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불인두로 지지고 자궁까지 도려냈지, 그래도 새벽은 오지 않았어”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7-05-03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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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던 옷 입은 채, 신던 신 신은 채 그날 밤 그렇게 끌려갔다. 창문이 없던 이상한 기차, 그 안에 들어선 순간 모든 게 틀어진 걸 알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하루에 열다섯 명씩…. 월경이 끊어지자 자궁을 떼어내고 다시 찾아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새벽은 오지 않았다.
    김수해(가명)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와 낯선 이름 ‘자무스’를 인터넷 주소창에 쳐봤다. 그랬더니 이용악의 시 한 편이 뜬다.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이용악 ‘하나씩의 별’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해방을 맞아 남쪽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인가 보다. 아니, 기차 안이 아니라 화물열차 지붕 위다. 헐벗고 서럽지만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들에겐 무언가 희망이 있다. 함께 하나씩의 별을 쳐다본다. 그렇지만 이 시(詩) 위로 부는 바람에는 설렘보다 더 큰 불안이 있다. 화물열차의 지붕 위이기 때문인가. 저 기차 위에서 불안과 기대에 엇갈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김수해 할머니다. 아니, 그는 저 사람들처럼 남으로 오는 열차에 몸을 싣지도 못했다.

    김 할머니는 중국 송화강 상류, 러시아 국경 가까이에 있는 헐벗은 도시 자무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간절히 ‘저 지붕 위’에 올라앉고 싶었지만 김 할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내려왔든 머물렀든 마찬가지였을까. 아니, 그 선택 자체가 생사(生死)의 기로였을까.

    대구의 13평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김수해 할머니는 지금 행복해 보였다. 실제로 잘 웃고 쾌활하고 건강에 신경 써서 하루 한 시간씩 운동하고 노래책을 펼쳐놓고 최신 가요를 배우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고 집안을 정갈하게 꾸며놓고 산다.



    “중국서 가끔 친구들이 옵니다. 거기서는 재벌이라도 나맨치 잘살지 못합네다. 집도 주고 돈도 주고…. 나라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네다. 보답할 길이 없습네다.”

    러시아에 면해 있는 춥고 삭막한 국경도시 자무스(한자로는 ‘가목사(佳木斯·자무쓰)’라 쓴다)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김수해 할머니는 77세이던 재작년 비로소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5세에 떠났으니 실로 62년 만이었다. 눈을 의심할 만큼 발전한 조국이었다. 어린 처녀가 중국에는 왜 갔나? 그 이야기야말로 책 열 권으로 써놔도 모자랄 사연이다. 떠나던 날은 지금도 생생하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잊을 수 없는 그날 밤

    그는 9남매의 맏이였다. “우리 어매가 모두 열둘을 낳았는데 셋은 없애고 아홉만을 낳아 길렀소. 그중 내가 맏이요.” 아아.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김수해 할머니 세대말고 앞으로 또 누가 들려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무릎 아래로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게요. 저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김 할머니는 포항 근처 흥해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가난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딸이지만 부지런하고 힘 좋고 겁 없는 아이였다. “내가 물힘이 좀 있었잖소. 헤엄을 아주 잘했제. 열두 살 때부터 물에 들어갔소. 처음엔 미역하고 천초(우뭇가사리)를 뜯다가 나중에는 전복 따는 법도 배웠소.”

    당시엔 흥해 앞바다에도 해녀가 있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해녀들이었는데 바다를 좋아한 수해는 그들에게서 잠수기술을 익혔다. 여름엔 바다에서 일하다가 10월이 돼 추워지면 산에 올라 나무를 했다.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일본이 사실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를 하는 것, 그것이 김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다.

    솔방울과 솔가리(땔감용 마른 솔잎)를 긁어서 이고 가기 좋을 만큼 단을 묶어 동생들 편에 내려보내고 저는 맨 나중에 따로 한 짐을 크게 해서 지고 내려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런 일을 혼자서 쓱싹 잘도 해냈다. 학교에 간다는 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 많은 동생과 밥을 굶지 않고 산다는 것만도 버겁고 바빴다. 어머니가 글자를 조금 알아 받침 없는 글자 몇은 읽을 줄도 알게 됐다. 그걸로 족했다. 오로지 먹을 것만이 문제이던 시절이었다.

    “우리 아부지가 청년 때 일본놈을 하나 죽여 돌을 매서 바다에 빠뜨렸다오. 그래서 늘 쫓기는 몸이었제. 배를 타고 늘 강원도다 어디다 바다로만 돌아댕기느라 혼인이 늦었다오. 한 20년 지난 후에 순사들도 갈리고…. 그런 연후에야 육지에 올라와 살 수 있었던 갑소. 내가 아부지 서른일곱 살에 낳은 첫딸이오. 그러니 말도 못하게 귀애했지. 이름자도 특별히 공을 들여서 짓고. 어머니는 아부지보다 스무 살 아래로, 날 낳을 때 열일곱 살이었소.”

    고모가 시집가서 구룡포에 살고 있었다. 고모부는 배를 타고 나가 일본, 대만 같은 데서 장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살림이 제법 괜찮았다. 가까이서 어려운 친정을 이모저모 도와주던 그 고모에게 풍병이 났다. 어리지만 걱실걱실 일을 잘하는 수해가 고모집 일을 도와야 한다고 어른들 사이에 공론이 모아졌다.

    그래서 열다섯 살 쯤엔 구룡포 등대 근처 고모집에서 살았다. 밥하고 빨래하고 우물물을 길었다. 식모가 하는 일이었지만 박대받지 않았으니 섧지도 않았다. 기질이 천성적으로 밝고 씩씩했다. “그때 고모집 인근에 일본 사람이 하는 점방이 있었소. 과자도 팔고 비누도 팔고 하는 집인데 그 집에 남갑숙이라고, 어데 촌에서 온 아~가 하나 있었소.”

    자연 남갑숙과 친하게 지냈다. 나이는 한 살 아래지만 둘은 밤마다 모여서 수도 놓고 돈 벌 궁리도 하고 막막한 미래도 꿈꿔보고 그랬다. “하루는 갑숙이가 오더니 오데 외국으로 돈 벌러 갈 길이 있다고 그래요. 저네 집 주인남자가 그런 말을 꺼내드라 캐요. 부모께 의논하면 못 가게 붙들 게 뻔하다, 그러니 일단 먼저 가서 돈을 벌자. 그래놓고 편지를 하자. 봉투에 든 돈을 받아보시면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그렇게 우리끼리 의논이 모아졌댔소.”

    며칠 후 저녁 먹고 설거지까지 해놓은 후에 남갑숙이네 점방으로 갔다. “일본 남자 둘이 이미 와 앉아 있데요. 낯선 처녀도 두 명 더 있고. 일본 남자 중 하나는 순사 옷을 입었데요. 점방주인 남자가 차비는 자기가 대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해요. 집에다는 말하지 말고 그냥 가서 나중에 편지로 알리라고 갑숙이가 했던 말을 또 하대요.

    입던 옷 입은 채로 신던 신 신은 채로 그날 밤에 배를 탔네요. 내가 머저리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요. 어디 기차역이 있는 곳에 내리니 우리말고 처녀 4명이 더 있데요. 꺼먼 무명 치마에 흰 저고리를 뻘춤하니 차려입고…. 외출한다고 벌건 댕기도 들였대요. 차림새만 봐도 숭악한 촌에서 데려온 처녀들인 줄 알겠데요. 지금 생각하면 거게가 아마 포항쯤 된 거 같애요.”

    김 할머니는 이야기를 아주 구성지게 했다. 다 잊었다고 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대화 내용, 배경 설명, 입은 옷들까지 두루 선명하게 기억했다. 구술 여성사(史)에 관심 있는 친구와 나는 할머니가 내준 알록달록한 몸뻬 바지를 입고 할머니가 자랑하는 자석요에 엎드려서 60년 전 내 나라 처녀들이 당한 기막힌 고초의 사연을 통분하며 들었다.

    악몽이 시작되다

    이야기하다 말고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오징어를 데쳐오고 채소전을 부쳐왔다. 그리고 먹으라, 먹으라고 권했다. 식사 때는 수북한 밥그릇을 국그릇에다가 팍 엎어서 말아버렸다. “많지 아이 하오. 든든하게 다 먹어놓시오. 먹어야 이야기도 듣고 글씨도 쓰잖것소?” 할머니는 경상도 단어와 옌볜식 억양을 절묘하게 섞어 쓰는 화법을 구사했다. 키가 크고 살성이 희고 정 많고 화통하고 솜씨 좋은 여장부 기질이 언뜻언뜻 내보였다.

    그는 처음 본 내게 하염없이 먹으라, 먹으라고 권했다. 오로지 먹는 것만이 절체절명의 가치였던 젊은 날을 지내온 할머니 세대, 사랑을 표현하는 절실한 방법은 밥을 해 먹이는 일밖에 없다. 그러니 한 숟갈이라도 덜 먹어 다이어트를 실천해야 한다는 지금 처녀들과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지 못해 안달하는 할머니들은 승강이를 벌일 수밖에 없다.

    이건 압축성장의 대표국인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일까. 모처럼 밥을 국에 덤벙 말아버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이야기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친숙한 동작 때문에 나는 지레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바다 깊이 잠수했던 것도, 고모 집에 얹힌 것도, 부모 몰래 집을 떠난 것도 배부르게 밥을 먹기 위한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 많은 동생을 배곯려서는 안 된다는 누이로서의 의젓한 사랑이 시킨 일이었다.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열 일곱에 가족과 생이별을 한 김수해 할머니. 어머니는 임종 순간까지 수해를 찾았다.

    기차역 앞에서 처녀 여덟이 밥을 먹었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방 밖에서 누가 지키는 눈치였다. 무언가 불안했다. 이튿날 기차를 탔다.

    “일반차가 아니라 짐칸 같은 찹디다…. 창문이 하나도 없습디다. 덜컥거리며 가기는 가지만 내다볼 수가 없으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며칠을 그 안에 갇혀서 차를 타고 간 거 같소. 그게 암만해도 군용차 같앴소. 보진 못해도 딴 칸에 군인이 가득 타고 있었던 갑소. 우리 중에 얼굴 반반한 몇은 기차 안에서 벌써 어디론가 끌려나갔다 옵디다. 돌아와서 엎드려서 울어싸요. 그게 뭘 뜻하는지 알겠데요. 들은 적은 없어도 왜 우는지 다 알아지데요…. 기가 딱 찹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어데로 도망갈 수가 있었것소?”

    며칠 후 기차를 내렸다. 혹은 그냥 하루만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극도의 공포와 극도의 절망 속에 기차에서 내리자 일찍이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찬바람이 귀때기를 때리며 지나갔다. 여기가 시베리아라는 데구나 싶었다. 1944년 10월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다니

    “알고 보니 목단강이었습네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제1신시가지. 산 밑에 허름한 가건물이 죽 늘어서 있데요. 군부대가 주둔한 것 같앴어요. 우리들을…, 그걸 머라고 합니까?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 있잖소? 아, 의무병이라고 칭했습네다. 너희들은 군대다, 군대 중에서도 의무병이다, 의무병으로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3년만 임무를 완수하면 집으로 보내준다, 돈도 줄 것이다, 얼른 전쟁에 이겨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동안 잘 싸워달라고 했습네다.”

    난 정말 물어볼 게 많았다. 우선 그 말을 한 사람의 신분이 뭔지, 도착한 후 기분이 어땠는지, 처녀들의 나이는 얼마 정도인지, 몇 명쯤인지, 거기까지 온 경위를 서로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지, 외모는 평균 이상이었는지, 머리는 어땠는지, 옷이나 화장품을 나눠줬는지, 먹을 것은 충분했는지, 군인은 하루 몇 명쯤 왔는지. 얼마나 머물렀는지, 혹 우정이나 사랑 비슷한 게 생길 틈은 없었는지, 몇 푼이라도 돈을 받은 적은 있는지 등등등.

    “내 차근차근 다 얘기할 끼요. 내 죽으면 누가 그걸 말하겠소. 일본 총린가 뭔가 하는 놈, 그 아벤가 뭔가 하는 놈이 우리를 동원한 적이 없다고 한다믄서요? 내가 날마다 아홉시 뉴스는 빼놓들 않고 보요. 내가 당장 일본에 달려가서 허파를 뒤집어 보이고 싶제마는…. 자식들하고 조카들 눈이 있어 가질 못해요. 까짓꺼 이야기사 왜 못하것소? 다만 내 이름자를 말하지는 마시오. 우리 아부지가 특별하게 지어준, 얼마나 뜻이 좋은 이름인데…. 말해뻐리면 자식들이 내 일을 다 알 꺼 아이요?

    하긴 알아도 상관없소. 내 인제 얼매나 살 끼라고. 그 안에서 맞아 죽는 것도 봤고 목매 죽는 것도 봤소. 그런데 사과는 못할 망정 그런 일이 없었다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놈들…. 일본이 망하는 걸 내 눈으로 봐야 하는데. 내 몸 한번 볼라요? 내 나이 팔십인데 인제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소.”

    일본의 책임 이야기가 나오자 김 할머니는 몹시 흥분하신다. 옷을 걷어 당신의 맨몸을 이리저리 보여준다. 아아, 그 몸은 참혹했다. 온몸이 흉터 투성이였다. 젖가슴과 엉덩이와 등과 팔뚝과 허벅다리…. 깊은 속살, 은밀한 곳마다 흉측하고 잔인하게 흉터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흉터를 지니고도 어찌 그토록 침착하고 유쾌할 수 있었는지.

    “일본 군인놈이 불로 지진 거요. 화로 속에 꽂는 인두로. 3년만 임무를 완수하라니. 3년을 무슨 재간으로 버티겠소? 앞이 캄캄합데다. 1년이 안 가 뼈가 다 녹아불 것 같앴소.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 허깨비가 될 거 같앴소. 그래서 도망을 쳤어요. 내가 간이 커요. 어려서부터 담대했어요. 포항에서 같이 갔던 여자 셋을 꼬았어요.

    여기서 죽느니 나가서 죽자, 중국 시골로 달아나서 농사지으면서 살자. 그렇게 탈출을 주동했어요. 도망치다 붙잡혀 와서 맞아죽는 것을 본 적 있소. 그래도 못 견디겠데요. 한밤중에 문지기가 조는 틈을 타서 대문을 빠져 나왔어요. 잡혀간 게 시월이고 도망칠 때는 간 지 서너 달 뒤니까 섣달쯤 됐을 거 같네요.”

    집 울타리에 철조망을 쳐놓고 철조망에 전기를 설치해놨다고들 했다. 다행히 전기에 걸리지 않고 울을 넘었다. 무조건 달렸다. 날이 훤해질 때까지. 외딴집까지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몸이 얼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송화강 주변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신고 있는 신발은 일본식 나막신인 ‘게다’였다.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집안에서 중국인 여자가 나왔다. 바느질 하는 집인데 이상하게 환대를 했다. 그 집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얻어 마시고 지친 몸을 녹이는 중 잠이 들었다.

    살이 태워지고, 절망이 찾아오고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그 날’이후 30년 동안 김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입으로 피가 나왔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 집은 도망자를 기다리는 중국인 밀고꾼의 집이었다. 잠이 채 깨지도 않은 눈으로 총을 든 일본 군인들이 방문 앞에 서 있는 걸 봤다. 그날 끌려와서 불인두에 지져졌다. “연기가 풀썩풀썩 납디더. 살이 타는 내음이 누릿합디더. 목이 메어 비명도 안 나옵디더.”

    화상은 어떤 매질보다 아팠다. 그리고 절대 도망갈 수 없다는 절망을 가르쳤다. 당사자인 김수해뿐 아니라 그 상처와 아픔을 지켜보는 위안소 여자들 전체에게.

    모두 20명 남짓했다. 김수해 할머니가 열일곱(할머니가 열일곱이라니? 그러나 이 경우엔 전혀 상호충돌하지 않는 수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고치려다 그냥 둔다). 남갑숙이 열여섯, 다른 데서 온 여자들도 대개 고만고만했다. 3년 전부터 와 있었다는 스물다섯쯤 된 여자도 있었다. 왜 그런지 그이를 ‘가오리’라고 불렀다. 가오리 언니는 일본말도 잘하고 거기 온 여자들의 권익을 위해 나름대로 애썼던 것 같다. 대개가 억지로 끌려온 조선 여자였다.

    조선 중에서도 경상도 여자, 경상도 중에서도 포항 인근의 바닷가 출신 여자가 많았다(그건 김 할머니가 있던 목단강 위안소만의 현상인지도 모른다). 중국 여자도 둘 있었다. 박색도 있고 일색도 있었다. 닥치는 대로 끌고 왔지 얼굴을 보고 선발한 것 같지는 않았다. 밥은 여덟 명씩 한 방에 모여 먹었다. 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수밥이었다. 그것도 그릇에 덜 차게 하루 세 번 줬다.

    “위안소의 주인은 계급이 높은 일본 군인이었소. 그 마누라는 모르긴 해도 조선 여자인 것 같앴소. 조선말을 썩 잘했소. 한 쉰은 됐을까…. 옷은 대개 몸뻬바지를 입었소. 옷이야 아무래도 좋았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어디가 있겠소. 머리는 다 단발이었고 화장품은 분 한 통씩을 나눠준 것 같소. 그러나 그걸 발라 단장하는 여자는 못 봤어요. 다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살려고 사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군인들은 하루 열댓 명씩 들어왔소. 방 앞에 죽 줄을 서 있지. 반 시간씩 있다 가요. 시간 되면 바깥에서 종을 칩디다.”

    혼란스럽고 무참하고 끔찍해서 나는 한 입도 뗄 수 없었다. 이런 처참한 역사를 내 눈으로 확인하다니. 그러나 삶은 길고 고통은 지나간다. 잊을 순 없겠지만 엷어지는 건 확실하다. “일본 군인이 방에 들어올 때는 두 가지를 들고 옵네다. 우리는 ‘삔또르’라고 불렀는데 그걸 여기선 뭐라고 부릅니까. 고무신도 아니겠고…. 그게 우리들에게는 임신을 방지하고 군인들에게는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기구입네다.

    그 삔또르 하나 하고 요만한 표 쪼가리 하나 하고. 문 밖에서 줄 서 있을 때 두 가지를 나눠주는 같습디다. 전표는 나중에 제대할 때 돈으로 바꿔준다고 했소. 머리맡에 그걸 모아놨어요. 나는 이만한 통으로 하나 가득 모았어요. 나야 열 달 남짓 모은 거지만 3년 모은 여자들도 있었소. 그게 휴지조각이지 뭡니까.

    그걸 돈으로 바꿔줄 거라고 꼭 믿었던 건 아닙네다. 의심했지. 그래도 버릴 수는 없습디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인을 피해 도망치면서 그걸 들고 갈까 놓고 갈까 망설이는데 헛웃음이 나옵디다. 아이고 내가 머저리지 인제사 이런 말을 해서 뭣하것소?”

    김 할머니가 전표라고 부르는 군표! 정신대 관련 자료를 찾다가 나는 버마(미얀마) 쪽으로 끌려갔던 어느 할머니의 기록을 우연히 봤다. 일본군 위안소에서는 어디서나 군표를 나눠줬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나중에 돈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던 모양이다.

    휴지조각이 된 군표

    “군표라도 모을 수 있는 자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언젠가 몸속에 고인 더러운 정액을 닦아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을 벗어던지고 부모형제와 만날 꿈을 꾸며 버어마 땅을 짊어지고 누워서 검은 하늘에다 별을 그려 나갔다. 낮과 밤이 지나가기를 아무리 기다려도 새벽은 돌아오지 않고 두 다리 사이 깊숙이 찍히는 화인(火印)을 견뎌내려고 눈앞에 무수히 쏟아지는 은하를 보며 까무러지곤 했다.

    군표 삼백 장에 밭 서 마지기를 사고, 논 서 마지기에는 군표 천 장, 어머니 비단옷 한 벌에 서른 장, 아버지 모시옷 한 벌엔 마흔 장, 친척들 선물에는 백 장…. 그러나 전쟁포로가 된 나는 그토록 애지중지 모았던 군표를 모두 버렸다….”

    김수해 할머니도 머리맡에 차곡차곡 쌓이는 군표가 아니었다면 그 ‘강제 성노예 피해자’ 생활을 더더욱 못 견뎌냈을 것이다. 일본군대는 위안부들에게 군표를 나눠주며 사기 행위를 한 게 명백하다.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게다가 나눠주는 콘돔은 부실했다. 사용하지 않는 군인도 많았다. 그래서 위안부들의 임신이 잦았다. 배가 불러진 여자들은 어디론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배가 만삭인 여자 방 앞에도 그 짐승들이 줄을 죽 서 있었소. 그러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요….”

    그런데 김 할머니의 월경이 끊겼다. 죽었구나 싶었다. 잘됐구나 생각했다. 입덧이 심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먹으면 토했다. 열일곱, 어리디 어린 나이, 집을 떠나 춥고 낯선 땅에 끌려와 온몸을 지져놓은 화상, 그 상처가 겨우 아무는가 싶은데 다시 맞닥뜨린 임신!

    그러나 희한하게도 토하면서 비로소 삶의 애착 같은 것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감추려고 했는데 가오리 언니가 아오지(위안소 담당 군장교)한테 말한 것 같습디다. 내 방 앞 팻말을 며칠 뒤집어놓데요. 문 앞에 팻말이 달려 있어 그걸 뒤집으면 그 방 앞에는 줄을 안 서거든요. 배가 남산만 해도, 월경 중에도, 암만 아파도 팻말을 뒤집는 일은 없었는데 희한하데요. 그때가 아마 3~4월쯤 됐을 겁네다.”

    주인이 불렀다. 어떻게 할 건가 물었다. 집으로 보내달라고 매달려봤다. 대답은 너무나, 당연히 ‘노’ 였다. 대신 아이를 지워주겠다고 했다. 병원으로 실려갔다. 전에도 가본 적 있던 목단강 시내의 군인병원. “한 달에 한 번인가 토요일에 우리를 군대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했었소. 부인과에. 우리를 위해서 했것소, 지네들이 병 걸릴까봐 했것지.”

    그 병원에 묶여서 수술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아이만 지운 게 아니었다. 자궁 자체를 들어내버린 거였다. 이후 월경이 없어지고 대신 입으로 피가 넘어왔다. 한 달에 한 번 정확한 날짜에 입으로 피가 울컥울컥 토해졌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김수해 할머니의 착각일까. 생리가 아니라 심리적 현상이었을까. 아무튼 그 증상은 다른 여자들의 폐경 무렵인 마흔여덟께에 끊어지더라 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길래 나는 일본이 천벌을 받은 줄 알았소. 마땅히 그래야 한다 싶었제. 그런데 아무 일 없이 다시 잘사는 나라가 됐다니 세상 일이 어째 이렇소?….”

    “어떻게 남자와 다시 ‘거래’를 해?”

    열여덟에 자궁을 강탈당한 소녀는 열흘 뒤에 다시 위안소로 돌아왔다. 배 위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군인들을 ‘위안’해야 했다. “실을 금방 뽑아 숨 쉬면 아픈데도 내 방 앞에 줄은 한정없이 길었소….” 그때는 물론 자궁을 잃은 줄도 몰랐다. 그걸 안 건 나중에 휼륭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뒤였다.

    “혼인을 했으면 아이를 낳아줘야 하는 게 여자의 임무인데…, 암만해도 아가 안 생깁디더. 그래서 혼자 병원에 가봤더니 자궁을 끊어내고 없다 캅데다.”

    그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으랴. 우리는 밤을 꼬박 샜다. 울고 웃었다. 울 때보다 웃을 때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김수해 할머니의 이후 삶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신선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으로 내려온 것을 적강(謫降)이라고 한다. 김 할머니가 만난 남편이 바로 그 적강 신선이었다. 믿을 수 없이 관대하고 여자를 귀하게 사랑할 줄 알며 남의 아픔을 애통할 줄 아는 남자, 그는 산판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던 쿨리(하층 육체노동자)였다.

    “막내 여동생이 아주 똑똑합네다. 내가 목단강으로 끌려간 이후에 태어난 놈이요. 요기 내 곁에 살어요. 부자로 삽네다. 아주 멋쟁이고 재산이 억이 넘어요. 그것이 어느날 내게 그럽디다. ‘언니는 정신대야. 정신대!’ 정신대라는 말을 나는 그애한테 첨 들었습네다. 내 있던 곳이 위안소였으니 위안부라는 말은 그때도 했으나, 내가 아직 힘이 남았으니 일본에 직접 찾아가서 정신대 증언을 하고 싶소. 말을 잘 못하겠다는 할무이들도 있는데 나는 잘 할 수 있어요. 그때 일 하나도 안 잊고 다 기억을 합네다. 그런데 내가 앞에 나서면 중국 있는 아들놈이 알까봐 무섭소. 그것만이 걱정이요….”

    실은 김수해 할머니를 만나기 전에 나는 다른 ‘정신대’ 할머니 한 분을 미리 만났었다. 그분이 바로 ‘말을 잘 못하는 할머니’였다. 구체적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당신이 있었던 곳을 자꾸만 ‘인도’라고 하셨다(나중 알고 보니 미얀마였다). 정글에서 3년 넘게 총탄 속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이동 위안부 생활을 하시다가 전쟁이 끝난 후 미군 포로로 부산항까지 이송됐던 모양인데 그 전말과 내용을 안타깝게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셨다.

    이야기가 하도 빈약해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얼른 SOS를 청해 다시 김수해 할머니를 소개받았던 거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자그만 키에 가냘픈 몸매의 그분, 그 애달픈 몇 마디를 절대로 지울 수가 없다. 그게 바로 결혼에 관한 얘기였다.

    “내가 저 영감하고 30년을 같이 살았어도 ‘거래’는 딱 두 번밖에 안했어. 남자라 카믄 근처에만 가도 군지럽고 숭실시러운데 같이 살 수가 있어야제. 쉰이 넘어서 서로 거래는 안 한다는 조건을 놓고 저 영감을 만냈어. 우리는 그 조건이 안 맞으면 남자하고 같이 살 수가 없제….”

    그렇다. 한 여자로서 이후 다시는 ‘남자와 거래할 수 없다는 것’, 그 정신적, 육체적 상처가 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망쳐놓는다. 그런데 김수해 할머니는 그 부분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전혀 달랐다. 온몸이 빼꼼한 데 없이 흉터투성이인 데다 자궁까지 적출되고 없는 가엾은 여자를 부여안고 한없이 울어주는 ‘적강신선’을 그는 남편으로 만났던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싸우지를 않았소. 손뼉이 척척 맞았어요. 영감은 중국 공산당원이었어. 공산당원이란 건 인간생활에 적당한 기라요. 양심 나쁜 짓은 절대로 안 하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첩이란 것도 몰라요. 내가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날 버리고 새장가를 들라고 암만 애원을 하고 토론을 해도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소.”

    남편에게 비로소 그는 자신의 이름자를 배운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건 받침 없는 글자밖에 없었으므로. 구구단도 배웠다. “당신같이 아까운 사람이 글을 몰라서야 쓰것나”는 말이 고맙고 좋아 더 열심히 외고 익혔다.

    남편을 만난 것은 해방 직후였다. 패전을 알자 일본군은 삽시간에 도망쳤다. 그냥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기들 진지에 모조리 불을 질렀다. 기름창고, 양식창고, 군인막사, 위안소를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타 죽었다.

    아이 못 갖는 형벌

    “목단강 시내에 있던 다른 위안소들은 다 태워버렸다오. 그래서 숱한 여자가 죽었어. 우리 제1신시가지 위안소는 바깥으로 커다란 쇳덩어리를 채워놨는데 희한하게 불이 안 붙었데요.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것도 몰랐네요. 벨나다(이상하다), 군인들이 안 온다, 주인이 없어졌다 하믄서 사나흘을 그 안에 갇혀 있었어요. 주인이 와서 먹었다고 때리믄 어쩌나 하면서도 쌀을 꺼내 밥도 해 먹었소. 며칠 후에 시꺼먼 중국 청년들이 들이닥치데요. 팔에 빨간 완장을 차고! 다 제 갈 데로 가라고 하데요. 해방이 됐다고. 일본놈은 망했다고!”

    목단강 시내로 나왔다. 자유! 해방! 같이 떠났던 남갑숙도 곁에 있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맨 첫머리에 인용한 이용악의 시도 바로 이 무렵의 풍경일 것이다. 사람이 많이 가는 쪽으로 무조건 따라갔다. 100리를 걸어 신안진(조두남이 선구자를 작곡했던 도시)으로 갔다가 노길령으로 갔다가 다시 입싱가로 나왔다.

    해방을 맞아 밀려나온 조선인으로 거리는 발디딜 틈 없이 붐볐다. 남편 박모씨(아들을 위해 실명은 생략한다)는 보국대로 끌려가 흑룡강성 삼도까시라는 산속에 붙잡혀 있던 벌목공이었다. 그도 해방 소식을 듣고 막 산을 내려와 목단강시내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22세에 잡혀가 26세에 내려오는 길이라 했다. 둘은 목단강시의 허름한 밥집에서 만났다. 밥집 주인이 중매를 섰다.

    “강제 징용당했던 쿨리 100명이 일주일을 걸어서 내려왔대요. 남갑숙이도 그중의 하나하고 혼인을 했소. 우리 영감은 많은 여자 중에서 하필 나를 찍데요. 건강해 보인다고…. 그 사람은 글이 똑똑해서 나 같은 것하고는 달라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사람으로 서울서 휘문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나중에는 목단강시 공회의 회장도 했소. 그게 당의 고급간부요. 팔로군에 나가 한 8년 군대생활할 때는 내가 아바님 모시고 살림을 도맡았소. 나도 영감 은혜를 갚을려고 뼈가 빠지게 일을 했소. 평생 한 번도 집안에서 놀아본 적이 없소.”

    신접 살림은 부족함이 없었다. 일본놈이 버리고 간 집에, 세간에, 쌀이 도시 곳곳에 널려 있었으니까. 혼인 이듬해 새 부부는 두만강을 건너 황해도 봉산에 가서 홀로 계신 ‘아바님’을 모시고 왔다. “내가 못할 일이 뭐가 있겟소. 아바님을 참말로 극진하게 모셨소. 나중에는 동서하고 조카도 우리 집에 와 있었고…. 아바님은 91세까지 편하게 살다 가셨네요.”

    아이가 없다는 것말고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남편에게 2세를 낳아줄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아내 김수해에게는 견딜 수 없는 형벌이었다. 진심이었다.

    “이웃에 혼자 사는 여자가 있어요. 살림이 곤란해요. 남편 없이 아이만 넷인데 나하고 친했소.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쪽에서 먼저 동생, 내가 이집 종자를 하나 낳아주믄 안 되겠소 합디다. 영감을 꾀우느라고 힘이 들었지, 나머지는 절로 되데요.”

    아들이었다. 아들을 낳자마자 받아 안고 800리 밖으로 이사했다. 그게 자무스였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 종적 모르는 곳, 거기서 아들을 키웠다. 아이가 따박따박 자라는 것을 보면 천하를 얻은 것 이상으로 기뻤다.

    “나도 영감한테 보답을 한 거 아이요. 자다가 하도 좋고 신기해서 아들 고추 있는 데를 스윽 더듬으면 영감 손이 먼저 거기 가 있어요. 하하하하…. 지 몸으로 낳은 것보다 훨씬 더 애중했어. 우리 아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입이 절로 벌어져요….”

    딸 부르며 돌아가신 어머니

    가슴 안에 사랑이 유난히 넘치는 사람에게 아들이 생겼으니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하겠다. 붕산에서 오신 시아버지의 손자 사랑 또한 더 말할 나위없었다.

    “하루는 직장에서 돌아오니 우리 아바님 머리 우에 이만한 혹이 솟았소. 변소 가다 엎어졌다 그러시는데 이상타 했드니 나중 알고 보니 손자가 공을 던지다가 아바님 이마에 맞은 거였소. 그래도 손자라믄 늘 벙글벙글이셨소. 우리 아바님은 우리한테서 공밥 안 자셨어요. 내가 직장 가니까 낮에 우물물 길어놓고 장작 빼서 가즈런히 묶어놓고….”

    그의 직장은 자무스시 노동교양소였다. 우리네 교도소쯤 되는 곳인데 그곳에서 죄수들의 옷과 이불을 짓는 것이 그의 평생직업이었다.

    아들이 장성해 군에 입대했다. 부대는 멀리 상해 근처에 있었다. 면회를 갈 수도 없을 만큼 먼 거리. 정성을 바치던 아들이 눈앞에서 멀어지자 그 애정을 둘 데가 없어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 해법으로 딸 하나를 더 입양하기로 했다. 세 살 난 여자아이를 데려오기로 했다.

    “군대 간 놈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쓰잖겄소? 여동생을 하나 입양해도 되냐고 편지 했더니 좋다는 답이 왔어요. 딸이 온 후 그걸 안고 상해까지 면회를 갔소. 우리 영감이 상해 가는 차비를 마련해줬소. 세 살 난 여동생을 안겨줬더니 그 녀석이 얼마나 좋아라 해쌓던지….”

    지금 그 딸은 한국에 나와 있다. 어머니의 사연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남편은 7년 전 세상을 떴다. 삼년상을 치렀다. 아들, 딸 둘 다 혼인했다. 아들, 며느리와 헤어지기 어려웠지만 한국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포항에서 동생들이 큰언니를 찾는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꼭 한번 돌아와 보고 싶었다.

    화장해서 무덤을 만들었던 남편 묘소를 파 송화강물에 뿌렸다. “한 번 산소에 갈려면 아들, 며느리가 고생해요. 저들 고생하지 말라고 아예 산소를 없애고 나왔소. 아들, 며느리가 어찌나 내게다 잘하는지. 내가 무슨 복을 이렇게나 잘 타고 났는지 알 수가 없소. 내사 인제 겁날 게 머가 있것소. 아들이 아즉 나를 친어무이로 알고 있는 게 오직 맘에 걸리는 거일 뿐….”

    돌아와서 어머니가 3년 동안 큰딸을 찾아 전국을 헤맨 것을 알았다. 구룡포 고모를 몹시 원망했다는 것과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수, 해, 야”를 부르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함께 갔던 남갑숙은 함께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혼인해 목단강시 해랑다리 근처에 살았지만 아이를 낳다 젊은 나이에 죽어버렸다. 한국에 돌아와 김수해 할머니의 생각이 바뀐 게 하나 있다.

    “우리는 예수조(기독교신자)가 아니고 불도(불교신자)요. 영감이 죽고 나서 화장을 했제. 영감을 불화로에 넣었드니 죽은 이가 그 안에서 벌떡 일어나잖소? 그걸 보고 내가 오래도록 잠을 못 잤소. 화장하는 짓이 무섭고 숭실맞아서 남조선에 가서 죽을란다 캤는데…. 인제는 생각이 바뀌었소. 생각이라는 건 사람이 살면서 자꾸 바뀌는 거요. 점점 더 나아지는 것이제….

    인제는 이 귀하고 아까운 내 조국의 땅을 한 뼘이라도 적시지 않을라요. 그냥 화장할라요. 쬐그만 돌멩이에다 우리 아부지가 지어주신 이름자 하나 쓰면 됐지. 그러나 죽기 전에 일본 놈에게 할 말이 있소. 사과만 하라고. 나를 속여 강제로 끌고 간 걸 인정하고 사과만 하라고. 그러면 표 쪼가리를 돈으로 안 바꿔줘도 돼. 용서를 해주겠다고! 안 그러면 내가 당장 일본으로 쫓아가서 아벤지 누군지를 푹 찔러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오.”

    ‘정신대 할머니’ 김수해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김서령의 가’


    그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이름을 그대로 쓰면 아들이 알까봐 시종 맘에 걸려 하셨기에! 1956년생이라니 이미 쉰이 넘은 아들인데도 혹 마음을 다칠까 내내 염려되는 모양이셨다. 성과 이름을 모조리 바꿔 김수해는 어떠냐고 내가 제안했다. 이름이 아주 맘에 든다고 할머니는 파안대소하셨다. 그리고 얼른 일어나 우리 먹일 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가셨다. 한 많은 치마폭에서 상쾌하고 날렵한 바람이 핑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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