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생 도라지, 홍삼초콜릿, 마늘초콜릿, 인삼쌀, 버섯쌀, 녹차쌀…, 별난 농산물들이 주부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른바 농업벤처들이 내놓은 첨단 농산물이다. 농업 고사위기 속에 막 시작된 농업벤처들의 도전, 과연 성공할 것인가.
정부는 농가부채를 덜어주기 위해 이자율을 내리고 각종 기관을 통해 농업 지원금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정부의 노력이 무색하게 나아지는 것이 없다. 이제 농업계 내부에서부터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 않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벤처가 우리 사회 경제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어놓은 것처럼 농업에도 ‘벤처’ 개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여느 때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연 벤처는 위기의 한국 농업에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일단은 긍정적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1954년, 진주에서 도라지를 재배하던 농업인 이성호씨는 도라지를 약재로 쓸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도라지는 식탁에 흔히 오르는 반찬거리이고 큰돈이 되지 않는 작물이다. 흔해 빠진 도라지를 약재로 쓴다는 생각부터가 황당한데다 돈이 될 리 없는 일에 매달리는 그를 주위 사람들은 비웃었다.
‘오래된 도라지가 산삼보다 약효가 낫다’는 옛말에 착안한 이씨는 40년간 도라지 재배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연변에나 가야 ‘20년 묵은 도라지’가 있을까 일반 재배법으로 기르는 도라지의 수명은 고작 3년에 불과하다. 도라지를 수십년간 기른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20년 묵은 도라지
1970년, 계속된 실패 끝에 이씨는 드디어 20년 묵은 도라지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한자리에 오래 심어두면 도라지가 썩어버리지만 자리를 옮겨 심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특히 지리산 자락의 토양은 다년생 도라지 재배에 적합했다.
항암 기능을 갖고 있는 다년생 도라지의 개발은 당시로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씨는 다년생 도라지를 사업화해 ‘주식회사 장생도라지’를 설립했다. 분말, 농축액, 한방차 등 각종 가공식품을 개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씨의 아들인 이영춘씨가 사업을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매출도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1998년 연간 10억원 안팎이었던 매출액이 1999년에는 19억원, 2000년에는 27억원, 2001년에는 33억원대로 증가했다.
장생도라지의 성공은 인근 농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동과 그 인근지역 250개 농가에서 다년생 도라지를 위탁 재배하고 있다. 전체 15만평에 이르는 규모로, 농가들은 다년생 도라지 위탁재배를 통해 연간 6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다년생 도라지 재배 성공의 의미는 단지 인근 농가의 소득 증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다년생 도라지를 재배하는 지리산 자락의 땅들은 일반작물을 재배하지 않는 유휴지나 개간지다. 또 도라지를 재배하는 데 특별히 비료나 농약을 줄 필요가 없어 일손이 크게 들지 않는다. 농가들로서는 버려두는 땅을 이용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부수입을 올리는 셈이다.
장생도라지는 도라지 가공식품으로 해외에 수출도 하고 있다. 작년까지 미국과 일본에 8개 영업점을 설치했고 작년 한해 2억원 정도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도라지 가공식품은 원료를 양산하기가 어려워 상품 생산량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매출액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장생도라지는 올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마다 매출액의 20%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지출해왔고 그 결과 원료가 많이 들지 않으면서 약효가 뛰어난 제품들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장생도라지의 박진수 경영관리팀장은 “신제품이 나오는 올해부터는 이제까지보다 더 큰 매출을 거둘 것이며 해외 영업을 본격 추진하는 만큼 10억원 이상의 수출 실적을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풍년농산미곡처리장의 나준순 사장도 세인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사장은 일찌감치 환경농법에 관심을 뒀다. 농약을 쓰지 않는 대신 메뚜기를 이용해 벼농사를 짓는 철마농법, 오리를 이용하는 오리농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5도 이온쌀이 히트하면서 농업계의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5도 이온쌀은 1등급 벼를 연중 5도로 유지되는 냉장창고에 보관했다가 제품 출하 직전에 가공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산성 이온수로 쌀 표면에 붙은 세균이나 이물질을 제거하고 알칼리성 이온수로 쌀 표면을 닦아 윤기와 신선도를 유지한다.
풍년농산은 원래 정미소에서 출발한 회사다. 지금은 미곡종합처리회사로 성장했지만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환경농법을 이용한 쌀을 생산하는 것은 인근지역의 농가들이다. 현재 부산지역의 180여 농가가 풍년농산과 계약해 환경쌀을 재배하고 연간 2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이온쌀 개발에 착수한 4년 전만 해도 나준순 사장은 사기꾼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당시에는 계약재배 농가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정부 수매가보다 6%를 더 준다고 설득했지만 농민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환경농법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었다. 비료를 적게 주는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일이어서 수매가를 6% 더 준다는 정도로는 선뜻 계약 재배에 응하는 농가가 없었다. 계약재배 농가를 구하기 위해 6개월을 돌아다녀야 했다.
환경농법의 효용성이 알려지면서 지금은 풍년농산의 농법을 배우고 시설을 견학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철마지역이 환경농법을 실시하는 청정지역으로 인식되면서 관광촌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도 부수적 효과다. 풍년농산은 아예 환경농법지역 일부를 주말농장으로 만들어 관광상품으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나준순 사장은 “이제는 쌀도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사장은 “현재 국내 쌀 산업에서 고품질 쌀의 비중은 10% 미만에 불과하지만 올해부터 30% 이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국내 농업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달한다. 쌀산업은 가장 비중이 큰 분야이지만 가장 큰 위기 앞에 놓여있기도 하다. 2004년부터 적용되는 우루과이라운드에 의해 외국산 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작물이 쌀이다.
우리나라는 농지면적이 좁고 경지 정리가 잘 안돼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한 농가에서 대규모로 농작물을 생산하기가 힘든 구조다. 아무리 기계화한다 해도 대규모 영농이 어렵다면 효율성은 떨어진다. 반면 미국, 유럽의 경우 대규모 영농이 가능하다. 중국은 경작지도 넓을 뿐더러 인건비도 저렴하다. 가격 측면에서는 우리 농산물의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농업계의 경쟁력 부족은 비단 쌀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생도라지의 이영춘 사장은 “우리 한우가 좋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며 “우리는 소를 우사에 묶어놓는다. 움직이지 않게 해야 살이 찐다고 묶어놓고 사료만 잔뜩 먹인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초원에서 풀 뜯게 해가며 방목한다. 당연히 방목한 소의 육질이 좋을 수밖에 없다. 한 고급호텔 주방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요리에 쓰는 쇠고기 99%가 수입육이라고 한다. 이대로는 우리 농축산물의 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이후 농산물 수입액이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1993년 78억달러에 불과하던 수입액은 1997년 112억달러 규모로 늘었다. IMF의 여파로 1999년 수입액이 줄긴 했으나 그 이후 증가세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유입되는 저가 농산물이 전체 유통 농산물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수입농산물의 증가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농산물의 가격 하락을 초래한다. 2004년에 우루과이라운드가 본격 적용되면 외국 농산물이 물 밀듯이 밀려들어올 것은 자명하다. 저렴한 수입농산물을 제쳐두고 우리 농산물을 이용하자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2002년 현재 우리 농업계는 아직 ‘괜찮다’. 1999년 기준으로 가구당 부채 규모가 1850만원에 이르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 농산물이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지 않고 있는데다, 계속되는 정부의 농촌부양책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농업계는 전통적으로 보호의 대상이었다. 국민들 머릿속에 스스로를 ‘농민의 자식’으로 여기는 인식이 여전하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은 사회다. 더군다나 생존과 직결되는 식량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농업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호혜원칙이 적용됐다.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농민 대책은 선거 공약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한 정부 지원이 농업계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생도라지의 이영춘 사장은 “우리 농민들은 그동안 온상에서 컸다. 정부는 농가부채 탕감을 반복했고 농민들은 으레 정부지원을 기대했다. 우리 모두 농민의 자식이기 때문에 심지어 ‘실정법을 위반해도 농민이니까 봐준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자금 지원 위주의 정부정책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우리 농업의 취약성은 구조적 문제다. 영세농 위주인 현 농업에서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반미를 비롯한 기본식량을 생산하는 농업 인구를 전체 인구 대비 5%선으로 낮춰야 ‘규모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농림부 농촌인력과의 강형석 사무관은 “우리나라는 소농 위주이기 때문에 규모화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대안은 농산물 소비를 촉진하는 방안이다. 기본농산물 소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수입농산물이 들어오면 기본농산물의 소비 감소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 자명하다. 강사무관은 “주식 개념으로서의 기본농산물은 식량안보 차원에서 생산하되 나머지는 차별화된 상품으로서 소비 욕구를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미 한 가마가 20만원이라면 인삼쌀 한 가마는 270만원에 팔린다. 일반미 열 가마 이상 파는 것보다 인삼쌀 한 가마를 파는 것이 농가에 훨씬 이득이다.
경기도 이천농협에서 개발한 인삼쌀을 비롯, 최근에는 홍국쌀, 버섯쌀, 녹차쌀 등 각종 기능성 쌀이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기능성 쌀은 벼를 찧으면서 쌀 겉면을 특수처리한 것으로, 저공해나 무공해 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첨단 농법으로 생산된다.
고급스러운 것, 건강에 유익한 것을 찾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해 틈새를 파고 든 이런 기능성 쌀은 보통 쌀보다 2~8배 이상 높은 값에 판매됨에도 불구하고 호응을 얻고 있다. 일반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쌀 공급과잉으로 인한 쌀값 하락과 수매가 논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도 기능성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은 고정 판매처를 확보,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다.
신바이오텍은 지난 2000년초 버섯균사체를 쌀 표면에 입힌 버섯쌀을 개발, 출시했다. 아가리쿠스쌀, 현미영지쌀, 흑미동충하초쌀 등을 판매하는 이 회사는 연간 300t의 버섯쌀을 생산한다. 선물용으로 포장해 직접 판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브랜드 보리쌀로 유명한 정원푸드에 납품함으로써 고정 소득을 올리고 있다.
본정은 인삼을 접목시킨 초콜릿으로 수출의 물꼬를 트고 있다. 1998년 첫 선을 보인 인삼초콜릿은 인터넷과 인사동 상점에서 주로 판매되는데 외국인들의 반응이 좋다. 현재 미국 동부 지역의 모 기업과 수출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
본정은 올해 홍삼초콜릿과 마늘초콜릿을 출시할 예정이다. 마늘초콜릿은 유난히 마늘을 많이 사용하는 이탈리아 음식과 잘 어울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본정의 이종태 사장은 “우리농산물의 소비를 촉진하는 길은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뿐”이라며 “마늘과 인삼은 ‘made in Korea’가 경쟁력을 갖는 작물이다. 따라서 우리 농산물과 외국인의 취향에 맞는 식품을 접목시키면 충분히 해외 시장도 공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농산물을 차별화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로 생산하기 위한 시도들에는 농업도 기업 마인드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식량은 필수품이니까 당연히 팔리려니 생각하고 종래의 생산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기호와 욕구를 파악하고 특색 있는 것, 더 좋은 것을 공급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농업에도 기업 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지난 1995년이다. 농업경제학 박사인 삼성경제연구소의 민승규 수석연구원은 농업에도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0년에는 농업벤처라는 개념이 대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새로운 상품, 부가가치를 높인 상품은 벤처정신으로 탄생된다. 벤처는 국내 농산물 시장을 지키고 역으로 해외시장으로 뻗어가기 위한 유일한 길로 농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농업벤처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정부 주도에 앞서 민간 차원에서 농업의 벤처화가 추진되면서부터다. 2000년 4월에는 민승규 박사와 250여 명의 농민들을 주축으로 한 농업벤처포럼이 출범했다. 새로운 활로를 찾는 농업인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교환하고 사업에 필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농업벤처포럼은 같은해 6월, 충남 금산의 한 폐교를 이용해 한국벤처농업대학을 개설했다. 벤처농업대학(www. vaf21.com)은 1년 과정으로 운영된다. 강의는 한 달에 한 번 주말을 이용해 진행된다. 민박사를 포함, 벤처농업대학의 명예학장이자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성훈 중앙대 교수, 88올림픽 마스코트 디자이너인 김현씨, 벤처기업 경영자 등이 강사로 초빙된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숙소에 모여 밤을 지새우며 토의와 토론 시간을 갖는다. 이 과정을 통해 벤처농업인들은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구상하기도 하고 서로 제휴할 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2001년 5월 첫 강의를 시작한 이 학교는 올 4월 80명의 1기 졸업생을 배출한다. 4월까지 2기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수강 자격에는 제한이 없다. 이미 벤처농업을 시작한 농민이든, 관심만 갖고 있는 농민이든 벤처와 농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1기 수강생은 대부분 이미 벤처농업을 시도하고 있는 농민, 회사 관계자들이었다. 농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농민인 경우 기업 경영을 배우고, 농민 출신이 아닌 경영인이라면 농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수강생들은 소정의 수강료를 내는데 이는 교재비와 숙박비, 식비 등으로 쓰인다. 특색 있는 점은 강의사례비를 농산물로 지급한다는 것이다. 벤처농업대학의 권영미 간사는 “농업벤처가 생산한 제품을 강의료로 드림으로써 그 강사들을 통해 홍보 효과를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한다. 권씨는 “농업분야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회원들은 대개 마케팅에 약점을 갖고 있다. 제품은 완벽하게 개발해 출시했지만 사업 경험이 적거나 지방에 연고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제품을 내다 팔 시장이 좁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학을 통해 첨단 경영기법을 배우기도 하고 새로운 유통채널을 찾기도 한다. 벤처농업대학은 인적 자원을 교류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민들 스스로 벤처로의 이행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정부 지원도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농림부는 지난 연말 제1호 농업전문투자조합인 ‘MAF-무한 Agro-Bio 벤처펀드 1호’를 출범시켰다. 이 벤처펀드는 농림부가 33억원을 출자하고 대한제당이 30억원, 한빛은행이 10억원, 현대증권이 5억원, 무한기술투자가 22억원을 출자해 만든 펀드로서 무한기술투자가 업무집행조합원 역할을 맡았다.
지난 2월에는 유전공학 서비스 전문업체인 g-TAC 바이오 메디칼에 첫번째 투자를 개시했고 현재 2, 3차 투자기업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농림부는 향후 5년 동안 농업생산, 농업투입재, 식품, 의학, 유통, 생물공학 등 농업 및 바이오 분야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농림부는 올해 안으로 100억원 규모의 농업전문투자조합을 서너 개 정도 더 결성해서 농업분야 벤처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오는 4월말까지 50억원 규모의 투자가 완료된다. 집행조합坪?무한기술투자를 통해 마케팅과 재무 분야에 대한 지원도 실시할 계획이다.
농림부는 또 농업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유치 기회를 제공할 농업벤처 창업박람회를 상반기중에 개최할 예정이다. 또 대학 및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창업으로 연결짓는 농업벤처 창업붐을 조성하기 위해 농업벤처 창업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각적 지원을 시도할 계획이다.
현재 농림부가 파악하고 있는 농업분야 벤처기업은 140여 개사에 달한다. 농림부는 농업벤처와 벤처형 농업을 구분한다. 벤처형 농업은 일반 농민이 작물 자체를 바꾸거나 생산, 재배 방식을 새롭게 바꾸는 등의 시도다. 농업벤처는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 차원에서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시도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 농림부의 지원사업은 농업벤처에 치중돼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일반 농가의 소득 개선 등 직접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벤처형 농업은 꾸준히 장려돼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재래식 농법에 익숙한 농민들은 벤처나 기업 경영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를 실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농림부는 이들 농민에게 이미 자리잡은 성공한 농가나 벤처기업을 견학시키는 등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부가 농업벤처를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부족한 정책 운영 능력이나 실정법상 문제는 벤처붐을 조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선 기능성 식품을 생산하는 농업 벤처들은 실정법의 제재를 받는다. 기능성 식품은 어디까지나 식품이지 약품이 아니다. 식품은 약품과 달리 효능을 표기할 수 없게 돼 있다. 따라서 다년생 도라지나 버섯쌀이 아무리 약효가 있다고 입증돼도 효능을 광고할 수 없어 공격적 마케팅을 전개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기능성 식품을 사용해본 사람들을 통한 입소문에 의존하는 정도다.
풍년농산의 나준순 사장은 “정부에서 선도기업을 더 끌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이 필요한데 벤처형 농업을 시도하는 농가나 벤처기업들은 연구개발비로 많은 금액을 투자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정부의 연구자금 지원이 필요하다.
1998년경 장생도라지의 이영춘 사장이 처음 회사 경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회사 재무구조나 경영구조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은행이나 관공서에 사업을 설명하고 대출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정부의 자금 지원이 원활히 이뤄지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다는 것은 여전히 많은 사업자들에게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로 여겨진다. 벤처 펀드를 통한 투자와 달리 정부지원사업에 선정돼 연구비를 지원받으려면 영농조합법인 형태여야 한다. 그런데 영농조합법인은 상법상 영리활동이 금지돼 있다. 따라서 정부지원사업의 수혜를 받기 위해 영농조합법인과 주식회사 두 가지 형태로 등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신바이오텍의 최신원 사장은 “정부 정책은 단기적이다. 괜히 적은 자금을 지원받았다가 발목을 잡히는 수도 있다.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신청서를 쓰고 경과를 보고하는 등 거쳐야 할 절차도 복잡하다. 가급적 벌어서 쓰고 투자는 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벤처가 출발할 때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성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농업벤처도 마찬가지여서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연구의 중요성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배추, 무 등의 씨앗을 개발, 판매해온 농우바이오는 재래 육종에 생명공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안용식 개발이사는 “농우바이오는 매출액의 10.3%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 현재 탄저병에도 무사히 견딜 수 있을 만큼 내병성 강한 품종을 개발, 임상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명공학은 새로운 품종, 작물을 개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 분야의 벤처들은 대부분 소규모 농가, 중소기업인 만큼 연구개발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다. 그만큼 산학협력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진다.
장생도라지가 지금처럼 자리를 잡기까지는 주변 기관들의 협조가 있었다. 진주전문대, 경상대, 조선대 등 인근 학교와 한국화학연구원, 생명공학연구원 등의 연구소들이 기술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인당한방병원은 임상연구병원으로서 도라지를 항암치료제로 활용하는 등 약효를 실험하는 데 조력했다.
일반 농민이 아이디어로 차별화된 상품을 개발한다 해도 이를 기업화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사업자금은 모자라고 사업주에게 필요한 경영이나 마케팅에 대한 능력과 마인드도 부족하다.
장생도라지의 경우 다년생 도라지 재배에 성공하고 가공식품을 내놓은 후에도 한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다. ‘도라지는 나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데다 주먹구구식 경영 때문이었다. 1998년 삼성항공에 다니던 이영춘씨가 회사를 물려받으면서 회사의 틀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사장과 함께 근무하던 박진수 팀장도 장생도라지에 합류했다. 박팀장은 “농산물을 생산해 판매한다고 해도 ‘기업 마인드’가 필요하다”며 “장생도라지의 경우 기본과 정도에 입각한 경영방침을 고수해왔다. 이제 사회적 기반, 협조 분위기가 조성된 만큼 충분히 경쟁력 있게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획기적 상품들도 아직 시장에서는 큰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기능성 식품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신바이오텍의 경우, 버섯쌀을 고정적으로 공급하는 판매처가 있기는 하지만 직판 쪽은 매우 취약한 편이다.
특이한 쌀이 나왔다고 신기하고 재밌게 바라보기는 해도 선뜻 구매하는 고객은 많지 않다. 버섯쌀을 잘 이해하지 못한 구매자들 중에는 ‘쌀에 곰팡이가 피었다’며 회사로 항의 전화를 해오거나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차별화된 농산물을 판매하기가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유통문제다. 농업 벤처들은 대부분 특정 지역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 규모 자체가 작고 마케팅을 전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벤처농업으로 인한 성과가 미미한 데 대해 일각에서는 벤처를 통한 상품의 차별화가 농업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더 두고봐야 할 일이라는 온건한 의견도 제시한다. 특히 벤처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은 자칫 농업의 뿌리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지적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농수산정보센터의 김성훈 팀장은 “도매상으로 대표되는 기존 유통채널과 재래 농법 등 지금까지 농업의 근간이 돼온 것들과 새로운 시도와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벤처가 벼랑 끝에 몰린 한국농업을 구출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섣불리 단정짓기 어렵다. 하지만 농업인들은 새로운 시도 자체가 대안이라는 데 동의한다.
신바이오텍의 최신원 사장은 “아직은 회사에서 기능성 쌀의 매출 비중이 20~30%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년 하반기경이면 시장이 본격 형성되기 시작해 2004년에는 연간 2만~3만t의 생산량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로운 유통채널로 인터넷에 기대를 걸고 있다. 2000년 3월 경북 성주군 선남면 도흥리의 25개 농가가 모여 홈페이지(www.dohung.co.kr)를 구축하고 전자상거래를 시작했다. 이들은 1000명이 넘는 고객에게 일일이 이메일을 보내 홈페이지를 홍보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참외를 판매하는 정도였지만 소비자를 직접 대면하고 까다로운 기호에 맞추다보니 자연스레 품질에도 더 신경을 쓰게 됐다. 연간 1억3000만원에 이르는 추가 소득을 거둔 것은 물론이고 기능성 식품인 게르마늄 참외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농수산정보센터의 김성훈 팀장은 “성주 도흥리 주민들의 성공은 작은 아이디어와 정성이 농가를 바꾼다는 것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라며 “기존 유통채널로 한계가 있다고 현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전문 기관이나 포럼 등의 협조를 구하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장생도라지의 박진수 팀장은 “농민들의 마인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박 팀장은 “농민들이 ‘발전’에 대한 의욕 없이 현실만 유지해나가기 급급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농림부 등 관계부처들이 의욕적으로 농업계 육성책을 내놓고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다. 하지만 농민 스스로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농업벤처는 새로운 길
이영춘 사장은 “농민들의 마인드도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농업계 내부에서 주도해 우리농산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캠페인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우리 고유의 발렌타인데이로 ‘견우와 직녀날’을 제정, 우리 농산물 주고받기 운동을 벌였다. 민간 주도로 시작한 일이 이제는 지자체 단위로 추진될 만큼 성과를 거뒀고 농민들은 스스로 일으킨 일이 정부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데서 의의를 찾고 있다.
농업벤처포럼에도 참여하고 있는 이영춘 사장은 “예전에는 농민들이 무슨 일을 추진하려 할 때 정부 도움부터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돈으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수익자 부담원칙을 지켜야 우리 농업도 살아난다”고 말했다.
아직 성공사례라고 할 만한 농가, 벤처기업은 10여 개에 불과하지만 이들 회사가 본궤도에 올라서면 후발 농업인들이 따라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본정의 이종태 사장은 “처음 시작할 때는 잘 몰랐지만 3년간 사업을 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다. 지금은 농업에 벤처가 어울릴까 안 어울릴까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새로운 길이 된다는 확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사장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며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된 지금이야말로 우리 기술을 개발하고 발휘하기 가장 좋은 때이니 두려움 없이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벤처라는 새로운 시도로 활로를 찾고 있는 농업 종사자들은 국가 경제의 전부인 것처럼 붐을 일으켰다가 대부분 거품으로 드러난 IT분야 벤처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기업 마인드, 서비스 정신, 새로운 것에 대한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농업 벤처인들은 벤처가 필연적인 농업의 발전방향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벤처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