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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인조의 진휼 대책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인조의 진휼 대책

김득신의 작품으로 가을걷이를 해 타작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정묘호란 직후 큰 가뭄이 들자 조정은 진휼 대책을 마련했다(왼쪽). 유백증 정사공신교서. 정묘호란 직후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당시 병조 참의였던 유백증이 임금의 사재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고 종친들에게 하사한 땅도 백성에게 돌려주자고 건의했다. [간송미술관]

김득신의 작품으로 가을걷이를 해 타작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정묘호란 직후 큰 가뭄이 들자 조정은 진휼 대책을 마련했다(왼쪽). 유백증 정사공신교서. 정묘호란 직후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당시 병조 참의였던 유백증이 임금의 사재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고 종친들에게 하사한 땅도 백성에게 돌려주자고 건의했다. [간송미술관]

 수많은 종교나 사상이 정신과 도덕을 강조하지만 인간에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다.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면 어떤 종교적 진리나 뛰어난 사상도 결국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의 생존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으로는 전쟁과 자연재해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겹치기라도 하면 인간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인조 6년(1628) 평안도와 황해도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인조가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이 전쟁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었는데, 금년에는 또 유례없는 가뭄까지 들어 간신히 살아남은 불쌍한 우리 백성이 모두 굶어 죽게 됐다. 이 두 지역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해당 조로 하여금 특별한 대책을 세워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게 하라.


<인조실록 6년 7월 4일>

 





1년 전인 인조 5년에는 후금의 공격을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이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그때 싸우다 죽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극심한 가뭄이 닥친 것이다. 굶주려 죽는 백성이 속출하자 조정에서는 진휼 대책을 논의했다. 우의정 이정귀(李廷龜)는 이 지역이 명나라와 맞닿아 있으니 명나라의 곡식을 사들여 백성에게 먹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대책을 아뢰었다. 종묘의 제례(祭禮) 때 음악을 쓰지 않는 대신 악공들에게 베를 거두어 부족한 물자를 채우자는 방안, 왕실에 진상하는 각종 공물(貢物)을 줄이거나 폐지하자는 방안, 황해도 지방의 갈대밭에서 거두는 세금과 어염세(魚鹽稅)를 그 지역 관청에서 거두게 하자는 방안 등이었다. 모두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긴요치 않은 지출을 억제하자는 내용이었다. 병조 참의 유백증(兪伯曾)은 이보다 더 강력한 대책을 제시했다.

올해의 가뭄은 근래에 없던 심각한 수준입니다. 국가나 민간에 저장된 곡식이 고갈돼 옮겨 올 곳도 없고 사 올 방도도 없으니, 위에서 덜어 아래를 보충해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내탕고(內帑庫)에 저장되어 있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하니, 전부 나누어 주더라도 어떻게 굶주린 백성에게 두루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이 사재(私財)를 털어 나라 살림에 보탠다면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 황해도의 갈대밭은 대비전(大妃殿)에 소속돼 있고, 그 지역 물고기와 소금이 생산되는 땅은 왕족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고 흉년이 든 지금, 회수하여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조실록 6년 7월 29일>


임금의 개인 재산인 내탕고의 재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여 우선 모범을 보이고, 대비나 왕자, 공주들에게 하사했던 땅도 백성에게 돌려주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모든 백성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한 것이다. 인조는 이런 충정 어린 건의에 답했다.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그대의 의견이 매우 훌륭하다. 상소의 내용은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 


<인조실록 6년 7월 29일>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답변이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는 쭉정이 같은 대답이었다. 이후로도 유백증이 건의한 대로 시행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인조의 말에 진정성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가진 자들은 내놓지 않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편법이라도 동원해서 재원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곡식을 받고 벼슬을 파는 공명첩(空名帖) 장사였다.

국가가 난리를 겪은 뒤에는 항상 공명첩을 가지고 곡식을 모아들였는데 끝내는 신뢰를 잃는 결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선비나 백성이 공명첩을 오직 곡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곡식을 납부하라고 권해도 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삼도(下三道)의 선비 가운데 수령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자는 곧바로 수령에 임명하고,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이 없는 자들 가운데 변장(邊將)에 적합한 자는 곡식을 납부한 양에 따라 첨사(僉使), 만호(萬戶) 등의 직책에 제수하면, 필시 응모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이조와 병조에서 제수하는 자라고 하여 어찌 모두 곡식을 바친 자들보다 낫겠으며, 시골에서 농사짓는 자들이라 하여 어찌 모두 임용할 수 없겠습니까?


<인조실록 6년 9월 10일>



진휼청에서 올린 계사이다. 매번 공명첩 장사를 통해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미봉책을 써온 결과 선비와 백성의 불신이 심해졌으니, 이제는 곡식을 많이 납부한 자에게 실제 관직을 주자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까지 한 것을 보면 재원을 마련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이러한데도 인조의 대응에는 여전히 알맹이가 없었다.백성이 굶어 죽는 것을 해결할 구체적인 방안은 없고, 관원들이 구휼을 잘못하면 처벌하겠다는 경고뿐이다.

사관 또한 유백증과 같이, 지엽적인 대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왕가가 소유한 토지와 재물을 백성을 위해 내놓는다면 굶어 죽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말로만 백성을 위하는 인조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당나라 태종은 태자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겼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너는 장차 임금이 될 사람인데,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는 것이 임금 노릇이라고 생각하는 위정자가 듣는다면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말이다. 위정자가 백성을 두려워해야 백성들도 위정자를 하늘처럼 여길 것이다. 백성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백성이 하늘로 삼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신동아 2019년 2월호

이규옥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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