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집트 전역으로 퍼지고 있던 1월27일부터 2월4일까지 마침 기자는 성지 순례차 이집트를 방문 중이었다.
- 민주화 시위가 나일강 줄기를 타고 들불처럼 번져 결국 무바라크 하야를 성취해낸 시위 현장을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전한다.
(왼쪽) 2월1일 저녁 룩소르신전 옆 광장으로 시위대가 모이고 있다. (오른쪽) 룩소르신전 앞의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2세 두상’, 이집트 절대권력자 무바라크에도 황혼이 찾아왔다.
그러나 새벽에 도착한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의 파도가 유난히 심하고 거센 바닷바람에 비닐봉지 등 쓰레기가 휘날리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전에 알렉산드리아 국립박물관을 방문했고 오후에는 마차를 타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로마원형경기장과 폼페이 기둥 등 유적지를 둘러봤다.
폭풍 전야에 방문한 알렉산드리아
60대로 보이는 마부는 알렉산드리아 중앙역 광장 부근에 배치된 경찰차를 가리키며 얼마 전 시위가 있었다고 말했다. 성(聖)마가콥틱교회로 가자고 했다.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을 쓴 마가가 세우고 묻힌 곳으로 유서 깊은 교회다. 마부는 한사코 거부했다. 처음에는 그곳을 모른다고 시치미 떼기에 약도까지 보여줬더니 “그곳은 경고 지역이라 못 간다”고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거리의 시민들에게 물어서 찾아갔다. 성마가콥틱교회 입구에는 경찰이 서 있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임을 밝히자 경찰은 기자를 교회 안으로 안내해 30대로 보이는 교회관리인에게 소개했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련된 스테인드글라스와 이 교회 발전에 기여한 인사들의 명패가 벽 좌우에 붙어 있었다. 그중에는 알렉산드리아 전직 경찰서장 이름도 있었다.
“경찰이 왜 교회를 봉쇄하고 있느냐”고 묻자 교회관리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 교회는 보호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월1일 알카에다와 연관된 과격 테러분자들이 이 교회 앞에서 폭발물을 터뜨린 적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다음날인 1월28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1월30일 오후 4시경 아스완역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중국 여성 관광객은 “1월28일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다가 아무것도 구경하지 못하고 시위대와 함께 최루탄을 마시며 쫓겨 다니다가 돌아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시위 끝낸 아스완
1월28일 밤 9시경 다음 행선지인 아스완공항에 도착했다. 아스완은 인구 120만명의 대도시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일 강의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중심지로 들어갔다. 나일 강변의 한 호텔에 들어가 다음날(1월29일) 새벽 3시30분에 떠나는 아부심벨 투어 예약을 했다. 아부심벨은 이집트의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3세가 세운 신전인데 아스완에서 버스로 4시간 걸린다. 호텔 로비에서 대기 중인데 종업원들이 텔레비전 뉴스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남자 종업원을 불렀다. 뉴스에 나오는 시위대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물었다.
“무바라크 물러나라는 거지요. 무라바크는 개XX입니다.”
그 청년은 뉴스를 보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격렬한 몸짓으로 발로 밟는 시늉을 하고 사라졌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호텔 종업원이 아니고 이 호텔 종업원의 친구였다.
룩소르 하트셉수트신전 앞에 선 필자.
마차에서 내려 나일 강 가운데 있는 이시스호텔에 짐을 푼 후 저녁식사를 위해 ‘아스완문’이라는 강변식당을 찾았다. 저녁 6시경 시위대의 함성이 가까이서 들렸고 이어 최루탄 발사 소리가 들렸다. 코가 매캐했다. 식사를 급히 마치고 남은 이집트빵(아이쉐, 생명이란 뜻)을 싸달라고 한 뒤 도로 위로 올라갔다. 두건을 두른 시위대 중 한 명이 입구에서 막아섰다. 한국 관광객이라고 밝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왼쪽(아스완역 방향)으로 가면 경찰이 있으니 오른쪽으로 가라”고 일러줬다. 이집트빵을 건네자 “슈크란(고맙다)”이라고 했다.
이시스호텔로 돌아와 호텔 접견대에서 내일(1월30일) 아침 일찍 나일강을 따라 콤옴보와 에드푸를 거쳐 룩소르로 가는 이집트신전 투어 버스를 예약하려 했다. 종업원은 외곽이 봉쇄됐다며 모든 버스가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아부심벨 투어도 내일부터 못 한다고 했다.
1월30일 오후 1시에 이시스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 필레섬을 방문하고 돌아와 오후 4시경 아스완역에 도착했다. 시위대가 역 앞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룩소르행 기차는 오후 5시30분에 있었다. 역 출구에 있는 사복형사에게 룩소르는 안전한지 물었다.
“노 프로블럼(괜찮다).”
기차 출발 시각 30분 전에 탑승했는데 이집트 학술여행을 떠난 서울대 인문학 최고위과정(AFP과정) 일행 중 한 명이 문자를 보냈다. “승선한 임페리얼 크루즈호가 룩소르 지역 나일 강변에 정박 중인데 오전에 신전을 보고 와서 이 지역 시위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즈음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카이로의 한국인 식당이 불탔다.”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가 약탈당했다.” “이집트박물관 유물이 도난당했다.” “수형자 수천 명이 탈옥했다.” 이 중 사실로 판명된 것은 이집트박물관 유물 중 18점이 도난당했고 시위 격화로 경찰이 철수한 틈을 타 일부 수형자들이 탈옥했다는 것이었다(수형자 탈옥은 카이로 교민이 확인해준 것). 한국 관광객 대부분이 ‘출애굽’을 시도한 것은 이 무렵이다.
기차에서 얼른 내려 아스완역 인근의 숙소를 찾았다.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한 호객꾼의 안내로 Y여관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건장한 체구의 40대 주인이 들어와서는 “한국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다”며 자신의 이름(찰리, 별명)을 밝혔다.
찰리는 이집트차를 권하며 “한국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대통령선거를 하느냐”며 “우리는 대통령을 바꾼 지 너무 오래됐다”고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룩소르도 안전하니까 가도 된다”며 룩소르역 부근의 도미토리형 숙소를 알려줬다. 엘살람호텔이라는 곳인데 한국 배낭족들에게 저렴한 숙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룩소르행 다음 기차는 저녁 7시30분에 있었다. 배낭을 Y여관에 맡겨놓고 역 밖으로 나오자 마침 200여 명의 시위대가 도로 위에 줄서서 절했다가 다시 일어서며 마그립(일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잘 보이는 식당에 들어서니 식당 주인도 마그립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5번씩 코란 독경 소리에 맞춰 기도를 드렸다. 모스크에서 확성기를 통해서뿐 아니라 버스와 택시 안에서도 기도 시간에는 코란 독경 소리가 들린다.
마그립 기도가 끝나자 목마를 탄 젊은이가 ‘무바라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힘차게 선창하자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이들은 구호를 적은 현수막과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박수를 치며 서로 화답했다. 구호는 1월28일 카이로 시위대가 외치던 것과 똑같았다.
2월4일 오전 룩소르신전 옆 광장에서 친(親)무바라크 시위대를 배경으로 성 콥틱교회 성직자가 ‘이슬람과 기독교의 화해’를 강조했다.
이 시위대는 이슬람 이맘으로 보이는 중년의 지도자들이 이끌었는데 질서정연한 평화시위를 벌였다. 주변의 경찰들도 관망하기만 했다. 시위대는 아스완역을 벗어나 행진하기 시작했다.
저녁 7시30분발 룩소르행 기차 2등칸에 탔다. 객석은 텅 비어 있었고 유일하게 한국인 관광객만 5명 있었다. 이들은 모두 카이로까지 가서 기자 피라미드라도 보고 가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중 30대 직장인으로 보이는 관광객 3명은 성지 순례차 암만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통과해 시나이반도 휴양지 다합에 도착했는데 카이로 시위 소식을 듣고 인근의 휴양지 후루가다에서 며칠 머물렀다고 한다. 일행 중 한 남성이 말했다.
“룩소르를 구경한 뒤 아부심벨을 방문하기 위해 아스완에 도착했으나 외곽봉쇄로 버스도 타보지 못한 채 기자 피라미드라도 보러 갑니다.”
나중에 문자로 보낸 소식에 의하면 이 일행은 끝내 기자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다. 이들이 탑승한 기차는 카이로역을 앞두고 정차한 뒤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대기했다. 이들은 하차한 뒤 경찰이 경호하는 미니밴을 타고 바로 카이로공항에 도착해서 장시간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귀국했다.
반정부 시위와 친정부 시위가 교차한 룩소르
1월30일 밤 10시경 룩소르역에 도착하자 엘살람호텔의 ‘만도’라는 직원이 호텔명을 한글로 쓴 팻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룩소르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인데 배낭족이 주로 찾는 저렴한 숙소였다. 만도라는 표현은 에이전트라는 의미의 아랍어 ‘만둡’을 한국의 배낭족들이 ‘만도’라고 잘못 부른 데서 유래한 것. 만도의 일성은 “룩소르 이즈 세이프”였다. 룩소르는 베르디의 유명한 오페라 ‘아이다’의 배경 도시인 테베와 같은 곳이다. 룩소르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수도로서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인구 49만명의 유적관광도시다.
엘살람호텔에서 다음날 룩소르 서안 투어를 예약했다. 룩소르 관광은 이집트 최고의 신인 아문-라 신을 모시는 룩소르신전과 카르낙대신전이 있는 동안 투어와 투탕카멘의 미라가 완벽하게 보존된 왕가의 계곡, 이집트 최고의 여왕으로 꼽히는 하트셉수트신전이 있는 서안 투어로 나뉜다. 동안 투어는 룩소르역에서 가깝지만 서안 투어는 버스나 택시를 대절해서 30분 정도 가야 한다.
1월31일 새벽 정적을 깨는 코란 독경 소리에 눈을 뜨니 오전 5시15분이었다. 파즈르(일출) 기도시간이었다. 세수를 하고 룩소르신전 앞에 있는 빵집에서 아이쉐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엘살람호텔의 3층 도미토리에 있던 한국인 청년들이 발코니로 나와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이들 청년 3명과 30대 부부 등 5명은 오전 서안 투어를 마치고 홍해 휴양지인 후루가다에서 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카이로로 가겠다고 했다.
서안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뒤 혼자서 룩소르역 앞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종업원들은 모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임명장을 주는 장면이 나왔다. 지배인을 불러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대통령은 이집트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정권 이양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국민이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 뒤 “아이 러브 무바라크”라고 말했다. 낯선 외국인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엘살람호텔 근처의 마크하(이집트 전통찻집)에 들렀다. 이곳은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집트차 값은 2이집트파운드(약 400원)로 저렴했다. 아르길레(이슬람의 전통적인 물담배)를 물고 있는 이집트 중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뉴스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격론을 벌이는 것 같았다.
룩소르신전을 관람한 후 저녁 6시경 조명과 음향 효과를 곁들인 나이트쇼로 유명한 카르낙대신전을 방문했다. 마차를 타고 도착하니 매표소는 이미 문을 닫았다. 기념품 가게 점원에게 물었더니 “오늘 나이트쇼는 취소됐다”고 말했다. 카르낙대신전을 등에 지고 나일 강변으로 나오자마자 도로에 일군의 시위대가 트럭에 올라탄 채 경적을 울리고 이집트국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며 지나갔다. 경찰은 지켜보기만 했다.
2월2일 오후 에드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2월1일 오전부터 카르낙대신전을 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미니밴을 타고 갔는데 세워준 곳이 정확하게 카르낙대신전 앞이 아니었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물어서 가는데 엉뚱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차를 세워서 카르낙대신전의 위치를 물었더니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일단 타라고 했다. 뒷좌석에 탑승했더니 경찰간부였다. 직위를 물었더니 룩소르경찰서 고위간부(chief of cops in this area)였다. “카르낙대신전 나이트쇼를 왜 하지 않느냐”고 묻자 “시위대와 관광객들이 섞일 경우 위험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중단했다”고 했다. 카르낙대신전 나이트쇼는 이날도 취소됐다.
카르낙대신전 관람을 마치고 미니밴을 타고 룩소르신전 가까이에 내려 시푸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저녁식사를 하는 중 100여 명의 시위대가 거리를 지나갔다. 시위대는 어깨 위에 관을 메고 구호를 외쳤다. 이 식당 종업원은 시위대가 카이로 시위 중에 죽은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호루스신전이 있는 시골 마을 에드푸에도 시위 발생
2월2일 오전 10시경 룩소르역 앞에서 미니밴을 타고 아스완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에드푸로 떠났다. 에드푸는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 오시리스 신과 이시스 여신 사이에 태어난 호루스의 신전이 있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인구는 6만명으로 소도시다. 나일 강변을 따라 올라가는 도로 주위 풍경이 시원했다. 오전 11시30분경 에드푸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호루스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콥틱교회 앞에는 탱크와 군인들이 배치돼 있었다.
시골장답게 떠들썩했지만 시위 분위기는 없었다. 호루스신전에는 관광객이 몇 명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을 감시하는 경찰들은 책상에 엎드려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오후 5시경 호루스신전 관람을 마치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의 시위대가 트럭을 탄 채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들도 시위대가 탄 트럭을 따라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시위대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들어와서 한 바퀴 돈 뒤 사라졌다.
룩소르로 돌아가는 미니밴에는 아주머니와 어린이들만 타고 있었다. 이집트의 미니밴은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좌석이 모두 찰 때까지 기다렸다. 미니밴 운전사는 처음에는 기자의 탑승을 거부했다. “외국인이니까 택시를 대절해서 룩소르로 가라”고 했다. 공손하게 부탁하니까 아주머니들이 태워주라고 운전사를 다그쳤다. 화난 표정을 지었던 운전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승차를 허용했다.
그러나 오후 5시30분경 승차한 미니밴은 8시에야 출발했다. 에드푸 시내를 벗어나자 머리에 두건을 쓴 시위대가 검문을 했다. 막대기를 든 20대 초반의 시위대가 미니밴 창문을 통해 기자를 쳐다본 뒤 “레트랑제(외국인)?”라며 프랑스어를 했다. “봉 스와르”라고 인사를 건네자 웃으며 통과시켰다. 그 후로도 두 차례 시위대 검문을 마치고 난 뒤에는 경찰의 검문이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에드푸 인근 외곽은 시위대가 장악하고 에드푸와 룩소르 경계지역은 경찰이 장악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2월3일 오전 9시경 현금을 찾으러 나일 강변에 있는 ‘윈터 팰리스 호텔’ 근처로 갔다. 이 호텔은 일찍이 유럽의 이집트고고학자 등 명사들이 묵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주위에 금융가가 형성되어 있고 이집트항공사 룩소르 본점도 있다. 탱크를 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현금지급기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현금지급기는 모두 폐쇄된 상태였다.
현금을 찾아 돌아오는 길에 친(親)정부 시위대를 만났다. 이들은 트럭에 탄 채 신나는 음악에 맞춰 이집트 국기를 흔들었다. 이들은 룩소르역 앞으로 갔다가 룩소르신전 앞 광장으로 집결했다. 300여 명이 모여 무바라크 사진을 흔들며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엘살람호텔로 돌아오니 ‘만도’가 오후 7시30분에 시외버스가 카이로로 떠난다고 알려줬다. 룩소르역 오른쪽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승차권을 구입한 뒤 카이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 버스는 나일강변으로 달리지 않고 후루가다로 우회한 후 카이로를 향해 12시간을 달렸다. 후루가다 부근에서 군인들의 검문이 있었다. 수백 대의 차량이 검문으로 정차하면서 이곳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다. 군인들은 승객들의 주민등록증을 일일이 확인했다. 외국인에게는 여권을 확인한 뒤 카이로행의 목적을 물었다. 옆자리에 동승한 이헵이라는 40대의 이집트 고고학 전문가는 군인들에게 “이 사람은 한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바로 카이로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변호해줬다. 한참 후에는 경찰관이 올라와 기자의 여권을 가져갔는데 이헵은 그 경찰관을 끝까지 따라가 기자의 여권을 받아가지고 돌아와 기자는 무사히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다.
이집트 시민들의 공통적 반응
이집트 주요 도시인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스완뿐 아니라 룩소르와 에드푸 등 소도시에서 만난 일반시민들이 보인 반응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이집트군에 대한 신뢰가 확고하다는 것이었다. 친정부 시위대든 반정부 시위대든 관망하는 시민이든 한결같이 “우리 군은 국민을 향해 발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카이로의 타흐리르(자유) 광장에 진주한 탱크 바로 앞에 드러누운 반정부 시위대의 행동이나 민병대를 자처하는 시민들이 수상한 사람들을 검문해서 군인에게 인계하는 풍경은 이집트군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 무바라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임 시기에 대해서는 차이점이 있었다. 즉각 물러나야 한다는 입장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과도기간을 준 뒤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 극명하게 갈렸다.
셋째, 이집트 정부가 1월28일부터 며칠간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모두 봉쇄한 데 대해서는 시민 대부분이 분노했다. 1월27일 오후 2시경 타흐리르 교로 내려가는 나일 강변 옆에서 만난 50대 남성은 고급아파트에 사는 중산층인데 “정부가 모든 통신수단을 막았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넷째, 이집트 국민이 정치적 권리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서나 텔레비전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들이 지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지역에서 말해서는 안 될 세 가지 금기사항이 있다. 정치, 종교, 성(性)이다. 이 중 정치에 대한 토론이 도시든 시골이든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치적 자유의 물결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이집트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국가로 번져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