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리디노미네이션 ‘일단 잠수’ 배경은?

박승의 ‘오버’, 이헌재의 무기력증, 초선의원 아마추어리즘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4-10-26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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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은, ‘시행 효과가 비용의 3배 이상’ 분석 끝내
    • 이헌재 부총리가 8일 만에 입장 선회한 까닭
    • 한은은 왜 보고서에서 ‘개혁’자를 떼어냈나
    • 부총리 바뀌기 전엔 당분간 재론 힘들 듯
    리디노미네이션 ‘일단 잠수’ 배경은?

    리디노미네이션 문제를 처음 제기한 박승 총재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단위 변경)에 관한 비용-편익 분석을 모두 마치고 원화에 대한 평가절하를 통해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경우 앞으로 10년간 발생할 총편익이 투입비용의 3배가 넘는 8조6000억원이라고 분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2년간의 검토작업을 거쳐 추정한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항목별 비용-편익 분석 내용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동안 한국은행은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찬반논란이 거듭되자 국정감사 자료에서조차 리디노미네이션의 효과를 포함한 비용-편익 검토 내용의 공개를 거부해왔다.

    ‘신동아’가 입수한 한국은행 자료(2004년 9월)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원화를 1000 대 1의 비율로 절하해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경우 연간 6000억원에 이르는 자기앞수표 발행과 관리비용을 줄임으로써 10년간 6조원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장부 기장 작업이 간편해짐으로써 발생하는 이익도 10년간 2조6000억원 정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행은 이 보고서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비용은 모두 2조67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다.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전산 시스템 수정 작업에 가장 많은 1조3500억원이 소요되고 새로운 화폐 제조에만 8200억원, 현금입출금기와 자동판매기 등을 전면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이 4400억원, 그리고 채권과 주식 등 유가증권과 각종 계약서와 관련서류의 액면을 재인쇄하는 데 드는 비용 등을 포함한 기타비용이 600억원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을 모두 합쳐 2조6700억원의 비용이 들더라도 앞으로 10년간 8조6000억원이 절감되는 효과를 감안하면 이는 충분히 수지가 맞는 일이므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또 한국은행은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경우 현금입출금기를 전면 교체하고 전산시스템을 수정하는 과정에 1조원 규모의 경기부양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실시 시기와 관련해서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사회적 비용이 커질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사실상 조기 실시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은은 이 보고서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포함해 고액권 발행, 화폐 품질개선 등 화폐제도 개선을 위한 3대 조치를 참여정부의 주요 과제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은행의 이러한 분석은 박승 총재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리디노미네이션은 정부가 결정할 일이며 한은은 결정에 따를 뿐”이라고 밝힌 것과는 달리 한은의 속내를 비교적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디노미네이션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경우 한국은행이 추정한 비용-효과 분석을 놓고 치열한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도 있다. 당장 리디노미네이션에 반대하는 일부 야당의원들만 해도 시중은행에서 주장하는 수표 관리 비용은 4000억여 원에 불과한데도 한국은행이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표관리 비용을 부풀렸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시중은행들이 한은에 국고수납 수수료를 요구할 때 은행들의 인건비 과다 계상을 비판하던 한은이 이제 와서 수표 관리 비용을 계산하면서 은행들이 주장한 인건비를 그대로 인용해 결과적으로 비용을 부풀렸다는 이야기다.

    한은 비용 분석 놓고 논란 일 듯

    자기앞수표 사용량이 2002년 이후 크게 줄어드는 점도 논란거리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통계를 보더라도 올해 상반기 한은에서 교환된 10만원권 수표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9%, 100만원권 수표는 15.3%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앞 수표 유통물량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화폐단위 변경과 고액권 발행으로 인한 비용 절감효과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한은은 2002년 당시 시중은행에 대한 수표 유통물량 조사 결과만을 바탕으로 수표 발행 유통관리비용이 6000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은이 공식 문서를 통해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03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대한 업무보고에서도 한은은 이 문제를 중요 보고사항의 하나로 언급했는데, 이때 총 18쪽에 이르는 업무보고 내용에서 3쪽을 화폐단위 변경에 할애할 정도였다.

    당시 인수위에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한은은 ‘화폐단위 변경은 선진경제 진입을 앞두고 언젠가는 반드시 추진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못박고 ‘향후 수년간 물가와 국제수지가 안정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화폐단위 변경 추진에 필요한 경제여건을 구비하고 있다’고 밝혀 참여정부 5년 동안 화폐제도 변경 작업을 추진할 뜻임을 분명히 했다.

    결국 관련법 제정 후에도 3~4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한 리디노미네이션 작업을 밀어붙이기에는 참여정부 5년이 ‘적기’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보고서에 대해 인수위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한은의 ‘1차 시도’는 실패한 셈이 됐다.

    결국 공은 다시 한국은행으로 건너왔다. 그때부터 한국은행이 재경부나 국회와 공식적 협의 없이 리디노미네이션 추진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면서 한은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 박승 총재는 올해 초 각종 인터뷰에서 “2002년부터 내부에서 연구해온 새 화폐 발행문제를 총선 후 정부와 협의할 방침”이라며 재경부를 사실상 압박했다. 재경부에서 박승 총재가 ‘오버하고 있다’고 느낀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같다. 당시 김진표 재경부장관이 “서두를 일이 아니다”며 박 총재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고 이헌재 부총리도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것 추진할 만큼 경제상황이 한가하지 않다”며 유보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음모론’의 함정

    재경부의 비협조뿐만 아니라 한은이 맞닥뜨린 또 하나의 함정은 ‘음모론’이었다. 한국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은 “리디노미네이션이 확산된 배후에는 부동산업자와 외국계 프라이빗 뱅킹 직원 일부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들이 시중 부동자금을 부동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설을) 고의로 유포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며 시중의 음모론을 공개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은 식구’라 할 수 있는 일부 금융통화운영위원조차 이러한 음모론에 가담하는 바람에 한은을 곤혹스럽게 했다. 금통위 김태동 위원이 방송 인터뷰에 나와 “리디노미네이션은 차떼기로 돈 나르던 사람에게 상자로 나르게 해주겠다는 것”이라며 화폐 단위 변경 논의에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결국 김태동 위원의 이러한 발언은 한은 중간간부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오면서 발언 당사자가 “일부 정치권을 겨냥한 말”이라고 해명하는 선에서 마무리됐지만 리디노미네이션과 관련한 불신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한은 스스로 보여준 꼴이 됐다.

    1962년 화폐개혁 당시 긴급조치 발동으로 예금을 동결하고 화폐교환을 제한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중장년층에게는 이러한 불안감과 음모론이 아직도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한은 내부에서조차 ‘부자는 부자대로 자기 돈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들대로 부동산 값만 올려놓을 것이라고 불만을 가진다면 결국 리디노미네이션은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결국 이러한 논란 자체가 화폐 단위를 변경하는 작업이 아무리 경제적 행위라고 하더라도 여론의 지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한 것이다. 박승 총재를 포함한 한은 관계자들이 리디노미네이션과 관련해 기회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투명하게’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현실 인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행은 박 총재 취임 직후인 2002년 7월경부터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하기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6개월 동안 해외 현지 조사를 포함해 광범위한 연구작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태스크포스팀은 한은의 발권국 조사국 등 4개 유관부처 관계자로 구성됐다. 한은은 이러한 연구작업을 거쳐 무려 1000여 쪽에 달하는 ‘화폐제도 선진화 개혁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펴낸 바 있다. 이 보고서에는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과 관련 비용, 행동 계획과 추진 절차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은은 현재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한은을 대신해 뒤늦게 총대를 멘 정치권에서 이 문제가 처음 언급된 것은 9월7일이다. 파문의 진원지는 재경위 소속 우제창 의원과 이계안 제3정조위원장. 우 의원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국의 통화정책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시티은행에도 근무한 바 있는 금융전문가 출신이다. 우 의원에 따르면 “이계안 제3정조위원장에게 리디노미네이션 논의의 필요성을 타진해 본 결과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후 공론화 시기를 엿보던 중 마침 고교 후배인 모 언론사 기자와 식사 자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이 계기가 돼 언론에 처음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음날 이계안 위원장도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에 가세했다. 그러나 논란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박영선 공보담당 원내부대표가 황급히 나서서 일부 의원이 제기한 리디노미네이션 발언을 서둘러 진화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게 전부였다. 안 그래도 화폐개혁에 불안해하는 중장년층을 상대로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국민적 동의를 구하기에는 몇몇 초선의원의 아이디어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당 안팎에서는 민감한 사안을 섣불리 건드려놓는 바람에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들에게는 당장 추진전략도, 프로그램도 결여되어 있었고 결국 ‘정치권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문제를 꺼내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는 핀잔만 들은 채 논의는 수그러들었다.

    박승 총재의 발언도 올해 들어 조변석개(朝變夕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총재 취임 직후인 2002년만 해도 박 총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해 한국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박 총재는 “아무 일도 없는데 한국은행이 왜 리디노미네이션을 심도있게 검토하는 팀을 발족시켰겠느냐”며 정부측과 모종의 협의가 진행중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당시 일부 재경위원들이 리디노미네이션과 고액권 발행에 대해 한국은행이 ‘검토중’이라는 틀에 박힌 말만 반복한다며 한은의 무소신을 문제 삼자 박 총재는 “과거의 ‘적극 검토’와는 분명히 다르다”며 자신감을 내보이기도 했다.

    ‘시기 아니다’에서 ‘준비 마쳤다’로

    그러나 올해 들어 박 총재의 말이 갈짓자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한 박 총재의 언급은 “경기가 나빠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5월6일)에서 “연구완료 단계에 있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9월9일)로 급선회했다.

    한은과 재경부 사이에서는 지금도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재경부측은 정치권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지난 9월 초 ‘일반적 제도 연구 차원에서 검토작업을 하고 있을 뿐 어떤 결론도 내린 바 없으며 한국은행으로부터 이와 관련한 공식적인 건의를 받은 적이 없다’며 논의 확산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박승 총재는 10월13일 국감 답변에서 “가볍게 의견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고 밝혀 리디노미네이션과 관련해 모종의 의견 교환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결국 한은은 재경부를 끌고 들어가려고 하지만 재경부는 논의와는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다.

    이 대목에 궁금증이 집중되는 것은 9월16일까지만 해도 “연구검토 단계를 지나 구체적 검토의 초기 단계에 와 있다”며 리디노미네이션을 ‘연구’ 차원에서 ‘실행’ 차원으로 끌어올린 이헌재 부총리의 태도다. 이 발언으로 사실상 화폐단위 변경 논의에 불을 지핀 이 부총리는 불과 8일 만에 “아무런 실행계획이 없다”고 태도를 바꿔버렸다.

    청와대의 경고(?)

    이와 관련해서는 부총리의 ‘구체적 검토’ 발언으로 달러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는 등 시장이 술렁일 기미를 보이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이 부총리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는 소문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이헌재 부총리가 요즘 코너에 몰려 있지 않은가. 노 대통령과 독대하기도 어려운데 경기침체가 길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청와대가 이 부총리를 주저앉혔을 것이다”고 말했다. 청와대나 재경부는 경기 회복에 집중해야 할 시점에 또 하나의 전선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말이다.

    재경위 소속의 한 여당 의원은 “자신의 임기 중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하려는 박승 총재의 공명심 때문에 재경부는 감정이 크게 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재경부가 앞장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사안을 놓고 박 총재의 욕심이 지나쳤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의원 역시 리디노미네이션은 국회나 한은에서 추진할 일이 아니라 정부가 주체가 되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한은측은 이런 시각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박 총재가 공명심을 내세웠더라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일을 처리하면 했지 왜 2년이나 시간을 끌었겠느냐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박 총재 임기가 1년 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 작업을 임기 내에 마칠 수도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회 재경위 소속 의원들도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명의 재경위 소속 의원 중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해야 한다’는 적극 추진파는 6명에 불과하고 6명은 조건부 추진을, 나머지 12명은 반대 의견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적극 추진파건 조건부 추진파건 간에 지금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논의에 불을 붙인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도 구체적인 법안을 발의할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과 관련해 국회에 제출된 유일한 법안은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발의한 한국은행법 개정안뿐이다. 여당에서 논쟁을 붙여놓고 정작 법안 발의는 야당에서 한 셈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당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곤란한 처지”라고 호소했다. 재경위 소속의 한 여당 의원은 “경제적으로 따지면 리디노미네이션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접근 방법이 서툴다 보니 말만 꺼내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은행은 더욱 곤혹스러운 형편이다. 이 문제를 처음 공론화한 한국은행측은 결국 평지풍파만 일으킨 채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이 잦아들자 아예 납작 엎드려버렸다. 국정감사 자료를 제출하라는 여야의원들에게도 리디노미네이션 관련 자료 제출만큼은 거절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한은에서는 자조적인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총대를 메지 않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화폐단위 변경이 개혁과제라도 되면 밀어붙이기라도 하겠지만 표를 얻는 일도 아닌데 ‘선진경제를 위해 필요하다’는 추상적 명분만으로 누가 나서서 국민을 설득하겠느냐”는 목소리도 들린다.

    당초 한국은행이 리디노미네이션을 포함한 화폐제도 선진화를 위해 운영해온 특별대책팀이 내놓은 보고서 명칭은 ‘화폐제도 선진화 개혁에 관한 연구’였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용어가 국민에게 불필요한 불안감을 준다는 지적에 따라 한은은 현재 리디노미네이션과 관련해서는 ‘개혁’의 ‘개’자도 꺼내지 않는 형편이다. 대신 화폐제도 ‘개선’이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이런 것만 봐도 한국은행의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다.

    최근 들어 한은 관계자들은 “리디노미네이션이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개혁적’ 요소가 담긴 것이 아니고 ‘기술적인’ 과정의 하나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국은행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리디노미네이션을 공론화하려다가 파장이 커지는 바람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뒤로 숨어버린 것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한편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에 대해서 소신을 굽히지 않는 박승 총재는 최근 리디노미네이션 문제를 거론한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과 개별 접촉에 나설 움직임이 포착되어 박 총재의 향후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론 지금 리디노미네이션을 다시 추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는 재경부건 한은이건 정치권이건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아예 이헌재 부총리가 교체되어 새로운 부총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불가능하지 않으냐는 사람도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 부총리는 1주일 만에 ‘시행’에서 ‘유보’로 태도를 바꿔 혼란을 가중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국민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화폐단위 변경 논란을 보면서 금융실명제와 같은 긴급명령이나 부동산 보유세 강화와 같은 ‘특단의 조치’를 떠올렸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데는 일부 언론의 선정적인 접근과 정치권의 아마추어리즘이 한몫했다. 게다가 국민의 불안심리를 자극하는 ‘음모론’까지 가세했다. ‘시간이 갈수록 비용은 더 들게 마련’이라는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은 9월 한 달 내내 평지풍파만 일으킨 채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비용’을 예약하고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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