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협상 대신 전쟁! 난징조약은 근대판 FTA?

산업혁명과 아편전쟁

  • 조인직 | 대우증권 동경지점장 injik.cho@dwsec.com

    입력2015-01-20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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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한국은 G9이라 불릴 정도로 경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 세계사적 경제 질서를 이끄는 주류에 편입됐으니 역사의식이나 교양도 주류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 선진 ‘주류 국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강대국 반열에 올랐는지를 ‘경제’를 키워드로 살펴본다.
    협상 대신 전쟁! 난징조약은 근대판 FTA?

    1898년 프랑스의 정치 삽화.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서구 열강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케이크’를 서로 많이 차지하려 전쟁도 불사했다.

    역사학자 폴 존슨은 저서 ‘근대의 탄생(The Birth of the Modern)’에서 진정한 근대는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15년부터 시작한다고 썼다. 프랑스혁명 이후 안정기를 찾은 유럽에서는 이 시점부터 금융 경영 과학 기술 분야가 산업혁명 및 경제 자급자족과 맞물려 진정한 진보를 이뤄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제적 금융재정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금융 네트워크를 이루기 시작한 때도, 미국이 간섭과 약탈을 일삼던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겨 민족주의 시대를 열며 오늘날 강대국의 위상을 확보한 해도 1815년이다.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이때부터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이 각기 나라 체계를 확립하고 오늘날 G7의 발판을 마련했다. 현재 선진 20개국(G20) 중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선진국(Advanced)으로 분류한 나라는 9개다. G7에 한국과 호주를 보태 G9으로 일컫는다. G20이 ‘무적함대’ 스페인도 정회원이 아닌 ‘손님 회원(Guest Member)’으로 참여할 정도로 쟁쟁한 국가들의 모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G9의 위상은 실로 대단하다.

    G7이 최소 200년에 걸쳐 이룩한(어찌 보면 선점한) 과점적 경제 토대를, 한국만이 반세기 만에 따라잡아 새로 편입했다고 할 수 있다. 호주는 ‘범(汎)영국’계에 속한다. 1955년 한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 순위가 당시 120개국 중 106위였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한국은 국가 간 무역이 활성화하고, 세계적인 화폐경제와 금융질서가 구축되는 동안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비주류 국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히 G9 회원국가다. 그동안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처럼 인식되던 일본과의 1인당 국민소득 격차도 2014년 말 현재 약 2만8000달러(한국)와 3만7000달러(일본)로, 9000달러 정도로 좁혀졌다. 현대경제원 발표에 따르면 구매력 기준(현지 물가 감안) 소득으로는 이미 2015년 각기 3만8760달러(한국), 3만9108달러(일본)로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2016년부터는 역전될 전망이다. LG경제연구원은 2020년부터 명목 1인당 GDP도 역전되리라 예견했다.

    중국, GDP 최강국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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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통계를 보면 전 세계 GDP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는 미국으로 약 16조7000만 달러(22%)에 달한다. 이어 중국 9조8000만 달러(13%), 일본 4조8000만 달러(6%) 순이다. 한국은 1조4000만 달러로 1.6% 수준이다. 일본은 1968년부터 2008년까지 40년 동안 미국에 이어 GDP 2위를 차지했지만, 2009년부터 중국에 뒤졌다.

    중국의 성장률은 지난해부터 마의 7.5%대가 깨지긴 했지만, 고작해야 3%대 성장에 만족하는 여타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두 배 이상이다. 구매력 기준 GDP로 중국은 이미 지난해 미국을 제쳤다. 2030년부터는 명목 GDP도 미국을 제칠 것이라는 게 IMF의 전망이다.

    관전 포인트는 중국이 최강국에 ‘등극’하는 게 아니고 ‘탈환’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계량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의 추정에 따르면 1820년대 중국(청나라)은 GDP가 전 세계 총생산의 32%에 달하는 슈퍼 강대국이었다. 인구도 전 세계 4분의 1인 4억3700만 명 수준이었다. 하지만 1870년대 중국의 GDP가 차지하는 비율은 17.1%로 반토막 났고, 1913년(제1차 세계대전 직전) 8.8%, 1950년에는 4.5%까지 추락했다.

    중국이 슈퍼파워의 권좌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시점은 아편전쟁(1840~1842년) 직후다. 오늘날 중국의 ‘고도성장’은 1978년부터 시작된 덩샤오핑의 대외경제개방정책이 1990년대부터 빛을 발한 결과라 볼 때, 아편전쟁 이후 ‘잃어버린 150년’을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중국에서 마약사범으로 적발돼 사형당한 내외국인이 한 해 평균 2400명에 달한다. 중국 정부가 마약사범에 대해 매우 엄하게 처벌하는 것은 아편전쟁의 ‘굴욕’을, 국세(國勢)를 꺾은 결정적 전환점으로 자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킨 배경을 좀 더 살펴보자. 지금이야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가맹국 간 윈-윈(Win-Win) 상황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당시만 해도 ‘자유무역’은 ‘강자만의 자유’를 뜻했다. 예부터 서양이 동양에서 가장 원하던 물품은 차, 비단, 향신료(점차 면화, 도자기, 곡물로 확대) 등이었다. 유럽은 육식 중심의 식생활을 해왔기에 육류의 양념으로 쓰는 후추 등 향신료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고전적 동서무역 루트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에서 물건을 떼어 인도양을 건너 이집트와 시리아 해안도시를 경유해 유럽으로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해안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유럽 제국은 배를 통해 동양으로 가는 ‘직거래’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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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도회사, 그리고 애플

    그 후 17세기에 접어들며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라는, 국가의 특권을 보유한 공기업 성격의 무역전담 주식회사가 영국(1600년), 네덜란드(1602년) 등 해양 강국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향신료의 주산지가 인도를 비롯해 인도 동쪽의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 및 말레이반도 등을 포괄)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미 FTA가 경제 외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 혹은 북한이 아무리 중국에 가서 ‘투자 좀 해달라’고 해도 민간투자자들이 거절하는 것도 다 ‘안전보장’과 연결돼 있다. 곧 ‘돈을 떼먹히지 않는 질서’가 필요한데,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당시 강력한 해군력으로 오늘의 미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라이벌 관계였으나,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네덜란드 윌리엄 3세가 영국 국왕을 겸임하면서 양국 간 타협과 질서가 유지됐다.

    돈을 벌려면 예나 지금이나 경쟁력이 강한 상품을 거래해야 지속 생존이 가능하다. 당시 영국 위정자들은 ‘도자기는 어차피 기술적으로 베끼기 어렵다. 누에와 차나무는 중국밖에 없다. 동인도제도의 향신료는 어느 정도 포기하자. 그렇다면 남는 건 면직물이다. 이걸로 인도를 공략하자’고 판단했다.

    절묘한 시기에 영국에서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1733년 존 케인이 이른바 ‘나는 북(Flying Shuttle)’이라고 불리는 방직기(紡織機)를 발명해 자동적으로 실과 실을 이었고, 이후 면사와 면사를 연결해 면포를 만드는 방적기(紡績機), 대량의 면포를 빠르게 공급하는 기직기(機織機)가 탄생했다. 1785년에는 수작업을 완전히 기계화한 역직기(力織機)가 등장해 본격적인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다.

    수공업으로만 면직물을 공급하던 인도는 더 이상 영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늘날 유니클로처럼 ‘빠른 소매업(Fast Retailing)’을 앞세운 의류업체들이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듯이, 속도감과 대량생산을 통한 수요의 충족이란 돈을 버는 데 있어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국은 원재료를 더 많이 공급받기 위해 인도에 면화만 증산할 것을 요구했고, 영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인도로 역수출했다. ‘아이폰 6’의 카메라액정 같은 주요 부품을 LG전자나 대만 전자업체들이 납품하지만, 역시 최종 재화의 판매자인 애플과는 수익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이치와 비슷하다.

    영국은 면직물 무역을 통해 인도를 완전히 자신의 ‘하청 기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당시 청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차와 도자기 거래에선 무역역조에 시달렸다.

    당시는 지금처럼 ‘변동 환율제’ 같은 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하염없이 중국으로 대량의 은(銀, 무역의 대가로 지불)이 유출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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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과의 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58년 불평등한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아편전쟁과 중국의 몰락

    산업혁명 덕분에 영국은 지금의 중국처럼 ‘세계의 공장’으로 변했고, 제철 공장과 면직물 공장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은 갈수록 늘어났다. 이들을 달래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중국 ‘홍차’와 미국 ‘사탕’이었다. 두 상품의 수입량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반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자국에 유리한 산업만을 장려했다. 쌀이나 보리처럼 주식이 아니라, 가공해서 팔면 더 큰돈이 되는 이른바 ‘환금작물’의 집중 재배를 강요했다. 이 중 영국이 가장 주목한 게 아편이다.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제3자 중계무역방식’을 통해 은밀히 중국에 팔았다. 사실상 밀수출이었다.

    아편중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중국엔 비상이 걸렸다. 1796년, 중국 정부는 부랴부랴 ‘아편 수입 금지령’을 내렸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중국 관료사회가 온갖 뇌물과 향응에 빠져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뒤였다. 결국 1827년을 기점으로,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역전에 성공했다. 아편의 중국 유입량이 늘수록, 그만큼 중국의 은(銀)은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은을 통해 납세를 받던 중국의 재정은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 부족 현상은 디플레이션을 수반했고, 이후 상인들이 필수소비재 가격을 올리면서 시작된 악성 인플레이션은 서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영국은 중국에서 거둬들인 은을 대중국 무역의 중계 지점에 기반시설을 갖추는 데 썼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싱가포르다. 영국은 1826년부터 말레이반도 남부의 말라카, 페낭과 함께 싱가포르까지 식민지화했다. 당시 프랑스와 치열한 영토확장 경쟁을 벌이던 영국은 이 지역에서 우위를 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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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무역’의 대표국 영국과 ‘보호무역’의 대표국 프랑스 간 전쟁이 벌어졌다.

    위기에 직면한 중국 정부는 1839년 강직한 관료로 명성이 높던 임칙서(林則徐)를 광둥항에 급파해 ‘아편밀수’ 문제 해결을 지시했다. 임칙서는 부패관료를 적발하고 영국 무역관 창고에 보관돼 있던 아편을 전량 몰수한 뒤 태워버렸다. 당시 파머스톤 영국 외상은 ‘영국 상인의 재산권 침해’를 구실로 ‘청의 자유무역화’를 도입하는 정책까지 의회에 상정해 출병을 의결했다. 결국 1840년 ‘아편전쟁(Opium War)’이시작됐고, 영국의 ‘무적해군’은 베이징의 외항인 톈진을 공격해 중국 정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해군력에 겁에 질린 중국 정부는 서둘러 임칙서를 파면하고, 1842년 영국 함대 위에서 매우 불리한 내용의 ‘난징조약’을 통해 영국과 강화를 맺었다. 그런데 분명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은 조약이지만, 조약 내용 어디에도 ‘아편’이란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광저우(廣州) 및 샤먼(厦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의 5개항을 개항하고 공행(公行)을 폐지한다 △청조(중국 정부)는 광저우의 입구에 있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割讓)하고, (불타 없어진 아편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공행 폐지’는 국가의 허가를 받은 일부 관헌 무역상만 해외와 무역을 하면서 중개수수료 폭리를 취하는 부작용이 있으니 이를 시정하라는 요구였다. 중국 정부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사실상 ‘자유무역’을 하자는 취지(현대적인 FTA와 결이 비슷하다)였다. 영국은 추가 조약체결을 통해 중국 정부가 영국의 수입품 관세율을 책정할 때 반드시 협의하도록 하는 한편 영국법에 의한 영사재판권 도입까지 강요했다.

    ‘자유 vs 보호’ 패권 다툼 200년

    영국은 아편은 물론, 면제품 등 저가의 영국산 제품을 중국에 쏟아 부었다.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중국산 제품은 자취를 감췄다. 중국의 대영국 무역역조 규모는 더욱 커지고, 극심한 디플레이션으로 제값에 농산물을 팔지 못한 농민들은 ‘쿠리(苦力)’라고 불린 이민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들은 미국과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등지로 대거 이주해 오늘날 화교(華僑) 커뮤니티 건설의 기수가 됐다. 이민의 길마저 막힌 농민과 서민은 중국 남부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며 당시 중국 정부인 청조(淸朝)의 쇠퇴를 앞당겼다.

    비슷한 시기, 영국과 무역마찰을 빚은 곳은 중국뿐 아니다. 영국은 자국의 취약 산업 보호를 위해 프랑스와도 극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영국이 자유무역의 대표국가였다면, 프랑스는 대표적인 보호무역 국가였다.

    영국은 한랭한 기온 탓에 농산물(이 때문에 요리도 변변치 않다) 생산이 신통치 않아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무역입국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반면 프랑스는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 덕분에 농산물이 풍부해 무역에 집착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대륙봉쇄령(1806년)’이란 보호무역정책을 통해 영국을 견제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간의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이 승리했다.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해제로 맛있고 저렴한 프랑스 농산품이 영국으로 대거 수입되면서 오히려 영국의 농산품은 가격 경쟁력을 상실했다. 오늘날 한국이 FTA 체결 이후 수입한 칠레산 포도와 미국산 쇠고기가 인기를 얻은 반면 국내산 포도와 소고기의 경쟁력이 하락한 것과 비슷하다. 위기에 몰린 영국의 지주계급은 의회에 압력을 넣어 ‘곡물 가격이 일정 수준을 하회할 경우 곡물 수입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곡물법’(Corn Law, 1815년)을 제정해 자국 농산물 보호에 나섰다.

    한미 FTA에 이어 한중 FTA 타결로 우리 농업 및 수산업, 축산업의 피해 규모가 많게는 수조 원까지 예상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자국 농가 보호를 중시하는 일본도 미일 TPP체결을 앞두고 쌀, 쇠고기 수입 문제로 미국과 첨예하게 대치한다. 오늘날 세계 각국과의 교역을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200년 전에는 실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전쟁을 했다. 다만 각국이 자국 경제의 부흥을 위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FTA와 TPP를 맺으려 했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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