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자본금? 필요 없어! 여기는 배포 하나로 일확천금 하는 데야”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02-07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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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에는 신문을 만들고 낮에는 단기 주식투자에 열중했던 문학평론가 김기진, 주식으로 날린 돈을 채워 넣으려다 인생을 망친 전도유망한 은행원, 배포 큰 투자와 빠른 판단으로 거부(巨富)를 일군 유일한 조선인 조준호. 1930~40년대 경성의 주식시장 ‘조선취인소’에서 벌어진 초기 금융자본주의의 난투극을 들여다보자.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1922년 명치정에 건립된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1932년 인천미두취인소와 합병돼 조선취인소로 이름이 바뀐다. 큰 사진은 조선취인소 주변풍경을 묘사한 ‘삼천리’ 1938년 8월호 ‘황금이 끓는 전시하 명치정 주식가’ 기사.

    1933년, 문학평론가 김기진은 가혹한 한 해를 보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김기진은 그해 1월, 극심한 경영난을 겪던 ‘조선일보’가 금광 재벌 방응모에게 인수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1924년 ‘매일신보’ 기자를 시작으로 ‘시대일보’ 기자,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한 10년 경력의 중견 언론인이었지만, 김기진의 나이 이제 고작 서른하나였다. 젊은 혈기에 사표는 던졌으나 뾰족한 호구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33년 한 해 동안 김기진이 만진 돈이래야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평론을 기고해 받은 원고료 기십원이 전부였다.

    이듬해 1월 ‘ML(마르크스 레닌)당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은 형 김복진이 만기 출소했다. 김기진에게 조각가 김복진은 형이기 이전에 도쿄 유학 시절부터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운동을 함께한 동지였다. 미술계와 문학계에서 막중한 영향력을 가진 형제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초라한 ‘전과자’와 ‘실업자’ 신세일 뿐이었다. 한 달 후, 근 1년간 집에 눌러앉아 빈둥거리던 김기진에게 ‘조선일보’ 서무부장으로 있다가 지난해 그와 함께 퇴사한 김웅권이 찾아왔다.

    “이보게 팔봉(김기진의 아호), 3년 전 우리가 총독부 광산과에 출원한 평남 안주의 금광이 허가되었네. 출자할 친구도 한 사람 구해놓았으니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안주로 내려가서 금광이나 하세. 그깟 신문 같은 것에 미련을 갖고 서울에 있느니보다 산골에 가서 노루 피나 먹는 것이 낫지 않겠나.”

    김웅권의 동업 제의를 받은 김기진은 주저없이 승낙했다. 1934년 4월16일, 김기진과 김웅권 두 사람은 서울을 떠나 평남 안주의 궁벽한 산골로 떠났다. 금광으로 떠나는 찻간에서 김기진은 장차 산에서 큰 재수가 터지면 돈 백만원 움켜쥐고 보란 듯이 신문사를 하나 차리겠다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금광에서 주식시장까지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금광으로 달려간 김기진은 낮이면 광부들과 어울려 금을 찾고 밤이면 소설 ‘청년 김옥균’을 써서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고단한 일과를 보냈다. 조선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소개한 작가가 금광을 하러 떠났다는 소식은 문단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일찍이 김기진씨는 ‘개벽’지에 시대적 고뇌상을 담은 여러 편의 수필을 실어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붉은 쥐’‘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등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은 소설을 발표하고, 날카로운 필봉으로 문예월평을 쓰면서 문단의 중요한 평론가로서 대우받는 동시에 필자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또 문학청년으로서 김기진 씨를 만나고 싶던 차에 김기진 씨를 논하게 되니 외람된 생각도 나거니와, 그때 그와 같은 정열을 가지고 나섰던 선배가 금광으로 일확천금의 이상을 안고 출발하였다니 세사와 인심의변천에 새삼스럽게 무상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민병휘, ‘김기진론’, ‘삼천리’ 1934년 9월호)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프롤레타리아트 예술운동의 선구자였던 김기진은 정어리 공장, 금광, 잡지사, 인쇄소 경영에 차례로 실패하고 명치정 주식시장에서 동신주 투기로 일확천금을 꿈꾼다.

    1년 동안 실업자 신세였다곤 하나 끼니를 거르거나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만큼 궁핍하지는 않았다. 백면서생 김기진이 금광을 하러 나선 이유는 궁핍이 아니라 허무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를 알면 알수록 문단이나 신문사가 주는 얄팍한 권력과 명예가 하찮게 다가왔다. 세치 혀로 아무리 야유하고 비판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 할수록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 혼자 고고한 척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조롱해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욕망을 감추고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세상과 부딪쳐보는 것이 정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보다 강한 게 펜이라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펜보다 황금이 강했다.

    문인으로나 언론인으로서의 명예는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욕망을 좇아 시작한 금광이었건만, 금광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첫 삽을 뜬 지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에서는 노다지는커녕 금싸라기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자금을 대던 투자자는 더 파봐야 손실만 커질 것으로 판단하고 일찌감치 손을 털었다. 투자자를 잃은 김기진과 김웅권은 스스로 운전자금을 융통해야 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로 돌아온 김기진에게 집에서 정양하고 있던 김복진이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금광은 접은 것이냐?”

    “돈 주선하러 왔는데 돈만 마련되면 다시 금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얘 기진아, 네 금광이 어디 있는지 내가 가르쳐주랴? 여기 있다. 이 책상 위에 있다! 여기서 네가 원고지 한 장 쓰면 한 척 두 장 쓰면 두 척 이렇게 너는 네 광맥을 파고들어가는 거야. 이걸 버리고 어디로 가니?”

    (김기진, ‘우리가 걸어온 30년(4)’, ‘사상계’ 1958년 11월호)


    자금을 마련할 길도 막막하고, 형의 고언(苦言)에 깨달은 바도 있어 김기진은 금광사업을 정리했다. 노다지를 캐내 신문사를 차리겠다는 행복한 꿈은 불과 넉 달 만에 뜬구름처럼 사라졌다.

    금광에 실패한 후 김기진은 일확천금의 꿈을 접고 ‘청년조선’이라는 잡지사를 차렸다. 밑천이라곤 살림살이를 저당 잡히고 마련한 약간의 자금과 문인 겸 언론인으로 10여 년 살면서 확보한 인맥이 전부였다. 1934년 10월에 ‘청년조선’ 창간호를 간행하고, 부동산값 폭등으로 돈벼락이 떨어진 나진으로 직접 광고영업을 나가 7000원 상당의 축하광고를 유치했다. 잡지 제작비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인쇄비를 줄이기 위해 광고료를 털어 ‘애지사’라는 인쇄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운(時運)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1934년 12월 ‘청년조선’ 2호 제작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김기진은 ‘전주 사건’이라 알려진 사회주의 문인 검거 사건에 연루돼 구금됐다. 보름 남짓 혹독한 신문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사무실에 나가보니, 동업자가 잡지사와 인쇄소의 자산 일체를 매도하고 도주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청년들에게 사회과학지식을 전파하면서 안정적으로 생활비도 벌겠다는 계획은 반년 만에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1935년 3월, 실직과 연이은 사업 실패로 실의에 젖어 있는 김기진에게 ‘매일신보’ 이상협 부사장이 입사를 제의했다. 김기진은 1924년 ‘매일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에 다니는 것이 꺼림칙해서 몇 달 만에 월급이 반밖에 안 되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긴 바 있었다.

    10여 년 세월이 흘렀어도 ‘매일신보’는 여전히 총독부 기관지였다.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사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가 정상적인 직장을 가질 기회는 흔치 않았다. 내일이라도 출근하라는 이상협 부사장에게 김기진은 한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신문사에서 직위는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오전에는 출근을 하지 않고, 오후 늦게 출근해서 조간신문 편집만 맡을 수 있게 양해해주십시오.”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해야 하는 조간신문 편집은 기자들이 기피하는 보직이었다. 이상협 부사장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기진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지 2년 만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김기진은 생계를 위해 밤에는 어용신문 기자 노릇을 하더라도, 낮 시간만큼은 ‘보람 있게’ 쓰고 싶었다.

    내가 낮에는 출근을 않고 밤에 출근해 조간신문만 만들겠다는 조건을 붙인 까닭은, 낮에는 명치정(명동)에 있는 주식취인소(증권거래소)에 나가 앉아서 투기를 해볼 결심이었던 까닭이다. 정어리 공장도 해보았고 금광도 해보았지만, 이런 것은 막대한 자본과 전문적 기술과 10년 이상의 세월을 요하는 거창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주식 매매만은 큰 자본이 필요치 않고 오직 총명한 판단만으로 짧은 시일 내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기진, ‘나의 회고록(12)’, ‘세대’ 1965년 9월호)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조선취인소의 입회 장면.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한 5년간, 김기진은 매일 오전 9시5분 전 명치정 주식중매점(증권회사)에 나가 시세판을 지켜보다가 오후 3시 후장(後場)이 끝나면 신문사로 출근해 새벽 한두 시까지 조간신문을 편집하는 고단한 일과를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일본인이 저술한 ‘상장학(上場學)’ 서적을 모조리 구해 읽었음은 물론, 주가의 고저등락을 청색과 적색 2가지 색으로 그려놓은 괘선지를 벽에 붙여놓고 추세를 연구했다.

    김기진은 5년 동안 다른 종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동신주(東新株·주식회사 도쿄취인소 신주권)’ 한 종목만 사고 팔았다. ‘동신주’는 명치정 주식시장 최고의 ‘화형주(花形株·블루칩)’로서 조선취인소 전체 거래량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각광받았다. 인기만큼이나 주가 역시 탄력적이어서,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을 때는 174원 하던 주가가 하루아침에 25원 폭등할 만큼 투기성이 강했다.

    1935년 봄부터 1940년 여름 동신주 거래가 일본 전국에서 금지될 때까지 5년 동안 나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취인소 근방에서 살았다. 5년간의 성적으로 원금의 15배까지 만들어본 것이 나의 최고의 성적이었다. 동신주의 주가가 폭등하기 직전에 그 기미를 예감하고서 주식을 사놓은 뒤에 가격이 돌연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놈을 추격하면서 주식 숫자를 두 배씩 늘여가니 불어난 금액이 어느덧 원금의 15배에 달했다. 주가의 움직임은 미묘한 것이어서 연구하면 할수록 흥미진진했다. 동신주만 사고판 이유는 일본 전국에서 수천만명의 대중이 매매하는 주식인 고로 어떤 특정한 개인의 힘으로 그 가격을 올리거나 떨어뜨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동신주 주가는 일본 전국에 산재한 고객의 지혜가 결집된 소산이었다. (김기진, ‘나의 회고록(12)’, ‘세대’ 1965년 9월호)


    김기진이 한번 거래로 15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단기취인’이라는 독특한 거래방식 덕분이었다. 단기취인은 10주 단위로 매매를 체결하고 다음날 대금을 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보(日步) 제도’를 두어 소정의 이자와 수수료만 내면 결제를 무기한 연기할 수 있게 했다. 실물 주식과 현금이 오가는 경우는 드물었고, 주가의 등락만큼 차액을 지급하는 청산거래가 대종을 이루었다. 10%의 증거금으로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진 돈의 10배까지 주식을 사고팔 수 있었다. 주가가 10%만 오르내려도 매매자는 ‘깡통’을 차거나 두 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장기취인, 단기취인, 실물취인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거래제도가 있었지만, 실제 거래의 90% 이상은 단기취인에 집중됐다.

    단기취인에 상장된 종목은 1부 7종목, 2부 20종목, 도합 27종목이었다. 1부에 상장된 종목은 조취(주식회사 조선취인소), 조신(조취 신주), 동신(주식회사 도쿄취인소 신주), 대신(주식회사 오사카취인소 신주), 연취(주식회사 다롄주식상품취인소) 등 일본 각지의 거래소 주식과 일산(일본산업주식회사), 종신(종연방적주식회사 신주) 등 일본 굴지의 거대기업이었다. 2부를 대표하는 종목은 일로(일로어업주식회사), 제인(제국인견주식회사), 조석(조선석유주식회사), 북지(북선제지주식회사), 척신(동양척식주식회사 신주) 등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됐기 때문에 거래소 주식이 거래소에서 매매됐다. 오늘날로 치면 나스닥(NASDAQ) 주식이 나스닥에 상장된 것과 같은 이치다. 조취, 동신 같은 거래소 주식은 일본의 경제상황과 국제정세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해 증시의 바로미터 노릇을 했다.

    조선과 관련 있는 기업은 ‘국내주’로, 관련 없는 기업은 ‘일본주’ ‘만주주’ 등으로 분류됐지만, 국내주라도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 기업이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기업으로 큰 축에 속하는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김연수의 경성방적, 이종만의 대동광업 등도 단기취인 상장회사에 비하자면 자본금 규모가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았다.

    김기진이 동신주 투기에 열을 올리던 1930년대 후반은 부침이 심한 시대였다. 중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파장은 고스란히 주가에 반영됐다. 시시각각으로 타전되는 전황에 따라 주가는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주가는 장제스가 하야한다는 소식에 폭등하고, 국가총동원령이 발동된다는 소식에 폭락했다. 중국군의 반격 소식에 폭락하고, 일본군의 광둥성 점령 소식에 폭등했다. 주가의 폭등과 폭락세가 이어지면서 벼락부자와 알거지가 속출했고, 명치정에는 투기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세계대전의 여파로 사회는 몹시 불안하고 음습했지만, 명치정 날씨만큼은 화창했다.

    구라파의 풍운은 드디어 도처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주식시장은 노한 불길처럼 대전경기(大戰景氣)를 구가하고 있다. 동신주는 독일과 폴란드가 충돌하면서 오늘까지 35원이나 오른 셈이고 영국의 선전포고로 오늘 아침 단번에 25원이나 폭등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500원까지 올랐던 주식이니 지금의 170원쯤은 문제가 안 되는 판이다. 구라파의 전쟁 덕분에 졸부가 된 이는 한두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속출할 듯하다. 중매점도 대만원이고 주식시장도 대활황이다.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주식판은 뜻하지 않은 기쁨에 잠겼다. (‘명치정 주식가에 인산인해’, ‘동아일보’ 1939년 9월5일자)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유망한 은행원이 은행돈을 빼돌려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절도범으로 전락한 사연을 소개한 ‘조선일보’ 1937년 4월18일자.

    김기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명치정 주식중매점에 출근한 5년간은 1920년 8월14일 명치정에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1932년 ‘조선취인소령’ 제정 이후 ‘인천미두취인소’와 합병되어 ‘조선취인소’로 개편)이 개장한 이래 가장 큰 시세를 분출하던 시기였다. 비록 한때 한번 거래로 15배의 수익을 올린 적도 있는 ‘슈퍼개미’였지만, 1940년 주식에서 손을 떼면서 결산했을 때 주식 투기로 벌어들인 소득은 전무했다. 김기진은 동신주 투기를 끝냄과 동시에 ‘매일신보’에 사표를 냈다. 명치정 주식시장의 주식거래는 1945년 8월13일까지 이어졌고, 이틀 후 김기진은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직함을 지닌 채 광복을 맞았다.

    동일은행 2만원 도난 사건

    1937년 4월14일, 오전 업무가 시작되자 동일은행 본점 출납계 직원 유신재는 당일 은행에서 사용할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두 블록 떨어진 조선은행 본점으로 향했다. 거금을 운반하는 일이었지만 매일 하는 일이다보니 별다른 긴장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걸어서도 5분이면 닿을 거리를 보안을 위해 경호원 두 명을 대동하고 업무용 차량을 타고 다녔다. 조선은행 출납창구에 전표를 내미니 직원은 100원권 지폐를 100장씩 묶은 돈다발 아홉 뭉치를 내주었다. 여러 번 헤아려 금액을 확인한 후 붉은색 현금수송 트렁크에 넣었다. 서울시내 고급주택 아홉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지만 트렁크에는 절반도 차지 않았다.

    동일은행으로 돌아온 유신재는 빳빳한 신권 9만원이 든 트렁크를 출납계 주임 류인명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은행금고에서 조선은행으로 보낼 동전을 정리하고 있던 류인명은 유신재가 돌아온 것을 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유군, 금고 쪽에 일손이 부족하네. 얼른 가서 도와주게.”

    유신재를 금고로 보낸 후 류인명은 트렁크를 열어 현찰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눈대중으로 확인하고 곧 금고로 돌아갔다. 동전 정리를 끝낸 후 유신재는 묵직한 동전 꾸러미를 들고 조선은행으로 떠났고, 류인명은 다른 직원과 함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한참 자리를 비웠던 류인명이 나타나자 창구 직원 남궁호가 트렁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창구에 현찰이 부족합니다. 이 돈을 가져다 써도 될까요?”

    “잠깐만. 내가 경황이 없어서 아직 세 보지를 않았어.”

    류인명은 그때서야 유신재가 가져온 현찰을 트렁크에서 꺼내 헤아려보았다. “하나, 둘, 셋…일곱.” 돈다발을 한 뭉치씩 꺼내니 일곱 뭉치가 나왔다. 돈다발을 헤아리던 류인명도, 지켜보던 남궁호도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두 뭉치가 모자랐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한 장씩 헤아려보았지만, 역시 7만원뿐이었다. 은행 안에서 현찰 2만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금융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주식시장의 조선인 미다스 조준호의 활약상을 소개한 ‘동아일보’ 1938년 9월27일자 기사(왼쪽)와 그가 설립한 동아증권주식회사 본사.

    10시30분부로 동일은행 본점은 업무를 중지하고 사라진 현금을 찾아 나섰다. 금고를 열어 잔고를 확인하고, 서랍을 뒤지고, 몸수색을 하는 등 조용했던 은행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남대문경찰서에서 출동한 수사대는 조선은행에 동전을 입금하고 돌아온 유신재와 운전수, 경호원 등 현금수송 관계자 전원을 체포했다. 경찰이 직접 나서 수색해도 사라진 2만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었다. 애초부터 트렁크 안에는 7만원밖에 없었거나 범인이 출납계 주임 책상 위에 놓인 트렁크에서 2만원을 훔친 후 잽싸게 은행 밖으로 빼돌렸거나. 수십 명의 행원과 고객으로 북적이는 은행 안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트렁크에서 돈을 꺼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동일은행 업무는 점심시간 이후에야 재개됐다. 은행 업무는 정상화됐지만, 2만원의 행방과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유신재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고 범행을 입증할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9만원을 인출한 직원이 2만원을 빼돌리고 7만원이 든 돈가방을 출납계 주임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긴 했다. 유신재가 그처럼 어수룩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후 업무가 종료된 이후 동일은행은 조선은행에 현금 10만원을 입금했다. 조선은행 출납 담당자는 동일은행이 입금한 10만원 돈다발에서 사건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 당일 오전 조선은행에서 인출한 현금 2만원이 봉인도 뜯지 않은 채 되돌아온 것이었다. 사라진 2만원은 은행 밖으로 빼돌려진 것이 아니라 은행 금고로 들어간 셈이었다. 사건 직후 동일은행 금고 속의 현금은 장부와 일치했으므로 사건 발생 이전 동일은행 금고에는 2만원이 비어 있었을 것이었다. 범인은 횡령한 돈을 메우기 위해 트렁크에 든 돈을 훔쳤을 개연성이 컸다.

    사건 발생 나흘 후, 범인이 밝혀졌다. 범인은 현금수송 직원 유신재가 아니라 출납계 주임 류인명이었다.

    류인명은 은행 돈 2만원을 횡령하고 호시탐탐 자신이 축낸 돈을 보충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건 당일 유신재가 9만원이 들어 있는 트렁크를 출납계 주임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때, 류인명은 마침 동전 이만일천원 가량을 조선은행으로 보내려고 금고 곁에서 있었다. 류인명은 유신재에게 금고로 가 동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라고 말하곤, 유신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돈을 세는 척하며 트렁크 문을 열었다. 트렁크 속에서 만원짜리 돈다발 두 뭉치를 슬그머니 꺼내 가지고 자기 책상 위에 있는 손금고 속에 넣어두었다가 은행 금고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 동안 자기가 축낸 은행 돈 2만원을 보충했다. (‘동일은행 2만원 사건 해결’, ‘조선일보’ 1937년 4월18일자)


    류인명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일은행 사환으로 들어가서 12년 만에 본점 출납계 주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세 아들의 아버지이자 촉망받는 은행원이던 그가 한낱 절도범으로 전락한 것은 명치정 주식시장에 발을 잘못 담근 탓이었다. 류인명은 분에 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요리점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월급쟁이 생활로는 미래가 없음을 깨닫고 주식으로 일확천금을 할 허튼 꿈을 꾸었다. 수년 동안 은행 돈을 돌려 주식에 투자했으나 번번이 낭패를 보았다. 실패를 거듭하자 돌려쓴 은행 돈이 2만원에 달했다. 메워넣을 방법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다가 자기 책상 위에 놓인 돈 가방을 보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주식왕’ 조준호

    명치정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사람이 류인명처럼 모두 신세를 망친 것은 아니었다. 일본 회사 주식이 상장되고, 일본인이 설립하고 운영한 명치정 주식시장이었지만, 그곳에서 가장 큰 부를 이룩한 인물은 조선인이었다.

    1934년 조선취인소 증권거래원 허가를 받은 조선인 조준호는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주식계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동아증권은 일본인 중매점보다 한발 늦게 영업을 시작했지만, 각지에 통신망과 연락망을 완비하고 오사카에 직통전화를 가설해 도쿄와 오사카 주식시장 시세를 어느 중매점보다 신속히 전달함으로써 설립 첫해부터 명치정 제일의 중매점으로 맹위를 떨쳤다. 설립 이후 광복 직전까지 매매고 수위를 놓치지 않았다. 조선취인소 전체 매매고의 10% 이상이 동아증권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장 수완가로 또한 실업가로 장안에 명성이 자자한 동아증권주식회 사장 조준호씨는 투기계에 발을 디딘 지 불과 3년 만에 치밀한 두뇌와 민첩한 이지의 날카로운 소산으로 수십년 동안 주식계에서 활약하던 백전노장 취인원을 발아래 꿇리고 동충서돌 종횡무진의 활약을 거듭하여 이제 주식계에서나 미두계에서나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200만 원에 달하는 회사 자본도 잘 운용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저 유명한 2·26사건(1936년 2월 일본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이래로 금일까지 조준호씨가 명민한 두뇌로써 주식과 미두로 불과 6~7개월 만에 20만원이라는 거대한 금액의 이득을 보았다고 한다. 20만원! 20만원의 거액을 벌어들일 때 그 속에 묻힌 조준호 씨의 고심은 누구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자중하고 건재하여 금융가에서 조선인을 대표하여 이름을 떨치기바란다. (‘조준호 씨 20만원 이득설’, ‘삼천리’ 1936년 12월호)


    조준호는 1903년 대한제국 고위관료를 지낸 조중정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강제합방 후 자작 작위를 받은 세도가 조중웅이 조중정의 육촌형이었다. 명문거족의 후예로 태어난 조준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으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롭게 자랐다.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1924년 도쿄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25년 재정난에 빠진 ‘시대일보’에 1만원을 출자해 홍명희 사장과 함께 전무이사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대일보’는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문을 닫았다.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경한 조준호는 웅대한 포부와 이상을 품고 문화사업에 투신하여 동양문화 건설의 주역이 되고자 ‘시대일보’에 사재를 투자하고 제일선에 서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언론계는 조준호가 몸담기에는 너무나 좁은 무대였다. 조준호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언론계를 떠나 실망을 부둥켜안고 미주(美洲)로 건너갔다. (‘실업계 투사 조준호씨 면모’, ‘동아일보’ 1938년 9월27일자)


    ‘시대일보’ 폐간 후 집안의 사업체를 돌보던 조준호는 1927년 미주 시찰을 떠났다. 1905년 이후 중지된 중남미 이민사업을 재개할 뜻을 품고 떠나는 현지 답사였다.

    시내 숭삼동 회사원 조준호씨와 제약회사 취체역(이사) 남주희씨, 전 중앙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 김춘기씨 세 명은 미국을 거쳐 브라질을 시찰하기 위해 지난 10일 오전 10시 부산행 급행열차를 타고 장도에 올랐다. 일행의 시찰목적은 브라질 이민상황을 자세히 보는 데 있다고 한다. 브라질에서 2개월 동안 체류한 후 구라파를 시찰하고 1년 후에 귀국할 것이라 한다. 일행을 대표하여 조준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으로 이민이라 하면 남북 만주밖에 모르는 실정이라 해외의 발전을 볼 수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저와 두 사람이 의논하고 먼저 가서 일체 상황을 보고 온 후에 다소간 구체적 계획을 세워볼까 합니다.” (‘조준호씨 남미 시찰’, ‘동아일보’ 1927년 2월12일자)


    1929년 남미 시찰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준호는 의욕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30년 미국 윌사 석유회사의 국내 독점 판매권을 얻어 ‘조선윌사석유회사’를 설립했고, 1931년 이발기구를 제조 판매하는 ‘동아이발기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34년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에는 명치정 주식시장의 ‘주식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1935년에는 주식시장에서 성공한 여세를 몰아 인천에 미두취인점까지 차렸다. 조준호는 주식과 미두를 중개만 한 것이 아니라 200만원 상당의 자금을 직접 운용했다.

    증권취인점을 경영하는 수단과 조직이 그와 같이 호대하면서 주밀한 것은 증권계에서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동아증권의 사장인 조준호 자신이 시장에 뛰어들어 엄청난 자금을 움직여 매매를 조종하고 있는 광경은 참으로 호방하면서 기민하다. 최근의 실례를 볼지라도 지난 7월 중순경 주요 주식이 참락에 참락을 거듭하여 ‘종신’이 200원대가 무너지고 ‘동신’도 120원대가 무너지려 할 때 조준호는 모두가 투매하는 와중에 초연히 뛰어들어 종신을 200원 내외에서, 동신을 120원 내외에서 쏟아지는 매물을 전부 소화했다. 주식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도 그러한 용기는 없었으나 조준호만은 대담하게 매집하여 종신과 동신이 급등했을 때 엄청난 차익을 얻었다. 행운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조준호가 그만치 시세의 흐름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실업계 투사 조준호씨면모’, ‘동아일보’ 1938년 9월27일자)


    조준호는 조선 굴지의 수재를 처남으로 두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무국장과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을 지낸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 사회주의자 이강국이었다. 고정간첩 김수임의 연인으로 알려진 이강국의 본부인은 조준호의 여동생이었다. 조준호는 이강국의 독일 유학비용을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귀국한 이강국을 동아증권 이사로 임명했다.

    명치정 주식시장 사람들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황금이 들끓는 명치정 주식시장이었지만, 주식으로 300만원 이상의 부를 축적한 인물은 조준호 단 한 사람뿐이었다. 조준호는 광복 직후 주단포목을 매점해 수백만원의 폭리를 취한 사실이 발각되어 구속되는 비운을 맛보지만, 한 달 만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효시가 되었다. 조준호의 재산은 서울 명동의 사보이호텔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확천금의 비책

    일확천금의 꿈은 유구한 연원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투기의 위험성을 알지만, 또 누구나 한번쯤 일확천금을 꿈꾼다. 일확천금은 과연 가능할까.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이 지천에 있는데 비결이 없을 리 없다. 70년 전 잡지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일확천금의 비책이 기록돼 있다.

    투기시장에서 기십만 원 기백만 원의 자금이 없이 큰 성공을 거두려거든 사람노릇 해가면서 꿈꾸어서는 안 된다. 부모처자를 생이별하고 알몸으로 제 한 몸이 되어 아무 거리낌 없이 홀가분하게 한 후에 기십원이든지 기백원을 만들어가지고 발을 들여놓는데 그날부터는 아주 마음을 지독하게 먹어야 한다.

    부모처자까지 떼놓은 터라 취인소 문전을 돌베개로 삼고 세상을 떠날 최후의 비통한 장면까지 생각한 사람이라야 한다. 투기에는 끈기가 날실이 되고 배포 큰 것이 씨실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지독한 결심을 한 터라 기십원 기백원이 없어진대야 겁날 것이 없으니까 대담해지고, 30원 폭으로 오를 때도 적은 이익을 탐하지 않고 버텨 큰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까닭이다. 이 말이 점잖지 않은 말 같지만 그만한 지독한 마음이 있어야만 성공하는 확률이 높아진다.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은 행여 투기시장에 발을 놓지 말라! 조선취인소 금기 배당이 1할 하고도 3분이란다. 취인소가 고율 배당하고 30여 취인원이 영업해가지고 취인소 사원, 각 취인원 점원, 외교원 등이 무슨 돈으로 먹고사는 줄 아는가? 그나 그뿐이냐. 조취 증권시장을 통해 매년 적어도 수백만원이 도쿄 오사카로 유출한다. 도대체 어디서 이 돈이 나느냐 하면 일확천금 하러 명치정 주식판으로 인천 미두판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바치는 돈인 것을 짐작하면 일확천금의 꿈도 깨어질 것이 아니냐? (‘일확천금은 가능하냐?’, ‘조광’ 1936년 1월호)


    ‘적은 밑천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꾸려거든, 사람 노릇을 포기하고 죽을 각오를 하라.’ 편안한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며 돈벼락이 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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