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방아잎 향기로운 경상도의 맛

박관용 국회의장의 미더덕찜

  • 글·최영재 기자 cyj@donga.com

    입력2002-10-06 0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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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더덕은 흔히 멍게로 불리는 우렁쉥이와 맛이 비슷하며
    • 된장찌개에 주로 쓰이는데, 각종 야채와 쌀가루 또는
    • 녹말가루를 풀어 되직하게 만든 찜은 미더덕의 향과 야채의 담백함,
    •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어우러진 특미 음식이다.
    방아잎 향기로운 경상도의 맛
    지난 8월31일 새벽 4시,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 정균환 총무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 20여 명이 들이닥쳤다. 박관용 국회의장의 출근을 봉쇄해 김정길 법무장관 해임안 처리를 막기 위해서였다. 험악한 상황이었지만, 쳐들어온 사람들을 굶길 수는 없었다. 박의장 집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아침식사로 시래기된장국과 쌀밥, 쇠고기 장조림, 마늘 장아찌, 멸치 고추장 볶음, 콩잎, 멸치젓 등을 내놓았다. 모두 맵고 짠 경상도 음식이다. 이 식단은 인기를 끌었다. 점심 무렵에는 박의장 구출조로 투입된 한나라당 의원들과 기자까지 가세해 50여 명이 이 식단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과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김치맛이 좋아 여성의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음식의 맛이 짜고 매운 데도 종류가 있다. 조미료와 양념맛으로만 짜고 맵다면, 먹는 이의 혀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짜고 매운 맛에 재료와 조리법에서 생긴 깊고 그윽함과 향기가 배어 있다면 맨밥을 몇 술씩 떠서 짠맛을 달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매운맛을 즐길 수 있다. 박관용 의장댁의 경상도식 음식이 바로 그렇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박관용 의장은 경상도 특유의 짜고 매운맛에 길들어 있다. 생선회도 좋아하는데, 살이 깊은 생선을 곱게 회를 떠서 간장에 찍어 먹는 일본식보다는, 살이 얕은 잡어들을 뼈째 썰어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이 부산· 경남에서 생선회를 먹는 방식이다. 경상도 음식 가운데서도 박의장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미더덕찜.

    부산 범일동에서 살던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부모님과 형제자매 일곱 명, 친척 두 명까지 합쳐 모두 11명이었다. 미더덕찜은 원래 경남 마산 음식인데, 대가족의 식사를 책임졌던 박의장의 어머니는 이 미더덕찜으로 가족들을 감동시켰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매운 미더덕찜을 한 함지박 그득하게 만들면, 대가족 11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포식하고, 이웃에도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미더덕찜은 만들기가 까다롭다. 먼저 미더덕과 대합 같은 조갯살, 새우살 등 해물을 잘 손질하여 씻어둔다. 다음에 미나리를 잎을 제거하고 줄기만 골라 씻어 4cm 두께로 채 썬다. 콩나물은 머리와 꼬리를 떼내고, 양파는 0.5cm 두께로 채 썬다. 재료 손질이 끝나면 속이 깊은 프라이팬이나 찜용 냄비에 콩나물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뒤, 중불로 익힌다. 불은 계속 중불로 유지하면 된다. 김이 나고 콩나물이 익으면 미더덕과 해물, 양파를 넣고 다시 살짝 익힌다. 재료에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물은 따로 붓지 않아도 된다. 해물이 익으면 갖은 양념(고춧가루, 마늘, 소금)을 넣고 버무린다. 여기에 쌀가루나 녹말가루에 된장을 조금 넣고 물에 갠 뒤, 찜에 붓는다. 걸쭉해지면, 방아잎을 마지막에 넣고 살짝 뒤적인 뒤, 불을 끄고 접시에 담아내면 된다. 처음 만들어 보아 간이나 양념에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소금과 조미료를 많이 넣지 말고 맛을 보아가며 중간 중간에 넣는 것이 좋다.



    방아잎 향기로운 경상도의 맛

    콩나물이 익었는지 살펴보는 박의장 부부

    박의장댁 미더덕찜의 특징은 매운맛도 매운맛이지만 방아잎을 쓴다는 점이다. ‘배초향’이 원명인 방아는 경상도에서만 먹는 향기로운 잎채소다. 경상도에서는 부침개, 찜, 국, 찌개를 끓일 때 방아잎을 넣는데, 타지 사람들은 향이 강해 먹기 힘들다. 박의장은 이 방아잎을 좋아해서 사저에 살 때는 좁은 마당에 이 방아를 직접 키워서 먹었다.

    박의장은 1967년 10월,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정치에 입문한 뒤 반평생을 국회에서 지냈다. 국회는 인생 그 자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통령이든 총리든 자리 욕심을 낸 적이 거의 없지만, 임기 2년의 국회의장 제의가 왔을 때 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는 국회의장을 국회에서 시작한 그의 인생을 총정리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회의장이란 자리는 고달프기 짝이 없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출근시간이 따로 없고, 비교적 자유롭게 일정을 짤 수 있었다. 그러나 국회의장은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해야 하고, 개인 일정을 따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도그럴 것이 각종 의전과 외국 귀빈 영접 등 국가 차원의 행사가 쏟아진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사생활이 있을 수가 없다. 퇴근한 뒤에도 사는 집 자체가 국회의장 공관이니, 제대로 쉬질 못한다. 공관에서는 공식 만찬이 이어진다. 그러니 의장 공관에 정이 들 리 없다. 집은 사저보다 넓고 쾌적하지만, 도무지 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이 바로 부인 정순자 여사다. 박의장 부부는 1967년 7월 부산 광복동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올해로 결혼 35주년이다. 이 부부는 2년 정도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는데, 37년 묵은 연애 이야기가 재미난다. 첫 데이트하던 날 박의장이 정여사를 데리고 간 곳이 부산 중앙동의 권투시합장이었다. 기가 찬 정여사는 그래도 데이트 상대가 듬직해서 참아내려 했으나, 피가 튀는 권투시합을 여린 처녀의 시선으로 볼 수가 없어 초반에 시합장을 뛰쳐나갔다는 것이다. 박의장의 경상도 사나이식 교제는 이때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정여사의 푸념이다.

    “이 양반하고 데이트한다고 부산 광복동에 자주 갔는데, 싸움만 나면 사람이 없어져예. 어데 갔는지 찾아보면 싸움판 곁에 서서 싸움 구경하고 있는 거 아입니꺼? 애인은 관심도 없어예.”

    요즘 같으면 딱지 맞기 십상인 연애 방식이지만 37년 전 부산 아가씨들한테는 박의장식 연애가 통했나 보다. 아마 정여사는 그런 박의장이 듬직하고 사내다워서 끌렸을 것이다. 박의장에게 “사모님의 어떤 점에 끌렸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그 대답이 또 고전스럽다. 첫째는 마음씨가 너무 곱고, 둘째는 순종형이라는 것이다.

    박의장은 문민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지금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스런 비서실장 자리를 떠나던 날, 새장에서 풀려난 새가 창공을 훨훨 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잠시도 쉴 새 없는 고단한 삶이지만 그는 청와대에서 나오던 그 날을 기억하며 피로를 견딘다. 임기가 끝나는 그 날, 친한 친구들과 허름한 음식점으로 달려가서 삼겹살도 굽고, 생선도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웃고 농담하고 즐기리라. 그 음식점이 미더덕찜을 내놓는 집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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