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는 1969년 3·1운동 50주년을 맞아 10개월간 ‘광복의 증언’ 특집을 연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벌인 항일투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선별하고,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소개한 역작이다. ‘3·1운동’을 비롯해 ‘임시정부 수립’ ‘사이토 총독 저격’ ‘김상옥 의사의 효제동 의거’ 등 ‘신동아’가 보도한 항일 투쟁 기록은 우리 선조의 기개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이를 발췌, 소개한다.
3·1운동 50주년을 맞아 ‘광복의 증언’ 특집을 게재하기 시작한 ‘신동아’ 1969년 3월호 표지와 목차. 신동아는 1969년 한 해 동안 10개월에 걸쳐 항일운동 10대 사건을 정리하는 기사를 실었다.
정석해(1899~1996) 전 연세대 교수가 1969년 3월 ‘신동아’에 기고한 3·1운동 참가기 중 일부다. 정 교수는 3·1운동 당시 ‘연희전문 문과 2년생’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거리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풍경을 ‘남대문역두(南大門驛頭)의 독립만세’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생생히 전했다.
“2월 28일 오후였다. 모든 학생은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급작스런 통문이 있었다. 김원벽 군이 등단(登壇)하여 ‘내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모두 내일 오후 두시에 그곳에 집합하시오’ 하는 학생대표단의 결정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김원벽(1894~1928)은 당시 연희전문 학생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 투옥된 독립유공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날 김원벽의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비로소 때가 왔음을 알았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 ‘민족자결’을 강조한 것,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선독립을 선언한 것 등이 알려진 상태였다. 학생들은 두려움 없이 거리에 나서기로 했다. 이튿날 정오쯤, 정 교수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거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의 기록이다.
“어느새 공원 안은 입추의 여지없이 학생으로 꽉 차 있었다. 일은 일어나는구나 생각하니 나는 소름이 온몸에 끼치며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무자비한 칼부림
3·1운동 당시 연희전문 학생이던 정석해 전 연세대 교수가 신동아에 기고한 ‘남대문역두(南大門驛頭)의 독립만세’ 지면.
“누구의 신호도, 지도도 없이 노한 파도와 같이 종로거리로 쏟아져나갔다. (중략) 거리 거리를 달려 나갈수록 수가 늘어났다. 백의(白衣)의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대열에 가담했다. 인파는 광화문 네거리까지 꽉 메웠다. 우리 눈에는 왜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만세꾼들뿐이다. (중략) 그 후에 들은 말이지마는 광화문 앞에서 만세를 부를 때 순사 한 사람이 순사 모자와 제복을 찢어 던지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가담하여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3·1운동의 면면을 마치 어제 일인 양 선명하게 기록했다. 시위대는 광화문에서 정동 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 미국영사관, 프랑스영사관을 지나쳐 서대문, 소공동,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이르기까지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합류해 진고개에는 ‘수만의 군중’이 운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모 대열이 지금 세종호텔 근처에 도달하였을 때 갑자기 두 명의 기병이 마상(馬上)에서 검을 휘두르면서 데모대를 향하여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칼부림 바람에 대열은 골목으로’ 흩어졌고, 정 교수도 오후 다섯 시쯤 퇴계로 쪽으로 빠져나왔다.
이튿날 학교에 가보니 ‘밤부터 일경과 일헌병들이 총에 날창을 꽂아들고 시내 요소요소를 경계하며 시위용의자들을 마구 잡아’들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학생들은 앞으로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논의했고, 3월 5일 다시 한 번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그날 아침, 남대문에서 김원벽 등이 태극기를 높이 치켜드는 것을 시작으로 ‘학생들이 벌떼같이 차도로 밀려들어서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즉시 진압이 시작됐다. “왜순사들이 칼로 학생들을 마구 내리쳐서 길 복판에는 유혈이 낭자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사 무리와 격투를 벌이던 김원벽이 칼에 맞아 거꾸러진 채로 체포됐다. 그 틈을 타 몸을 피하며 정 교수는 참혹한 진압 장면을 잇달아 목격했다.
“조선은행을 돌아서니 면부(面部)에 칼 맞은 학생 하나가 피를 흘리며 왜경한테 붙잡혀 가는 것이 보였다. 대한문 모퉁이에 이르니 또 흰 옷을 입은 여학생 4, 5명이 마구 얻어맞으며 일경에게 붙잡혀가고 있었다. (중략) 남녀학생을 칼로 찌르고 총개머리로 때리며 마구 잡아가는 것은 인간의 정(情)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극악했다.”
이날 이후 연희전문을 포함한 학교가 폐쇄됐다. 학생들은 어디에서도 모일 수 없었다. 정 교수가 연희전문 친구들과 함께 살던 하숙집에는 무시로 순사가 들이닥쳤다. 조선인 형사가 나타나 ‘나도 조선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식으로 회유하며 수사 단서를 잡으려 하기도 했다. 결국 정 교수는 3월 13일 서울을 떠나 평안북도 고향집에 몸을 숨겼고, 닷새 뒤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정 교수의 기록은 학생·시민의 자율적 참여로 시작된 3·1운동이 일제의 폭력 진압 아래 막을 내린 과정을 잘 보여준다. 들불처럼 번져가던 만세 시위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피로 물들인 일제의 폭력 앞에 결국 멈췄다. 그러나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정 교수도 만주에서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내용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에 기록돼 있다.
망명지에서의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끝내 식민통치에 맞서 싸웠음을 보여주는 글은 ‘신동아’ 1969년 4월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규갑(1888~1970) 전 국회의원이 쓴 ‘한성임시정부수립의 전말’이다.이 전 의원은 3·1운동 직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1919년 4월 동지들과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고 평정관(評政官)을 맡았다.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신동아’에 보낸 글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다.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라는 제 영토를 영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동지들을 내손으로 무고하게 희생시켰으니 그런 불충이 없다. 나는 나라에 죄인이다. 둘째 나는 문중의 죄인이다. 나로 인하여 내 처가 죽고 자식이 죽고 친족 7명이 죽었다. 나 때문에 문중에서 왜적에게 죽은 사람만도 9명이나 되니 선영에 그런 작죄(作罪)가 있겠는가. 셋째 나는 내 신체에 대한 죄인이다. 부모에게 받은 소중한 내 몸을 나는 무수히 학대했다. 왜적에게 잡혀 감옥행을 한 것만도 33회나 된다. 끔찍한 고문도 많이 당하고 매도 많이 맞아서 지금의 내 노구는 성한 데라고는 없다. 이 또한 불효요 불경이니 나는 내 몸에 죄인이다.”
한성임시정부는 정부령 1호로 ‘납세를 거절하라’, 2호로 ‘적의 재판과 행정상 모든 명령을 거절하라’를 발표했다. 일제가 관련자들을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이 전 의원이 몸을 피한 뒤 일제는 가족들을 참혹하게 괴롭혔다.
“내 아내가 (중략) 지금 애오개에서 왜놈 헌병에게 붙잡혔다. 헌병은 아내가 업고 있던 생후 백일이 미처 못된 갓난 딸아이를 빼앗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죽게 하고 아내를 잡아갔다. (중략) 애비는 숨어 있고 에미는 잡혀간 뒤 그 아이는 전도부인의 손으로 아현고개에 묻혔다.”
고국을 떠나 중국 망명길에 오른 이 전 의원은 이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이때 영화 ‘밀정’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황옥(1887~?)을 만나 도움을 받은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 일본 경부(현 경정)를 지낸 황옥은 무장독립단체 의열단에도 가입했다. 친일파인지 독립운동가인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이 전 의원은 그를 동지로 여겼다. 처음엔 황옥과 교유한다는 이유로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일경의 정탐놈을 데리고 왔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황옥이 우리 동지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그러한 오해가 풀렸다’고 한다.
“상해에서 주요한 주요섭 형제가 ‘우리소식’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 잡지가 나오기가 무섭게 일본총영사관경찰부로 흘러들어갔다. (중략) 우리 동지들 간에 일경의 밀정이 있어 이것을 전해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중략) 잡지를 배부할 때 책에다 비밀히 번호를 적어놨다가 일경에 넘어간 책이 누구에게 갔던 책인가를 확인해 범인을 찾아내기로 했다. 황옥이 일본영사관에 가서 그 번호를 알아다 줘서 범인을 잡은 일이 있었다. 그 후 황옥은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는 임무를 갖고 잠입했다가 왜경에 체포됐다.”
사이토 총독 저격 사건
신동아 1969년 5월호에 실린 강우규 의사 손녀 강영재 씨의 글(오른쪽).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호부터 법정에서 의연했던 강우규 의사의 모습을 담은 기사를 게재했다. 강 의사의 재판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0년 4월 29, 16, 15일자.
강씨가 일제 수사 기록과 주변 증언 등을 종합해 쓴 글에 따르면 만주를 떠난 강우규 의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거쳐 8월 5일 서울에 잠입했다. 사이토 총독이 9월 2일 조선에 부임한다는 정보를 접한 뒤 그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당일 아침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붙잡아 맨 다음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손을 넣으면 쉽사리 폭탄을 꺼낼 수 있게 하고, 파나마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산과 수건을 들고 남대문 정거장에 나갔다. 사이토를 폭살시킨 다음 그 자리에서 자작시 한 수를 읊은 다음 조용히 일경의 포승을 받기로 작정하고 군중의 틈에 끼어서 시간을 기다렸다.”
신임 조선 총독이 탄 기차는 오후 5시 플랫폼에 도착했다. 환영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사이토 마코토가 역 밖으로 나와 대기 중인 쌍두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예포 21발이 발사됐다. 그리고 “예포 소리가 끝나자마자 몇 초 간격을 두고 또 한 방의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강우규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 폭탄은 사이토가 탄 마차 ‘일곱 걸음 앞’에 떨어졌다. ‘자욱한 연기 속에 폭탄을 맞고 쓰러진 시체들이 즐비’했지만 사이토는 화를 면했다. 현장을 빠져나온 강우규 의사는 다시 거사를 준비하다 일경에 체포돼 이듬해 11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강씨는 “일제가 조부 빈소에 일체 조객(吊客)을 금지하는 등 철저히 감시했다”며 “선영으로 모시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아 형무소공동묘지에 모셔야 했다. 조객도 없는 장례행렬이 쓸쓸히 지나갈 때 일경 두 명이 끝까지 감시하려고 쫓아와 아버지가 돌을 던지며 ‘네 놈들은 죽은 사람도 감시하느냐’고 울부짖었다”고 기록했다. 강우규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무장 항일 투쟁의 기록
동아일보는 김상옥 의사의 의거에 대한 보도금지가 해제된 직후인 1923년 3월 15일 호외를 발행해 김 의사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이다 자결한 사건의 전모를 세상에 알렸다(왼쪽). ‘신동아’는 이 사건을 우리 민족의 대표적 항일 투쟁으로 꼽고 1969년 7월호에 조카 김창수 씨의 글을 실었다.
“의열단의 활동은 국내외에서 일제의 공공건물 및 요인 고관들을 파괴 저격함으로써 세론(世論)을 환기시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양하였으며, 한편으로 일제를 공포와 불안에 전전긍긍케 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일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대표적 공격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김상옥의 큰 목표는 총독의 암살에 있었으므로 (폭탄 투척) 거사 후 (중략) 사이토의 도쿄행을 기다리며 일인(日人) 순사로 변장하고 매일 서울역에 나가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이 도쿄로 떠나기로 돼 있던 날인 1월 17일 새벽 5시경, 거사 닷새 만에 일경이 김상옥 의사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말았다. 일본 형사 수십 명이 집을 겹겹이 둘러싼 상황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씨 기록에 따르면 “(김상옥 의사가) 방 안에서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일경 1명을 즉사시키고 2명을 중상시킨 다음 나는 듯이 뒷동산 곧 남산을 향해 뛰었다. 남은 형사들이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권총을 난사했을 때는 이미 김상옥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동아일보가 발행한 호외 기사에도 당시 상황이 생생히 담겨 있다. 일제는 깜짝 놀랐고 서울 전역에 비상을 걸었다. 동아일보는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000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수백 명 경관은 왕십리 일대와 광희정 일대를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 일대를 경계하니 실로 금시에 경성시내 일대는 전시 상태와 같았다”고 전했다.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은신처를 찾아다니며 다시 닷새를 버틴 김상옥 의사는 1월 22일 새벽, 서울 효제동에서 일본 무장경관 수백 명과 맞닥뜨렸다.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세 시간 넘게 혈투를 벌이던 그는 ‘탄환이 떨어져 싸울래야 싸울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제는 ‘효제동 의거’ 직후 관련 사건 보도를 전면 금지했으나 3월 15일 이 조치가 해제됐다. 동아일보는 곧 호외를 발행, 김상옥 의사의 의거를 전하고 그가 ‘숨이 진한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였다고 보도했다. 김상옥 의사의 무장 투쟁 전모는 1969년 ‘신동아’가 직계가족의 증언 등까지 포함된 기록을 게재하면서 좀 더 생생히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