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17대 총선의 정치·사회적 의미

2002 대선 완결판, 이념정당 체제 돌입, ‘3김정치’종식

  • 글: 이내영 고려대 교수·정치학 nylee7@hanmail.net

    입력2004-04-27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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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메시지는 소모적인 대결 정치를 끝내고 민생현안에 귀 기울이는 생산적 정치를 복원하라는 것이다. 분열과 갈등을 통합하는 데는 탄핵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탄핵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반영된 만큼 국회는 탄핵철회에 합의하고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
    17대 총선의 정치·사회적 의미

    17대 총선 개표결과 원내 1당이 확실해지자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이 손을 맞잡고 기뻐하고 있다.

    제17대 총선의 드라마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탄핵정국과 맞물린 이번 총선은 정치지형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지난 일 년간 소수 여당으로 어려움을 겪은 열린우리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거대 여당이던 한나라당은 제2당으로 추락했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소수정당으로 몰락했으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두 자릿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제3당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이러한 정치지형 변화는 향후 정국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남아 있지만,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점유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돼 정부와 여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한편 제2당으로 추락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견제력이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결과는 민주노동당의 약진이다. 기존 정당들과 전혀 다른 성격의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한다는 것만으로도 정치사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두 자릿수 의석을 확보, 제3당이 됨으로써 보수 독점 구도였던 한국 의회정치에 적지 않은,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제17대 총선에서는 이러한 정치지형 변화뿐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관찰됐다. 조직과 돈이 아니라 참신성과 투명성이 무기가 되는 새로운 게임의 룰이 적용된 것이다. 우선 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감으로 인해 후보 공천과정에서부터 이른바 물갈이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바람은 정치개혁에 대한 강한 압박으로 이어져 선거법 규정이 한층 엄격하게 개정·적용됐다. 결과적으로 물갈이 바람은 현역 의원 공천율을 크게 낮춤으로써 젊고 참신한 인물을 대거 원내에 진출시켰다.

    정책 대결보다 이미지 대결



    하지만 이번 총선이 정당체제의 재편을 초래하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정치지형과 선거과정에서의 변화가 정당체제의 재편, 즉 지역정당체제의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선거가 중대선거로 평가되려면 첫째 유권자의 재정렬(realignment)을 야기해야 하고, 둘째 그러한 재정렬이 이후 선거에서도 지속돼야 한다. 따라서 영남과 호남지역에서 각각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이번 17대 총선을 중대선거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번 총선의 특징을 선거 과정과 투표 행태로 나누어 살펴보고, 주요 선거결과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과제를 논의할 것이다.

    이번 총선은 불법 대선자금 논란과 대통령 측근비리 등으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과 분노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정당들의 총선후보 공천과정에서부터 이른바 물갈이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 결과 현역 의원 약 36%가 공천에서 탈락, 사상 최대의 ‘현역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젊고 참신한 인물에 대한 유권자 선호도가 높아져 공천자의 평균 연령은 지난 총선 당시 52.6세보다 2.8세 낮아진 49.8세로 나타났다.

    또한 선거직전 통과된 새 선거법은 불법 선거의 기준과 선거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이처럼 강화된 선거법이 적용됨에 따라 이번 선거에서는 금권선거가 사라지고 선거비용이 축소돼 이전 선거보다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에서는 선거법 위반사례가 지난 선거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는 등 선거판이 여전히 혼탁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선거법 규정이 더욱 엄격해졌고, 선거법 위반자에 대한 단속이 훨씬 강화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엄격해진 선거법은 부작용도 드러냈다. 무엇보다 선거법이 거리유세를 제한하고 정당 합동연설회를 금지하는 등 규제 위주여서 유권자가 후보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인터넷 이용률의 폭발적인 증가와 선거법 개정에 힘입어 미디어와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이 크게 활성화됐다. 이는 금권선거의 고리를 차단하고 선거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정책과 인물 대결이 실종되고 감성과 이미지에 호소하는 정치경쟁으로 흐르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다.

    특히 정책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 보수 지역정당체제하에서 도입된 미디어 정치로 인해 각 정당은 상대당과의 정책적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도덕성 부각과 이미지 연출을 유권자 동원의 주된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는 현재의 지역대결 구도를 정책 혹은 이념대결 구도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번 총선에서는 지난 16대 대선에 이어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간에, 진보적 유권자와 보수 성향의 유권자간에 후보 및 정당 선택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수도권 대도시의 투표율이 16대 총선 때보다 상승했으며, 처음 실시된 정당투표제의 영향으로 지역구 후보와 비례대표 정당을 다르게 선택하는 유권자(split-voter)가 적지 않게 발생하는 등 투표 행태 측면에서 의미 있는 특징이 나타났다.

    이념정당체제로 재편 가능성 보여

    2002년 대선 정국에서 출현한 세대정치는 이번 총선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나이 든 세대일수록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17대 총선에서도 20, 30대 유권자는 열린우리당을, 50대 이상 유권자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세대간 정치균열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한편 진보성향의 유권자일수록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보수성향의 유권자일수록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등 정치이념에 따른 균열도 뚜렷하게 나타남으로써 이념정당체제로의 재편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다.

    정당투표제의 효과도 작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선거구제로 실시된 지역구 선거에서는 2석에 그친 민주노동당이 정당투표제가 실시된 비례대표 선거에서 8석을 확보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는 소선거구제에서는 사표(死票) 방지 심리로 인해 유권자가 당선 가능한 정당의 후보를 선택하지만(전략적 투표: strategic voting) 사표가 발생하지 않는 정당투표제에서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진실한 투표: sincere voting)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에 있어 의회의 대표성과 응답성(responsiveness)의 제고를 위해서도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게 전달되는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역정당체제가 완화되기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총선에서도 영남과 호남 유권자의 지역주의적 투표 패턴은 여전했다. 영남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들이 거의 모든 지역구에서 당선된 반면 호남에서는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석권하는 구도가 재현됐다. 이러한 결과는 지역정당체제 타파와 전국정당화를 주장한 열린우리당의 실험이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지역주의 청산 메시지 주효

    이번 총선의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제 1당 부상, 한나라당의 상대적 위축,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 민노당의 약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는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단 한번도 한 정당이 독자적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치사적 의미가 크다. 이는 3공 이후 지속적으로 보수 세력이 의회권력을 장악해왔는데, 자유주의적 개혁세력이 의회를 장악해 의회권력의 중심이 바뀐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제1당으로 부상한 첫째 원인으로는 야당의 무리한 탄핵안 가결과 그 후폭풍을 꼽는다. 이후 야당의 거여견제론과 박근혜 바람,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훼발언으로 탄핵바람이 수그러드는 추세가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는 탄핵이슈가 열린우리당을 살린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둘째, 열린우리당에 대한 젊은 세대의 압도적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세대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세대별 투표성향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면밀히 검토해야 하지만 젊은 세대가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열린우리당이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은 것은 민주당과의 분당(分黨)이라는 정치적 모험을 감수하고 낡은 정치와 지역주의를 청산하겠다는 메시지가 젊은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제1당에서 2당으로 추락했는데, 불법대선자금 수수로 부패와 수구정당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고, 탄핵역풍이라는 악조건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탄핵역풍 아래서 당을 정비하고 선거막판에 박근혜 효과와 영남 지역주의 결집,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훼 발언 등 여러 변수의 작용으로 열린우리당과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한 것만으로도 선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거대여당을 견제하기 위한 의석을 달라는 선거전략이 영남권 유권자에게 먹혀들었다고 분석된다.

    그러나 한나라당으로선 개헌저지선인 100석을 넘어 목표의석인 121석을 확보했다고 안도하기보다는 왜 제1당의 자리를 빼앗겼는가에 대한 뼈아픈 자성과 환골탈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거대야당으로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발목잡기와 반사이익에 기대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탄핵가결이라는 파국에 이른 원인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에서 표출된 민의(民意)를 겸허하게 수렴하고 당내 민주화에도 박차를 가해 건전한 보수정당으로서 이념적 정체성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과거지향적이고 부패한 수구정당의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개혁과 변신에 성공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의 미래는 어둡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은 소수 지역정당으로 몰락해 향후 당의 진로가 불투명해졌다. 특히 민주당은 61석에서 9석으로 의석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순형 대표, 추미애 선대위원장, 박상천 전 대표 등 지도부가 몰락해 당을 재건할 리더십이 부재한 위기상황을 맞았다.

    민주당의 위기는 열린우리당의 분당 이후 호남지역을 양분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겪으며 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개혁에 저항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시작됐다. 2002년 대선과정에서 후단협에 참여한 의원들이 분당 이후 지도부를 장악해 개혁지향적인 소장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나라당과 공조한 것도 위기의 다른 요인이었다.

    또한 민주당은 갈등과 내분을 겪으며 당내경선과 후보 물갈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역의원 공천율이 제일 높았다는 점도 민심 이반을 가져온 원인으로 판단된다.

    특히 한나라당과 공조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킨 것에 대한 역풍을 가장 크게 받아 호남유권자들의 이반이 본격화됐다.

    이러한 상황에 추미애 의원이 선대본부장을 맡아 호남정서에 호소하는 전략을 펼쳤지만 호남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향후 민주당은 지역주의 기반을 잃은 자민련처럼 소멸하거나 열린우리당 혹은 한나라당에 통합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자민련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자민련은 충남에서만 지역구 4석을 얻었을 뿐 비례대표 진입장벽인 정당투표 3% 획득에도 실패했다. 자민련이 지역소수당으로 소멸하는 운명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이 몰락한 상황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한국정치에서 3김정치가 완전히 종식된 것을 의미한다. 자민련 지도자로 10선(選)에 도전했던 김종필 의원의 낙선과 3김의 우산 아래 성장한 동교동 가신 그룹의 대거 탈락은 3김정치 청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하다.

    민주노동당이 새로 도입한 정당투표제를 통해 원내 10석을 차지하면서 제3당으로 부상한 것은 이번 총선의 최대 이변이자 앞으로 한국 의회정치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는 측면이다. 조봉암이 이끌던 진보당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재야에 머물던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입이 실현됐다는 점에서 그 정치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민노당 등장으로 정책대결 기대

    민노당의 약진은 지난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어느 정도 감지됐다. 최근 기존 정당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진 것도 민노당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민노당의 의회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결정적인 요인은 최초로 1인2표제가 도입돼 정당투표의 전국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의석이 배분된 것이다.

    물론 의석수로만 보면 민노당은 소수 정당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노당의 의회진출에 주목하는 이유는 진보정당의 의회진입이 한국 의회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우선 민노당의 원내 진입은 보수정당 일변도의 이념적 편향성을 극복하고 그동안 배제됐던 노동자, 농민, 서민의 이익이 의회에서 상시적으로 대표된다는 점에서 의회정치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보수 정당과 뚜렷하게 다른 정책을 선호하는 민노당 의원들이 의회정치에서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지금까지 한국 의회에서 보지 못했던 노선 대결과 정책 논쟁이 빈번하게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민노당의 의회진출이 보수정당들의 취약한 이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책과 노선의 차별화를 통해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촉매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진성당원의 비율이 높고 당내민주화가 가장 앞서 있는 민노당의 등장은 기존 정당의 민주화에도 자극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급진적 성향을 가진 민노당의 의회 진입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좌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념대결이 첨예화돼 의회정치가 표류할 것을 걱정하는 보수세력의 우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민노당은 한국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계층적, 이념적 갈등을 제도정치의 틀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회통합과 갈등관리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진보정당인 민노당의 의회진출로 17대 국회는 새로운 정치실험의 무대가 될 전망이다.

    탄핵 철회로 국론분열 막아야

    이제 정치권에 주어진 과제는 총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총선에서 표출된 국민 기대에 화답해 새로운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부패하고 소모적인 극한대결의 정치를 끝내고, 민생현안 해결에 귀 기울이는 생산적인 정치를 복원하라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정치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정치권이 총선 충격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지형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당분간 혼돈과 불확실성이 혼재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구태 정치를 불신하고 대화와 상생의 정치를 열망하고 있다. 정치권은 이러한 국민의 기대에 화답하기 위한 노력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총선 이후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분열된 국론을 결집시키고 갈등을 통합하는 일것이다. 모든 선거가 사회집단간 갈등을 증폭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이번 총선은 탄핵정국과 맞물리면서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혼란과 분열 속에 진행됐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이 세대대결과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현상도 나타났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 지역주의 투표행태가 더욱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난 것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이 총선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한국사회는 큰 위기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탄핵사태로 불거진 국민들의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세대·지역·이념 갈등의 골을 메우는 데 정치권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총선에서 나타난 분열과 갈등을 통합하는 데는 탄핵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탄핵여부 판정은 헌법재판소에 넘겨졌고 현재 심의가 진행 중이지만, 헌재의 판정에 대해 탄핵반대와 탄핵찬성 진영 어느 쪽이든 승복하지 않는다면 대립양상은 더욱 첨예해질 것이다. 이번 총선 결과는 탄핵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총선 이후에 16대 국회가 결자해지 차원에서 탄핵철회에 합의하고 대통령은 야당에게 사과하는 정치적 타협책을 모색할 수 있다면 17대 국회가 탄핵안 처리라는 정치적 부담 없이 대화와 상생의 새로운 정치를 여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타협이 어렵다면 정치권이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판정에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헌재는 탄핵심판을 서둘러 탄핵으로 인한 더 이상의 국론분열을 피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현안 초당적 협력해야

    타협과 상생의 여야관계를 정립하는 것도 한국정치의 중요한 과제다. 한국정치가 탄핵이라는 파국적 상황에 도달하게 된 이유는 노무현 정부 등장 이후 여야가 극한대립과 오기의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다. 새 국회에서는 진보적 노선과 정책성향을 가진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상대당의 이념과 노선을 인정하고 경쟁하고 타협하는 ‘포용의 정치’가 정착되지 않으면 국회가 이념과 노선 갈등으로 인해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점에서 이번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의 자세가 관건이다. 직무에 복귀한 노 대통령이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야당을 적대시하거나 배제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분열과 대립은 계속될 것이지만, 반대로 야당과 반대세력을 껴안는 통합의 정치를 편다면 협조적이면서도 경쟁하는 여야관계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총선 이후 정치권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총선과정에서 간과된 국정과제들과 민생현안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문제 재검토, 북한 핵개발을 막기 위한 한미공조와 6자회담 등 외교안보 현안에도 여야가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 하고, 경제회복과 실업문제, 신용불량자 처리문제 등 산적한 민생현안들에 대해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이번 총선에서 소수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갖게 된 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지난 1년간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고, 요란한 구호보다는 가시적인 업적을 보여주는 국정운영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과반 의석을 준 민심은 노무현 정부에 소수정부의 한계를 넘어 안정된 국정운영과 개혁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이 민심(民心)은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조건부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은 선진국 재도약을 위한 구체적 국정 청사진과 현실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정 동반자로서 야당과 협력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새 정치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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