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무한 질주

보바리 부인 vs 채털리 부인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1-02-22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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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 한 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었다.
    • 인생에 대한 이런 아쉬움은
    •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 의지하는 모든 것이
    • 한순간에 썩어 무너지고 마는 것은
    • 대체 무슨 까닭일까?
    • -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중에서
    1 파격 혹은 외설로 불렸던 욕망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무한 질주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여인 엠마 보바리의 삶과 죽음을 그린 영화 ‘보바리 부인’의 한 장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나 위대한 영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엿한 ‘이즘’의 주인공이 되는 존재들이 있다. 보바리 부인도 그중 하나다. 보바리즘(bovarysme)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다른 존재, 다른 현실로 착각하는 자기 환상, 상상 과잉의 증세를 일컫는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 보바리는 언뜻 보면 백치미로 가득하다. 끊임없이 외부 상황을 착각하고, 쉴 새 없이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유혹적인 것은, 모든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인간 욕망의 극단 또는 원형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채털리 부인은 보바리의 ‘보이지 않는 커플’로서 서로 분신 같은 존재로 기억되곤 한다. ‘보바리 부인’의 엠마 보바리가 평범한 시골의사의 부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 읽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 같은 허황된 낭만을 추구하는 반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콘스탄스 채털리는 전쟁 중 하반신 불수가 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보지만 자기 안의 잃어버린 여성성과 모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다. 엠마가 그 어떤 남자에게서도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반면, 콘스탄스는 산지기 멜러스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육체성에 눈뜨게 된다.

    서구문학에서 여성의 욕망을 파격적으로 드러낸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억되는 ‘보바리 부인’과 ‘채털리 부인의 사랑’. 두 작품은 때로는 ‘파격의 대명사’로, 때로는 예술작품의 외설 시비의 기원으로, 때로는 인간 욕망의 지형도를 보여주는 진정한 걸작으로 오랫동안 호출돼왔다.



    어떤 윤리적 죄책감도 없이 사랑을 향한 욕망에만 충실한 남성적 욕망의 극단에 ‘돈 주앙’이 있다면, 현실의 자아는 자기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아는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자유분방한 여주인공들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보바리는 여성적 욕망의 극단에 자리 잡는다. ‘현실의 나’를 부정하고 ‘책 속의 나’를 진정한 자아로 긍정한다는 점에서 보바리는 돈키호테를 닮은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보바리의 분신처럼 다루어져왔던 콘스탄스 채털리는 사실 조금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영주의 아내와 그의 산지기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이 커플의 사랑 뒤에는 ‘영주’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버티고 있다. 콘스탄스의 남편 플리포드는 작가 로렌스가 극복하고자 하는 서구적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전쟁의 상처로 인한 성적 불능으로 육체적 성을 부정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의 모든 관심은 석탄 광산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높이는 데 쏠려 있다. 그는 경제적 효율과 생산성에만 집중하느라 아내의 정신적·육체적 결핍을 돌보지 않는다. 그는 ‘소유’에 대한 본능으로 점철된 인물이며 ‘향유’나 ‘축제’와 같은 ‘비이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하다.

    채털리 부인은 남편의 숨막히는 합리적 계산성의 세계에 갇힌 포로였지만, 자연 속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산지기의 야성적 매력에 이끌린다. 그녀는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따스한 육체로 다가오는 멜러스를 통해, 남성에게 육체적으로 정복당하는 관계를 넘어,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자신의 삶이 성과 사랑으로 인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엠마 보바리의 성적 모험이 자살이라는 파국으로 끝나는 반면, 콘스탄스 채털리의 성적 모험은 단지 ‘성욕’의 이상적 실현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친밀감과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콘스탄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음속의 욕망과 싸우고 있었다. … 그의 가슴은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뭉클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고, 가슴속의 불꽃은 갑작스럽게 더 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 그는 그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용히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 그녀의 허리 있는 곳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더욱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둔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애무였다. 조용하고 무표정한 목소리로 “집으로 들어가요”라고 말하는 …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것은 운명에 그저 순응하는 인간의 표정이었다.

    -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중에서

    2 총족될 수 없는 서글픈 환상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무한 질주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각색한 영화 ‘레이디 채털리’의 한 장면.

    허영의 대명사, 보바리 부인은 소설 속 주인공과 닮은 삶을 그토록 살고 싶어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결코 닮고 싶어 하지 않는 소설 속 주인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나는 보바리 같은 여자가 아니에요’라는 말은 보바리처럼 허영과 싸구려 낭만에 빠지지 않겠다는 여성의 독립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난 저렇게는 되기 싫어, 하지만 저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주인공이다. 시대를 초월해 보바리 부인이 잃지 않은 매력은 바로 그 대목, ‘절대로 닮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눈을 돌리게 되는’ 그를 향한 독자의 부끄러운 쾌감(guilty pleasure)에 있다.

    엠마는 그녀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절대 유혹하지 못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신분 높은 사람을 유혹하려 든다. … 그녀의 유혹은 … 사회적 상승이라는 꿈의 구현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교활하게, 그리고 자기기만의 방식으로 남편과 정부들을 고르고 있다는 것이다. 본의였건 본의가 아니었건 간에 그녀가 누릴 수 있는 행동의 자유는 보통 이상이다.

    -알랭 뷔진느 편집, 김계영·고광식 옮김, ‘보바리’ 중에서

    보바리에 대한 가장 일반화된 비판은 그녀가 ‘자기 아닌 것들’로 자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즉 보바리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소설 속 여주인공들을 통해 진정한 삶을 갈망한다는 것, 그녀가 사춘기 시절에 탐독한 시시한 책들이 그녀에게서 모든 자발성을 파괴해버렸다는 식의 비판들이다. 보바리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판단이 공존한다. 그녀의 망상이 그녀의 현실을 파괴해버렸다는 비판, 오직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라는 환상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기에 평생 동안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비판. 그러나 ‘다른 사람이 되는 상상’이야말로 보바리가 발굴하고 실현한 인간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평생 ‘자기’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된다는 상상 속에서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아닐까. 보바리가 상상한 ‘나이고 싶은 타자’가 다양하지 못했음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보바리가 ‘타자를 꿈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 아닐까.

    “나는 그녀를 탈보바리화했다고 생각합니다. 보바리즘은 불만족입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마담 보바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불만의 여자라고 말하고 싶어요. … 그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초라함을 의식하고 있고,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전적으로 여자의 욕망에 대해 굳게 닫혀 있는 시골 소시민 사회의 장벽과 맞섭니다.”

    - 이자벨 위페르(영화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 부인 역할을 맡았던 배우)

    루앙에서 회중시계에 장식 줄을 묶음으로 달고 다니는 귀부인들을 보자 그녀도 장식 줄을 샀다. 그녀는 벽난로 선반 위에 청색 유리로 된 커다란 꽃병 한 쌍을 갖다 놓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이번에는 은도금 골무를 담은 상아 바느질고리를 갖고 싶었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중에서

    보바리 부인을 둘러싼 또 하나의 스캔들은 단지 불륜이나 외설 때문이 아닌, 보바리 부인의 가열찬 ‘쇼핑 중독’이다. 보바리 부인이 비소를 먹고 자살하는 직접적인 이유도 엄청난 쇼핑으로 인해 눈더미처럼 불어난 빚이었다. 아무리 새로운 사랑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처럼, 물건을 향한 욕망도 그랬다. 엠마 보바리가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치지 않는 구매욕,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인 ‘피할 수 없는 권태’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기를, 자신에게 로맨스 소설 같은 아름다운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보바리이지만, 그녀의 간절한 기다림의 속도를 실제 세상은 따라줄 수 없다. 플로베르는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바리의 위로받지 못한 슬픔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 가련한 보바리는 아마도 바로 이 시간에 프랑스의 수많은 마을에서 고통 받으며 울고 있을 것입니다.”

    3 근원적 결핍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 평범하고도 너무 ‘시골스러운’ 자신의 삶에 절망해 불륜을 저지르고 쇼핑 중독에 빠지는 여자 엠마 보바리는 이후‘허영과 사치’를 묘사하는 수많은 작품의 원조가 되었다. 엠마처럼 욕망의 결핍을 영원히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늘 ‘과대망상증’ 환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욕망의 근원적인 결핍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다면, 그의 ‘증상’은 ‘또 다른 나를 향한 지나친(?) 사랑’ 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보바리 부인은 쇼핑 중독, 신상 중독에 걸린 현대 여성의 ‘바람직하지 못한’ 롤모델이기도 하다. 쇼핑 중독의 근저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욕망, 인간의 속물근성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속물근성이란, 자기의 진정한 존재가 의식의 영역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자신으로 인정하고 싶은 더욱 잘생긴 인물이 끊임없이 거기 나타나게 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들의 집합이라고 말한다. 속물근성의 밑바닥에는 ‘보다 마음에 드는 자기 이미지’를 향한 서글픈 환상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바리 부인’과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모두 ‘욕망’과 ‘육체’의 대명사로서 보이지 않는 커플처럼 맺어졌지만, 실은 두 작품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흐른다. 보바리 부인이 끊임없는 결핍과 불만,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같은 치명적인 욕망의 충족 과정을 격정적으로 보여준다면, 채털리 부인은 삶의 근원적 결핍을 해소하는 따스한 평화로서의 성, 보다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세계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엠마는 그녀가 ‘욕망의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인내해주길 바랐던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게 죽어가지만, 콘스탄스는 산지기와의 사랑을 통해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맛본다.

    ‘보바리’의 에로티시즘이 도저히 결핍을 모르는 격정, 어떤 자극으로도 완전히 충족되지 않는 치명적인 결핍을 시사한다면, ‘채털리’의 에로티시즘은 궁극적인 원시적 평화,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전의 잃어버린 낙원을 찾으려는 인류의 원초적 욕망을 상징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가 로렌스는 자신이 공들여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 ‘풍기문란’이라는 명목으로 제대로 출판도 되지 못하고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그곳’이야말로 자신이 예술의 타깃으로 삼아야 할 그 부분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빌어먹을, 코니(콘스탄스)와 멜러스의 몸을 나뭇잎으로라도 가려야 한다니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보바리 부인의 불안이 더 완벽한 남자, 더 아름다운 물건을 향한 욕망의 결핍에서 우러나온다면 채털리 부인의 불만은 문명화와 상품화로 만족될 수 없는 원초적 삶을 향한 그리움, 생명의 원시적 카니발이 숨 쉬는 태고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이다. 두 여인은 모두 현대인이 문명사회에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근원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보바리 부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핍을 치유할 수 없었고 늘어나는 빚을 청산하지 못해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면, 채털리 부인은 세련되고 지적인 남편의 감옥 같은 단정함이 아니라 사투리를 즐겨 쓰는 촌뜨기 산지기의 원초성과 육체성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안의 해방을 만끽한다. 보바리와 채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욕망에 민감한 현대인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행복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현대인에게, 아무리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적 결핍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비극인 것조차 모르고 있다.

    -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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