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실, 억지로 드러난 ‘진승현 게이트’ 수사
- ‘이달의 기자상’ 받은 ‘특종성 오보’
- “검찰 간부가 준 것이라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 수사내용과 풍문이 뒤섞인 ‘신광옥 파일’
- 검찰 관계자, “언론보도 없었다면 신광옥 조사 힘들었을 것”
신광옥 전 법무부 차관이 최근 털어놓은 얘기다. 2001년 12월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됐던 신씨는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난 3월 대법원은 그의 무죄를 확정했다.
신 전 차관의 증언대로라면 검찰(정확히 말하면 모 검찰 간부)과 언론이 짜고 ‘죄 없는’ 사람을 옭아맨 셈이다. 이 놀라운 증언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우선 ‘진승현 게이트’에 대한 검찰수사를 법원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살펴보자.
10월8일 대법원 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현대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 대한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날 권노갑씨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같은 재판부가 ‘진승현 게이트’ 관련 혐의를 무죄로 확정한 것이다. 진승현씨에게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권씨는 1심에서 유죄,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골프가방’ ‘1억원’ 모두 소설
권노갑씨처럼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1심 유죄, 항소심 무죄, 대법원 무죄의 절차를 거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신광옥 전 법무부 차관이다. 신광옥씨에 이어 권노갑씨도 무죄가 확정됨으로써 ‘진승현 게이트’에 대한 검찰수사는, 적어도 두 사람에 관한 한 부실수사이거나 무리한 수사였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신광옥씨의 구속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논란거리였다. 언론보도가 검찰수사를 이끄는 여론재판 성격을 띤 데다 검찰의 공소사실이 미덥지 못했던 까닭이다. “진승현 돈을 한푼이라도 받았다면 할복자살 하겠다”는 신씨의 결백 주장은 J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융단폭격에 묻혀버렸다.
그가 구속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J일보의 특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보로 판명됐다. 진승현씨가 골프가방에 1억원을 담아 신씨에게 건넸다는 내용이었는데, 수사결과 그런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것. ‘골프가방’도, ‘1억원’도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당연히 진씨가 신씨에게 직접 돈을 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기사를 쓴 J일보 기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독점적이고도 지속적인 후속보도에 힘입어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신씨의 구속사유는 진씨의 돈을 받은 최택곤씨에게서 1800만원을 받은 혐의다. 그것도 여섯 차례에 걸쳐 매번 300만원씩 받았다는 것(최씨는 민주당 당료 출신으로 진씨가 대표로 있던 ‘MCI 코리아’의 고문을 지냈다). 액수나 돈을 주고받은 과정도 석연찮았지만, 받은 것이 사실이라 쳐도 대가성 여부가 분명치 않았다. 뭔가 짜 맞춰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신씨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최씨에게 뇌물공여 혐의가 적용되지 않은 점도 이런 의혹을 뒷받침했다. 최씨는 진씨에게서 로비자금 1억여원을 받은 혐의로만 기소됐다. 게다가 법정에서 신씨에게 준 돈의 대가성을 일관되게 부인했다. 진씨도 최씨를 통해 신씨에게 어떠한 청탁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신씨가 법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검찰은 그를 기소하면서 최씨에게서 진씨의 돈 1800만원을 받은 혐의 외에 뇌물혐의 두 가지를 덧붙였다. 하나는 최씨와 관련된 것으로 1800만원과 별개로 인사청탁 대가로 3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축업자에게 역시 인사청탁을 받고 50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신씨가 최씨를 통해 진씨의 돈을 받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재판부는 인사청탁 관련 두 가지 혐의 중 후자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사건의 본질과 관련 없는 곁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법무부 차관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건 ‘진승현 게이트’ 연루 혐의였기 때문이다. 주가조작 등 대형 금융사고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진승현씨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신씨를 법보다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여론재판의 명분이 됐다.
“검사장급 이상 간부에게 확인”
‘신동아’는 신씨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직후 ‘신광옥 구속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기사(2002년 4월호)에서 검찰수사 및 판결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이 사건의 의문점을 파고든 최초의 언론보도였다.
신씨 사건에서 유무죄 공방 못지않게 관심을 끈 것은 사건의 배경, 즉 누가 어떤 목적으로 J일보에 신씨 관련 혐의를 흘렸느냐는 것이다. J일보 기사는 오보이긴 했지만 신씨와 진승현씨의 관계를 처음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평가받을 만했다. 검찰은 이 ‘특종성 오보’를 명분 삼아 신씨를 소환하는 등 본격 수사에 착수했고 언론은 이를 독려하면서 후속기사를 쓰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양상이 전개됐다.
이 사건이 검찰 내부의 암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항간의 추측은 시간이 흐를수록 설득력을 얻었다. ‘신동아’ 2002년 4월호 기사도 이른바 음모론을 추적한 바 있다. 여러 정황에 비춰 ‘제보자’는 검찰간부인 듯하다.
당시 신씨는 J일보 기사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출석한 J일보 관계자는 당연히(?) 취재원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검사장급 이상 검찰간부로부터 정보를 입수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안팎에서는 신씨의 석연찮은 구속과정을 두고 파워게임설(說)이 그럴 듯하게 나돌았다.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과의 불화설, 차기 검찰총장 경쟁설(신씨는 유력한 차기 검찰총장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등이 그것이다.
수사 라인이 아닌 쪽 간부일 수도
이와 관련해 기자는 최근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다. J일보 고위관계자가 신씨에게 검찰간부 관련설의 진상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신씨는 기자가 이에 대해 묻자 부인하지 않았다.
신씨에 따르면 그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J일보 고위관계자가 특별면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보도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중앙일보 고위관계자)는 ‘나는 (보도경위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과정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네 간부가 검찰 간부한테 (자료를) 받았고, ‘이건 확실하다’고 판단해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자기는 힘도 써보지 못했는데, 설령 미리 알고 (기사를) 막는다 해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라고 하더라. 그만큼 그쪽에서는 확실한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J일보가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것은 2001년 12월11일이다. 신씨가 들려준 J일보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J일보 편집국 간부와 검찰 간부는 기사가 나가기 전날 만났다고 한다. 장소는 강남의 한 서점. J일보 고위관계자의 표현대로라면 ‘007작전 하듯’ 스쳐 지나가며 서류봉투를 주고받았다는 것. 봉투 안엔 신씨의 비리 관련 자료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신씨는 이 자료에 대해 “J일보 고위관계자의 설명과 기사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그때까지 수사에서 확인된 내용과 풍문을 바탕으로 만든 검찰 내부 보고서였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J일보 고위관계자는 신씨를 특별면회할 당시 부장급 간부 2명을 대동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신씨의 증언.
“그(J일보 고위관계자)가 자료를 건네준 검찰 간부의 이름까지 거론하려고 해 내가 입을 막았다. 그 얘긴 그만하자고. 교도관이 듣고 있는데, 친정인 검찰에 관한 수치스러운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J일보 고위관계자가 신씨를 면회하면서 이런 얘기를 털어놓은 데는 신씨와 J일보 간의 소송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신씨는 구속되기 전 J일보사와 기자 4명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대한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이 소송은 지금도 진행중인데 조만간 판결이 날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기관인 검찰의 간부가 건넨 자료라면 신빙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언론계 상식이다. 따라서 J일보 고위관계자가 신씨에게 그런 얘기를 털어놓은 속내는 기사를 쓸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고 소송을 취하해달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신씨도 같은 생각이다.
J일보 관계자가 신씨에게 들려준 얘기가 사실이라면 문제의 검찰간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검찰의 한 간부는 “현직 법무부 차관을 끌어내리는 자료가 검찰에서 언론사로 넘어갔다면 평검사 선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나중에 책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부, 그것도 고위간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 간부는 또 문제의 자료가 수사팀에서 만든 공식 보고서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J일보 보도는 결국 오보 아니었나. 수사팀에서 작성한 내부 보고서라면 틀린 내용,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될 수 없다. 수사보고서에는 확인된 사실만 기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문서가 넘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수사라인이 아닌 쪽 간부가 수사팀에서 흘러나온 내용과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섞어 만든 자료일 가능성이 크다.”
이 간부의 추론은 일리가 있다. 정확한 수사내용을 담은 자료였다면 ‘골프가방’이니 ‘1억원’이니 하는 엉뚱한 기사가 나갔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라인에 있던 한 간부에 따르면 수사팀은 J일보에 관련기사가 나오기 전 진승현씨의 진술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신씨에게 1억원을 건넸다는 게 아니라 최씨한테 1억원을 줬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씨를 불러 조사해야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최씨를 소환하기 직전 J일보 보도가 나왔다는 것이다.
검찰의 한 간부는 “J일보측에서 진승현이 정확히 어떻게 진술했는지를 모른 채 검찰 수사팀이나 수사보고라인에 있는 고위간부를 통해 진승현의 진술 중에 신광옥 관련 내용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상태에서 기사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했다.
언론보도가 검찰수사에 앞서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수사팀이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대형사건 수사에서 검찰은 종종 언론을 활용하거나 언론과 합작해 ‘대어’를 낚아왔다. 그러므로 신광옥씨 사건에서 수사팀이 언론을 활용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위 검찰간부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 수사팀은 진승현으로부터 최택곤에게 1억원을 줬다는 진술만 받아냈지 그 돈이 실제로 신광옥에게 전달됐는지에 대해선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 정도 진술만으로 현직 법무부 차관인 신광옥을 조사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수사팀으로서는 욕심을 낼 만했다. 진승현 진술에서 신광옥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론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수사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한 건 하겠다’는 수사 욕심에 언론에다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있다.”
수사팀 제보설에 대해 당시 수사팀 고위관계자는 이렇게 반박한 바 있다.
“수사팀이 흘릴 이유가 없다. 언론보도 후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최택곤이 출두약속을 어기는 등 자칫 수사를 망칠 뻔했다.”
당시 보고선상에 있던 검찰 간부들을 살펴보자. 서울지검 특수1부장 박영관-서울지검 3차장 박상길-서울지검장 김대웅-검찰총장 신승남. 그밖에 직계 보고라인은 아니지만 김각영 대검 차장이 있었다. 또 중대사안인 만큼 청와대 민정 쪽과의 대화채널인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에서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을 개연성도 있다.
서울지검 특수1부가 신광옥씨를 구속한 것은 2001년 12월이다. 박영관 당시 특수1부장은 이듬해 8월 이른바 ‘병풍수사 유도 발언’ 파문에 휩싸여 한나라당에 의해 고발당했다. 서울지검 형사1부는 지난해 그를 무혐의 처분했다. 그런데 신씨는 이 사건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박 전 부장의 혐의와 별개로, 병풍이 먼저 정치권에서 쟁점이 된 후 검찰수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신씨가 구속될 때 중요한 위치에 있던 검찰 간부 중 한 명은 김대중 정부 초기 민정비서관에 내정된 이범관 서울지검 1차장의 청와대 입성을 막기 위해 정치권 인사에게 이 차장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자료를 넘긴 적이 있다. 정치권 인사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일종의 정보보고서를 만들어 동교동계 실세들에게 돌렸다. 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