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신임 지도부 및 민주진보통합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왼쪽)과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11인으로 구성된 민주통합당 임시지도부에는 정광호 한국노총 전략기획처장과 김문호 금융노조 위원장 등 2명의 노동계 인사가 최고위원으로 참여했다. 원혜영(민주당), 이용선(시민통합당) 공동대표 외에 민주당 4명, 시민통합당 3명이 최고위원직을 맡았다.
‘5대 4대 2’라는 비율로만 보자면 한국노총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지만, 한국노총 조합원 87만 명은 새로 출범하는 민주통합당에 보물 같은 존재다. 실제 민주통합당 지도부 경선에 출마한 9명 후보 중 한명숙, 박영선, 이강래 등 후보 다수가 “노조법 전면개정과 비정규직 감축·차별철폐를 골자로 하는 한국노총의 7대 노동계 현안 진단 및 과제에 대해 전면 찬성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노총은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노조법 개정과 론스타 문제에 적극적으로 답변한 박영선, 김부겸 등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통합당 당론에도 한국노총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 민주통합당은 1월 13일 금융당국에 “하나은행의 외환은행 인수 승인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노총 관계자에 따르면 민주통합당 총선 예비후보들이 한국노총 조직 사무실을 방문해 “민주통합당과 한국노총은 한가족이니 저를 밀어달라”며 인사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한국노총이 민주당과 손을 잡게 된 데에는 민주당 손학규 상임고문의 역할이 컸다. 유력한 야권 대선주자지만 확실한 배후 조직이 없는 손 고문에게 조합원 87만 명이 버티고 있는 한국노총이 매력적인 존재임은 틀림없다. 손 고문은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한국노총 경기지역본부 간부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한 손 고문의 분당 보궐선거 승리 역시 한국노총, 특히 금융노조 조합원의 지지가 주효했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실제 손 고문은 2010년 10월 전당대회에서 대표가 된 이후 한국노총 간부들을 여러차례 만나며 한국노총 영입을 위해 공을 들여왔다.
한국노총 역시 민주당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지난해 1월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파기했지만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정치 세력화 필요성이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었다. 한나라당과 정책연대 파기로 내외부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한국노총으로서는, 최고위원직을 보장하고 지도부 선출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하며 통합당 당헌과 강령에 노동계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기로 한 민주당의 제안이 솔깃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노총 잡아야 선거 이긴다”
그러나 민주당과 한국노총의 ‘신혼 한 달’이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첫 충돌은 ‘론스타 국정감사’ 때문에 일어났다. 지난해 12월 31일, 2012년 예산안이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되면서 18대 국회 처음으로 예산안이 여야 합의에 의해 처리될 거라는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결국 민주통합당이 본회의에 불참함으로써 합의 처리는 무산됐다.
민주통합당이 여야 예산안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표결에 불참한 것은 론스타 국정조사 문제 때문이었다. 민주통합당은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매각하는 과정에 금융감독 당국의 부실, 불법 행위가 있었는지 규명하기 위해 국정조사나 감사원 감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론스타 청문회를 먼저 실시한 뒤 필요할 경우 국정조사 도입을 논의하자는 한나라당의 절충안도 거부했다.
론스타 문제를 민주통합당이 들고 나온 이유는 한국노총 측이 론스타 국정조사 도입을 강하게 요구한 데 있다. 예산안 통과 하루 전인 12월 30일 금융노조 위원장이기도 한 김문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우리 당 원내교섭단이 이 부분에 대해 의지가 약하다”고 비판하며 “우리 당이 이를 관철하지 못한다면 노동계 최고위원들은 최고위원직을 사퇴할 것이며 한국노총과 민주통합당의 관계 설정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금융노조와 외환은행 노조 조합원 30여 명은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탈퇴를 요구하며, 한국노총 본관에서 점거 농성을 벌였다. 특히 금융노조의 ‘넥타이·힐 부대’는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합세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민주통합당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당혹스러움을 나타냈다. 황우여 원내대표는 1월 3일 열린 원내 대책회의에서 “민주통합당이 마지막 본회의 때 예산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론스타 감사를 조건으로 요구했다. 감사원 감사를 할 때에는 구체적인 혐의가 있어야 하는데 혐의를 찾아내기 어려운 현 상태에서 어떻게 감사를 하느냐”고 반문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예산은 예산대로, 국정은 국정대로 논하는 전통을 세워야 하는데 민주통합당이 노조 식의 투쟁 자세로 국정에 임하는 것 같아 당혹스럽다”고 덧붙였다.
‘한나라 vs 반 한나라’ 지역갈등까지 확대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23일 한국노총 산하 27개 연맹 중 전국항운노조연맹(항운노련), 자동차노련 등 10여 개 노조연맹 위원장과 일부 지역본부의장은 한국노총의 정치참여를 결정한 임시대의원대회가 무효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1월 중순 현재 양쪽 신문은 종결한 상황으로 1월 말 판결이날 예정이다.
최봉홍 항운노련 위원장은 “민주통합당 입당 여부를 결정하는 대의원회의에, 무자격자들이 참석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의결 정족수에 미달됐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을 통한 정치참여 여부를 다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법원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참여는 법적 당위성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참여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노총의 정치 세력화는 오래된, 하지만 멀기만한 꿈이었다. 한국노총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와 정책연합을 맺었고 2004년 총선에는 직접 녹색사회민주당(녹색사민당)을 창당해 후보를 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며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맺었다.
하지만 한국노총의 정치세력화 시도는 매번 실패했다. 한국노총이 창당한 녹색사민당 역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정당 지지율이 0.5%에 그쳤다. 총선 직후 당시 지도부는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특히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는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결국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지만 이후 정부는 타임오프제, 복수노조제 등을 시행하자는 노동조합법, 비정규직법 등 한국노총이 이른바 ‘노동 악법’으로 명명한 법들을 통과시켰다. 한국노총도 “한나라당과 정책연대 파기”를 주장하며 반발했지만 매번 정부안대로 끌려갔다.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소속으로 금배지를 얻은 한국노총 출신은 단 4명. 이들마저 노동조합법 개정 당시에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특히 한나라당과 정책연대 체결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이용득 당시 위원장(현 위원장)은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로 뽑히지 못했는데, 당시 이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다 ‘팽(烹)’당했다. 나도 속고 한국노총도 속았다”며 한나라당에 직접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2011년 1월 치러진 제23대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에 나선 세 후보는 모두 “당선 즉시 한나라당과 정책연대를 파기하겠다”고 공약했다. 실제 당선된 이용득 후보는 “한나라당과 정책연대가 부끄럽다”며 정책연대를 즉각 파기했다.
한국노총 “이번은 다르다”
한국노총은 “이번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국노총이 단순히 민주통합당의 영입대상이 아니라, 창당 과정부터 참여했고 최고위원회에 들어가 뜻을 반영시킬 수 있다는 것. 한국노총은 4월 전까지 최소 2만 명의 조합원을 진성당원으로 참여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갖고 있다.
하지만 한국노총 내부에서는 회의론이 자자하다. 한 산별노조 관계자는 “한국노총이 지금까지 정치 개입을 해서 덕 본 게 뭐가 있느냐”며 답답해했다. 그는 “한국노총 창립 이후 단 한 번도 ‘노동 악법’을 만들지 않은 정권이 없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모두 마찬가지”라며 “다음 정권을 잡는 정당은 여야를 막론하고 또다시 한국노총의 노선에 반하는 ‘노동 악법’을 제정할 게 뻔하다. 결국 민주통합당도 선거 때 이용만 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겠느냐”고 비관했다. 다른 한국노총 소속 노조 사무국장은 “지도부가 감투 욕심 때문에 한국노총 조합원 87만 명을 이용하고 있다. 한국노총 출신 1, 2명이 최고위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노총은 노총 본연의 입장에서 노사 간 균형을 맞추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2년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국노총이 민주통합당 지지를 밝힌 것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판단이라는 비판도 있다. 한국노총 전 지도부 인사는 “아직 여당 쪽에서 향후 노동정책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벌써 민주통합당에 줄을 서는 것은, 상대가 무슨 패를 가졌는지도 모른 채 무모하게 올인하는 격”이라며 “민주통합당이 다음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야당이 된 한나라당이 민주통합당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거고, 결국 노동문제가 정치화돼 본질이 왜곡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합세 이후 정부, 한국경영자총연맹(이하 경총), 한국노총이 함께하는 노사정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될 것이란 우려도 많다. 실제 이용득 위원장은 12월 28일 열린 회의에서 이희범 경총 회장의 퇴임을 요구했고 1주일 후에 열린 노사정위원회 시무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본래 병환으로 입원한 이 위원장 대신 부위원장급이 참석하기로 했으나 이 역시 마지막에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경총 관계자는 “한국노총 측에서 민주통합당과 합세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으니 더는 경총, 정부와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 택시노조 측 관계자는 “한국노총의 상대는 한나라당이 아니라 경총으로, 노사 간 합의를 통해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본이다. 노사정위원회를 무시한다면 한국노총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한국노총 조합원 87만 명이 한국노총 지도부의 결정에 따를지는 미지수다. 상당수 한국노총 관계자는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합세가 노조원 개개인의 정치적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란 전망을 내놓았다. 이들은 녹색사민당이 17대 총선에서 정당 지지 0.5%를 받은 것을 주요 근거로 내세웠다. 한 한국노총 전 지도부 인사는 “우리나라 선거에는 조직 정서보다 지역 정서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노조, 개인별로 후보를 검증해 자신의 노조나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적합한 인물을 판단해 뽑을 것이다. 그 후보가 늘 민주통합당 후보는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원동원력에 대해서는 한국노총도 걱정하는 부분이다. 한국노총은 4월까지 진성당원 2만 명을 확보하겠다고 했지만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한국노총 안에서도 “이번 총선은 판세가 혼란하니 개인에게 맡기자”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한편 한국노총의 민주통합당 참여 찬반 여부가 한국노총 내 ‘친 한나라당’ 대 ‘반 한나라당’, 나아가 지역 싸움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실제 한국노총 게시판에는 “민주통합당 참여를 거부하는 노조원들은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공공연히 게재돼 있다. 최 항운노련 위원장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을 두고도 ‘한나라당과 합세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라고 보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현재의 상황을 두고 한국노총 내부에서는 ‘조직 붕괴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다. 개정된 노동조합법이 시행되면서 현장의 불만은 날로 커지고 있고, 지도부와 현장의 온도차도 상당하다는 것.
당장은 이익이지만 장기적 공존은 무리?
한편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 역시 오랜 정치 파트너인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선거 때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왔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만들면서 혼선이 빚어졌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당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끄는 정당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 비정규직법,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추진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해 당시 민주노총의 ‘적’이었다.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노조 이상무 위원장 등 일부 산별연맹과 지역본부 전·현직 간부들은 1월 5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진정한 진보정당이 아닌 만큼 지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 비정규직법이 개악되고 한미 FTA가 체결돼 노동자 민중이 고통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전 금속노조 집행부 관계자는 “소위 통합진보당은 민주노총을 철저히 배제한 가운데 상층 단위의 주도로 만들어진 정당이고, 선거를 위한 정파연합정당에 불과하다”며 “민주노동당이 없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히 배타적 지지 방침도 소멸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1월 31일 대의원회의를 열고 올해 총선과 대선에 대한 정치방침을 결정할 예정이다.
양대 노총이 정치 세력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노총이 민주통합당에 들어가 비정규직, 노조전임자 임금 문제, 론스타 국정감사 등 당장 현안에 대해서는 이익을 얻을 수 있으나 민주통합당과 기본적인 목표의식을 공유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께 선거에 임하면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과 맺었던 ‘선거 연대’ ‘정치 연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국가적인 노동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한국노총 내부에서부터 큰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