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섬뜩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화단에 큰 충격을 준 작품이다.
험버트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정말로 진정으로 그는 그랬다. 그는 순수하고 상처받기 쉬운 평범한 어린이들을 존중했다. (…) 그러나 순수한 아이들 가운데, 보는 것을 들키기만 해도, 침침한 눈, 밝은 입술로 십년은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악마적 아이, 매력적이고 음흉한 아이를 훔쳐보기만 해도 얼마나 그의 가슴은 뛰었는가.
-나보코프, ‘롤리타’ 중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모든 성적 도착증의 집합소’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350년 이래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악의 세력’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했다. 와일드에 대한 적대감은 매카시즘의 광풍처럼 한 작가를 ‘이단’으로 몰아 ‘정상적 사회’로부터 추방시켰다. 실제로는 변태 성욕은커녕 에로틱한 장면조차 매우 제한적으로 묘사돼 있는데도 살로메는 ‘사후검열’로 재판을 받았다. 와일드가 다시 쓴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명령과는 독립적으로 요한을 사랑했으며 요한의 죽은 머리에 키스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해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와일드를 공격하는 자들은 갖은 죄목을 날조해 그를 범죄자로 몰아갔지만, 작가의 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는 겨우 ‘예술성’이라는 불안한 버팀목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롤리타와 살로메를 그린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녀들의 ‘시선’의 방향성이다. 롤리타도, 살로메도 정작 그녀들의 시선은 남성의 삶 자체를 향해 있지 않다. 남성들은 그들 자신의 삶의 모든 결핍을, 모든 불만을, 모든 금기를 그녀들을 통해 충족시키려 한다. 그들이 목마르게 원하는 그 모든 것을 그녀들은 반드시 가지고 있으리라 믿으며.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환상이 탄생시킨 허구적 매혹일 뿐 ‘그녀들의 현실’은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여성의 매력을, 남성의 갈증을 그녀들은 정작 모르거나 무관심하다. 그들을 매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남성 스스로의 갈증과 욕망의 시선이지 그녀들의 의도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신기한 것은 그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도 그녀들은 여전히 매혹적이라는 것, 그녀들을 향한 인류의 환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상상력이 이브를 창조했듯이, 이 남성들의 ‘환상’이야말로 그녀 롤리타-님펫(nymphet·성적 매력을 지닌 여자아이)의 형상을 창조하는 피그말리온의 손길이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욕망이 전적으로 그 남자 자신만의 일방적인 것임이 밝혀졌을 때, 조각상에조차 생명을 불어넣는 피그말리온의 손길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죽은 황금으로 만드는 미다스의 손길이 돼버린다. 이 불가능한 사랑의 끝은 어김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는 살로메의 춤이 내게 불러일으킨 두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소홀히 다루기가 두렵다.
-플로베르의 개인 서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