 훈련이었고, 그 어느 때보다 선수들 사이에도 서로 격려하고 배려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 월드컵 기간 동안 외국에서는 우리 경기가 있을 때마다 판정 시비를 제기하곤 했습니다.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고요. 선수단에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미국대표팀의 아레나 감독 말이 생각나는군요.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일부 외국 언론의 보도 태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김남일 선수가 다쳤을 때 차징(charging)을 한 상대 선수는 퇴장감이었어요. 우리가 당한 불이익도 많아요. 물론 외국이었다면 우리가 손해를 볼 상황도 있었겠죠. 그동안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나 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까.”

    - 그러면 이번에 우리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은 것은 주최국이라는 점도 작용했다는 말씀입니까. 또 일정 부분 축구협회 지도부의 역할도 있었다는 뜻이고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가 철저하게 대비를 해왔다는 거죠. 이탈리아 전을 앞두고 우리는 비디오를 통해 상대팀 전력을 면밀히 분석했어요. 이때 감독님이 이탈리아 선수들이 반복하는 더티 플레이, 거친 동작 등을 하나하나 짚어줬어요. 속임수 행위에 특히 강하다는 점도…. ‘이런 때는 주장인 홍명보가 주심에게 어필하라’는 지시도 미리 내려주었습니다. ‘그러면 심판도 위축된다, 여기에 6만여 관중이 벌떼같이 달려들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여건이 조성될 것이다’ 그런 말씀이었어요. 실제로 홍명보가 어필해서 효과도 보았고요.”

    - A매치 때의 격려금은 얼마나 됩니까.

    슬며시 돈 얘기를 꺼내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그래서 100만~200만원 가량 되느냐고 고쳐 물었다. 그보다는 더 된다고 했다. 그러면 한 500만원쯤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보다는 낮다고 말한다.

    “격려금 외에 선수들은 일일 수당이 15만원씩 나옵니다. 돈에 관한 한 요즘 대표선수들은 적지 않은 혜택을 받고 있어요.”

    자연히 대표에서 탈락한 선수들에게 생각이 미친다. 월드컵 4강과 함께 수 억원씩 받은 포상금말고도 대표선수들은 이미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 아닌가.

    - 그게 모두 축구협회 예산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요.

    “물론이죠. 자세한 내용은 잘 모릅니다만, 정몽준 회장님이 축구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지원한 결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열정이 이번 세계 4강을 만들어내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을 비롯한 외국인 코칭스태프를 과감하게 기용한 것도 회장님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 자신도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경제적인 안정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급적 돈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비쳤다. 바야흐로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프로스포츠의 시대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주제인 것 같았다.

    - 대표팀에서 탈락한 선수들이 월드컵 경기장에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바빠서 챙기지 못했습니다.”

    혹 축구협회 차원에서의 배려는 없었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더 말이 없었다. 영웅보다 가슴 아픈 사람을 더 배려하는 태도야말로 사회나 조직을 성숙케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한국축구나 협회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그래도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축구의 하부조직이라 할 수 있는 학원 스포츠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축구가 발전하려면 클럽시스템으로 가야 하는데 학원 스포츠가 깊게 뿌리를 내려 좋은 선수를 발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학원 스포츠는 한번 움직일 때마다 학교장의 직인이 반드시 필요하죠. 자연히 거쳐야 할 단계가 많습니다. 또 진학이라는 목표가 있고요. 선수가 대학에 가려면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하는데, 그건 선수 개인의 자질이나 역량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요. 파벌주의나 연고주의만 심화시키는 역기능도 있고요. 반면 클럽팀 중심의 시스템은 유소년 육성이나 선수 발굴에 좀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김남일 선수를 대표팀에 발탁할 때 말이 많았어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데다 포지션이 불명확하다는 시각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를 뒷받침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고 봅니다. 김남일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지목한 것은 히딩크 감독님이었습니다. 상대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봉쇄할 선수로 적임자라는 거였습니다. 그것만 성공해도 김남일은 자기 역할의 80%를 해낸 셈이라는 얘기였어요.

    그런데 김남일은 팀이 위기에 처할 때는 가장 먼저 우리 문전에서 대기했고, 상대를 위협할 때는 언제나 선두에 가 있었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감독님 말이 딱 맞았어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혼을 다해 전력을 쏟았어요. 그런 선수인데도 이제까지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발탁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타성에 젖은 시각으로는 그를 찾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감독님의 선수 발굴이 클럽시스템식이다 보니 그런 진주를 찾아낸 것이죠.

    설기현이나 안정환에 대해서도 말이 있었죠. 하지만 호나우두에게도 단점은 있습니다. 감독님은 ‘우리 팀에게 필요한 장점을 갖춘 선수라면 소소한 단점은 외면하라’고 하시더군요.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잘 활용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눈물나게 고마운 ‘벤치 선수들’

    지난해 12월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를 확정할 때다. 23명 중 19~20명만 확정하고 나머지 3, 4명을 비워두었다.

    “원숙미가 떨어지더라도 전술적 변화를 줄 수 있는 ‘조커’를 구했던 겁니다. 나머지 선수를 공격수로 채울 것인지 수비수로 채울 것인지 결정을 미룬 채 조커로 쓸 선수를 찾아나섰던 거죠. 그래서 주전감이 아닌데 하는 선수가 발탁됐어요. 이렇게 선발한 차두리 선수 등 몇몇은 실전에서 ‘조커’로 활용했고, 수십배의 효과를 보았다고 봅니다.”

    - 월드컵 기간 내내 이른바 ‘풋내 나는 신인선수’를 파격적으로 기용한 반면, 김병지를 비롯해 최용수 현영민 최성용 윤정환 등 기라성 같은 선수를 거의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의 불만은 없었나요.

    “없었을 리 없지요. ‘차라리 탈락이면 탈락이지 벤치만 지키고 있다는 것은 선수로서 모욕이다’라고 생각한 선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더군요. 한번은 김병지 선수의 등을 두드려준 적이 있습니다. 절대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무언의 애정 표시였지요. 그랬더니 김병지도 경기가 끝나고 운동장 밖으로 나가면서 제 등을 두드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말라는, 그렇게 마음 써줘서 고맙다는 표시지요.

    저도 선수 시절 주전으로 기용되지 못했을 때의 아픔을 많이 겪어봤습니다. 선수생활 때려치겠다는 마음으로 축구장을 나온 적도 있었으니 그 마음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그런데도 묵묵히 볼보이라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선수들을 보니 나보다 훨씬 성숙하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더군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운 선수들이에요.

    우리가 세계 4강까지 간 데에는 이런 선수들의 격려와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필드에서 뛴 선수들보다 못해서라기보다 전술적 차원에서 잠깐 비껴서 있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언뜻 흘러나온 선수시절의 얘기를 들으니 그의 옛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월드컵 얘기만 하다보니 정작 인터뷰 주인공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셈이다. 박항서 코치는 어떤 축구인생을 거쳐 대표팀 코치를 맡게 됐을까.

    박코치는 1957년생, 우리 나이로 46세다. 그러나 호적에는 2년 늦은 1959년생으로 기재돼 있다. 시골 태생인 경우 호적에 올린 나이가 한두 살 적은 일이 다반사지만, 박코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고등학교 때 의도적으로 호적을 정정해 나이를 줄인 것이다.

    “재수를 한 데다 고교 때 한 학년을 더 꿇다보니 고등학교 재학중에 군대를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면사무소에 연락을 하고, 지방법원에 정정 신청을 내고, 주위의 조력으로 두 살을 낮춘 거죠.”

    박코치는 경남 산청군 생초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에서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지만 학교에 축구부가 없어서 재미삼아 공을 찼을 뿐이었다. 서울에 사는 형님댁에서 고교를 다니기 위해 배재고에 응시했지만 떨어지고, 후기인 경신고에 합격했다. 배재고나 경신고 모두 축구 명문이었지만 일부러 응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들 학교가 축구 명문인 줄도 몰랐다는 것.

    운명은 고교 2학년 때 결정됐다. 매형이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경신고 축구감독 이경희씨를 소개해준 것이 계기가 돼 축구를 해보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연습생 생활이 시작됐다.

    “축구부에 들어가니 해볼 만하더군요. 24시간 내내 축구볼과 함께 지냈습니다. ‘밧데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도 주력이 좋았거든요. 날쌔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요.”

    그의 키는 165cm 안팎. 고교생 시절에는 더 작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드를 날아다녔다. 승부 근성도 있어서 체력 싸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3학년에 올라와서 한 학년을 더 다녔다.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으니 축구 학년으로는 아직 졸업반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운동부에서는 그런 식의 ‘학제’가 통용되었다. 전국 소년체전에 여드름이 듬성듬성 난 15~16세 중학생을 12~13세 초등학생으로 호적을 바꿔 출전시켜 우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승 지상주의, 승리 제일주의가 팽배했던 시절의 일이다.

    - 선수 생활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고3 때(1976년) 조선일보 주최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제가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그 골로 우리 학교가 우승기를 차지했죠. 그 전에도 몇 차례 우승을 했지만 제 골이 팀을 전국 제패로 이끈 그 경기는 잊을 수가 없죠. 비디오에 담을 수 없었던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양대에 진학한 뒤 1977년 이란 세계청소년대회, 1978년 방글라데시 청소년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습니다. 1978년 세계청소년대회도 잊을 수 없군요. 우리가 북한을 이기고 이라크와 공동우승을 했는데, 대회 우승한 것보다 북한을 이긴 게 더 큰 뉴스였죠. 그때만 해도 냉전 이데올로기가 첨예하던 때였으니까요. 선수들끼리도 적대적이었고요.”

    이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축구팬들은 화려한 플레이보다 성실하게 경기에 임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박항서라는 이름 석 자가 사람들의 뇌리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아는 사람만 아는 선수’ 축에 속했다.

    - 결례의 말씀입니다만, 축구선수로는 대성하지 못했지요.

    “저도 국가대표를 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인 1979년 국가대표 1진이 화랑 팀이고, 2진이 충무팀이었는데 저는 충무팀 선수로 뛰었어요. 굳이 따지자면 화랑팀에 소속되어 있다가 3개월 만에 밀려나 충무팀으로 왔지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실업팀 제일은행 선수로 뛰었다. 1981년 10월 군에 입대해 1983년 제대할 때까지 육군 소속팀에서 운동을 하다 1984년 럭키금성이 축구부를 창설하면서 창단 멤버로 들어가 1988년까지 현역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었다.

    “제 동기들이 대부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어요. 바로 앞에 박창선 조광래 허정무 선수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으니까요. 이들의 빛에 가렸다고 할까, 동기생 중에 국가대표로 나간 선수는 조병득과 오석재 두 사람뿐이었어요.”

    1989년 럭키금성 선수에서 트레이너 겸 코치로 옷을 바꿔 입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97~99년에는 삼성의 코치로 활약했고 2000년에는 브라질과 독일에 각각 3개월씩 축구 연수를 다녀왔다. 2000년 12월, 차범근 감독에서 히딩크 감독으로 넘어오기 직전 한일 정기전 때는 국가대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이때 일본과 1대1로 비겨, 어려운 상황에서도 팀을 무난하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히딩크 감독이 들어서면서 다시 코치로 발탁되었는데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어요. 축구협회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개인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발탁이 되었다는 둥 말이 많았거든요. 이위원장과는 LG에서 축구를 같이한 친구 사이죠.

    하지만 제 거취를 결정한 건 감독님이셨어요. 제 경력 사항을 주욱 훑어보시고 쓰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묵묵히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신명을 다해 일하겠다고 다짐했죠.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 선수들 중 누가 식성이 가장 좋습니까.

    “아무래도 젊은 선수들이죠. 차두리 선수가 가장 먹성이 좋아요. 그러니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뛰어다니죠. 황선홍이나 최용수 선수도 먹는 욕심이 많은 편이고요. 많이 알려진 얘기지만 그동안 대표선수들은 대개 신인은 신인끼리 고참은 고참끼리 밥을 먹었죠. 그 광경을 본 히딩크 감독님이 섞어 앉도록 지시했어요. 그런데 30대 중반인 고참선수와 20대 초반 신인이 마주앉으면 꼭 삼촌이나 아저씨와 함께 밥을 먹는 어색함이 있다고 토로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감독님께 건의를 드렸어요. 한국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밥 먹으면서 말을 하면 복 달아난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고, 그래서 식사도 비슷한 연배끼리 먹어야 질서가 있고, 소화도 잘된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죠. 그러자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선수끼리 앉는 것도 안되고, 테이블도 바꿔가면서 앉도록 했어요. 같이 뛰면서 세대차를 느끼면 그라운드 운영이 안된다는 것이죠.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게 식사를 하던 선수들이 시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웃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후 대표단은 감독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이 식사하고, 같이 끝내는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 히딩크 감독은 경기에서 이기고 나서 ‘와인 한잔 하겠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실제로 딱 와인 한잔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폭탄주를 마시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감독님은 위스키는 전혀 마시지 않고, 맥주도 한잔 정도죠. 그것으로도 얼마든지 기분을 냅니다.”

    히딩크 훈련체계 파일로 보관

    - 적지 않은 수의 코치들끼리도 의견충돌이나 갈등이 있었을 법한데요.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데다, 기술 분석, 체력 분석 등에서도 해당 스태프들이 회의를 열어 모두가 납득하고 승복할 때까지 답을 도출해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한국 스태프 눈에는 그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외국인 코치들의 전문성을 ‘어깨너머로’ 배운 셈이지요.”

    그는 히딩크 감독의 카리스마, 지시하고 관리할 때의 자세, 전술을 전달할 때의 방법, 특히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서 체계적인 파일을 구축해두었다.

    “무엇보다 운동생리학에 대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접근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것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좀더 제대로 해야겠다고 절감하고 있어요.”

    - 그것을 활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히딩크 감독 스타일의 훈련방식을 중단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사실 이 질문에는 민감한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히딩크 감독의 후임자를 결정하는 일이 초유의 관심사로 떠오른 상태에서, 임시체제를 이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 본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혹시 그가 은연중에 한 자락 의욕이라도 펼쳐보이지 않을까.

    “저는 8월중에 유럽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모처럼만의 해외여행이지요. 물론 네덜란드에 가서 감독님도 만나볼 계획이고요. 한동안은 순전히 개인적인 일에만 전념할 생각입니다. 내달에 아이가 미국 유학을 가는데 그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요.”

    대표팀 감독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우회적인 어법이었다.

    -그래도 일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좀 쉬고 싶습니다. 월드컵이 끝나면서 실업자가 됐지만 평생을 두고 ‘가문의 영광’으로 삼을 만한 경험을 얻었으니까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잔치가 끝난 것 같은 허전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선수들과 스태프들 모두 원없이 먹고, 원없이 뛴 것으로 좋은 추억을 삼을 생각입니다.”

    그는 오히려 프로팀 감독에 뜻을 두고 있는 듯했다. 히딩크 감독과 호흡을 함께하면서 선진 축구 지도방법을 익혔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이를 응용해 우리 축구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K리그의 어떤 구단도 손짓해온 곳이 없다며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약간은 뜻밖이었다. 축구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표팀 감독자리에 하마평이 오르내리는데 정작 본인은 한칼에 잘라버리다니. 본인의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는 원칙의 연장일까. 외국에서 온 감독, 스태프들과 별다른 마찰 없이 대표팀의 한국인 코치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러한 자세 덕분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축구를 위한 마지막 말을 부탁하자 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대답했다. 한번 4강에 들었다는 것만으로, 이번 대회에서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는 것만으로 한국축구가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이야기다. 축구를 위해 평생을 달려온 사람, 그 영광의 정점에 동참해본 사람이 건네는 고언은 더욱 무게 있게 들렸다.

    “이제 우리 축구는 어떤 대회에 나가도 세계 8강이나 4강에 들지 않으면 안되게 됐어요. 국민들이 웬만큼 잘한 건 잘하는 걸로 쳐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앞으로 후임 감독이 더 힘들게 됐지요. 본전이나마 계속 유지하려면 K리그 등이 활성화되어 바탕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경기가 끝나자 다시 경기가 시작된 셈이다. 박항서 코치는 다시 경기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제 시작된 다음 경기를 위해서도 박항서 코치는 빛나든 빛나지 않든 주어진 몫을 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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